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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기원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무가기원설 (巫歌起源設)}이다 일제 강점기에 정노식에 의해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 주장은, 그 호 많은 동조자를 얻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성장해 왔다. 판소리가 무당들의 노래, 그것도 시나위권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의 무당들의 노래부터 나왔을 것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
첫째, 판소리와 판소리 창자의 분포 지역이 무가의 시나위권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무가나 민요는 크게 세 권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시나위권이란 경기도 남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서부 지역을 가리킨다. 특히 이 지역을 시나위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지역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을 시나위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동안 배출된 판소리 명창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
둘째, 판소리의 여러 가지 특성이 이 지역의 무가와 같다는 점이다. 우선 판소리나 시나위권의 무가나 목 쉰 소리로 부른다. 물론 자세히 보면, 무가는 판소리에 비해 힘을 빼 넋두리하는 듯한 느낌이 강한 '어정목'이라는 목소리를 사용하고, 판소리는 무가에 비해 훨씬 힘이 더 들어가는 '패기성음'이라는 목소리를 사용하지만, 못 쉰 소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춤과 같은 동작(발림)이 시나위권의 무당들이 추는 살풀이의 춤사위와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시나위권 무가의 장단이나 선율의 구성음이 판소리와 같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이다. |
셋째,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강신(降神. 신내림)에 의해 보통 사람이 갑자기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시나위권의 무당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무당이 되었는데, 판소리 소리꾼들은 '비가비'라고 부르는 극소수의 일반인 출신 창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 무당 가계로부터 나왔으며, 또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판소리 소리꾼들의 세습은 곳곳에 유명한 판소리 가문을 형성하였다. 남원과 구례를 중심으로 한 송씨 가문은 송흥록, 송광록(송흥록의 동생), 송우룡, 송만갑, 송기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했으며, 강경과 장항 일대의 김씨 가문은 김성옥, 김정금, 김창룡과 김창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하였다. 또 보성의 정씨 가문은 정재근, 정응민(정재근의 조카), 정권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명창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
넷째, 판소리의 내용적 성격이 무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시나위권의 무가는 기본적으로 살풀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판소리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판소리의 내용은 처음에는 온갖 시련을 겪다가도 나중에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흥겨운 한바탕의 축제적 분위기로 끝맺는 것이 많다. 이 축제적 분위기가 굿의 성격과 동일하다. 물론 이 축제는 '원한', 혹은 '살'로 상징되는 세상사의 어려움과 고통을 '굿' 곧 의식(儀式)을 통해 해결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과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집단적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것인데, 판소리 또한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판소리의 무가기원설은 다시 몇 가지로 파생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육자배기토리 기원설'이다. <육자배기>는 남도 민요를 대표하는 음악이며, '토리'란 민요 선율의 지역적 특색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자배기토리는 전라도 향토 선율형으로, 시나위조·육자배기조와 같은 것이다. 음계는Mi-Sol-La-Do-Re이며, 본청(기본음)은 La이다. 대부분이 La로 끝나며, 간혹 Mi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Do에서 Si에 이르는 미준음적 하강음(길게 빼면서 서서히 음의 높이를 떨어뜨리는 음)이 존재하여, 미끄러지거나 꺾어 내린다. Si는 반드시 Do를 거쳐 출현하며, 단독으로는 출현하지 않는다. Mi는 떨고, Sol은 대개 생략된다. 악상(樂想)은 여성적이고, 한스럽고, 처절하고, 부드럽다. 바로 이 육자배기토리와 판소리의 중심 선율을 이루는 계면조가 동일한 구성음과 악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무가기원설을 음악학적인 면에서 구체화한 것이다. 시나위권의 무가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원을 무가보다는 보다 범위가 넓은 민요에서 찾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육자배기토리 기원설은 무가기원설을 보완하는 위치에 있다. 무가기원설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류에 속하면서도 사회적 제도와 관련해서 기원을 논한 것으로는 <광대소학지희 기원설(廣大笑謔之戱 起源設)>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속 예능은 무당가계 출신의 남자들(巫夫)에 의해 대대로 계승되어 왔는데, 국가적인 행사에 대비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궁중의 가장 큰 연례 행사의 하나인 나례(儺禮)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 말까지 이어 내려온 것으로, 연말에 사악한 귀신을 쫓고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일종의 굿이었다. 이 나례는 처음에는 의식이 중점이었으나, 나중에는 곡예와 갖가지 연예까지 곁들어진 대규모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 중에서 곡예 중심의 놀이를 규식지희(規式之 )라고 하고, 연예 오락 중심의 놀이를 소학지희(笑謔之戱)라고 하는데, 판소리는 바로 이 소학지희 중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광대들이 각자의 재주를 겨루다가, 어느 광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도 무가의 음악과 양식을 사용하여, 우리 민속 가운데 흐르고 있는 설화를 긴 노래로 엮어 부른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조선조 후기에 이루러 국가 재정상의 이유로 나례가 폐지되기에 이르자, 생활 기반을 잃은 광대들이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간단한 인원,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광대소학지희 기원설>은 판소리를 처음 부르기 시작한 사람으로 알려진 최설단, 하은담이 무부들의 조직인 "神廳(신청)"의 대방이니, 도산주니 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 증거를 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
또 최근에 등장된 것으로 <판놀음 기원설>을 들 수 있다.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 무악(巫樂)권 창우집단의 광대소리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판놀음 기원설에서는 판소리의 육자배기토리 기원을 인정하면서도, 무가 판소리의 발전 도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무가와 판소리는 성음·시김새·장단이 다르고, 판소리 소리꾼과 단골의 복색도 다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판소리 근원이 된 설화가 전라도 단골 무가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가에서 곧바로 판소리가 나왔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무가와 판소리 사이를 이어줄 공연 부문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공연 부문이 바로 '판놀음'이라는 것이다. 판놀음은 조선조 후기 전문 놀이꾼들이 돈을 받고 벌이던 놀이인데, 판소리는 바로 이 판놀음의 주요 구성 주체의 하나인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와 성음·주요 장단·조(調)·공연방식·공연자 편성·사설의 형태와 양식·사설의 율조 등에서 동질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 무악권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판소리 기원설들은 일견 매우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지평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어떤 주장이 되었건, 무가나 무당 가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판소리의 기원에 관한 여러 학설들은 서로 상치되어 대립하고 있다기보다, 논의의 측면과 차원만을 달리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판소리가 남도 지역(시나위권, 혹은 육자배기토리권)의 무가와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판소리적 특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들은 판소리 전체를 포괄하는 게 아니고, 판소리의 일부일 뿐이다. 무속적 요소니, 육자배기 토리니 하는 것들이 판소리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판소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판소리에는 무속적인 것 외에도 충·효·열과 같은 유교적 관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 있으며, 신선사상이나 불교적 관념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
판소리의 음악적 요소에도 육자배기토리만 있는 게 아니고, '추천목'이나 '경드름'과 같은 경기도 민요의 선율이나, '메나리조'와 같은 경상도 민요의 선율도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한시의 시창이나 시조·가곡성(사대부들의 성악으로서 시조창과 비슷한 가곡의 음색을 가리킴)과 같은 사대부들의 음악인 정악의 요소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염불과 같은 불교 음악도 들어 있다. 판소리 창자들도 무당 가계에서 대부분이 나왔으나, '비가비'라는 일반인 출신 광대들도 있었던게 사실이다. 특히 판소리를 맨처음 불렀다고 하는 최선달도, 선달이라는 호칭을 슨 것으로 보아 무당 가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판소리의 기원을 어느 하나로 정해버릴 경우에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 요소가 남아 있기 마련이어서, 명백한 반론의 여지를 항상 남기게 된다. 여기서 민족음악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문화적 기원설'의 입지가 마련된다. 그들은 모든 종족의 음악은 사회와 문화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바를 추인하는 것이며, 사회 문화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판소리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 예컨대 민요니, 무가니, 정악이니 하는 것들이나, 불교니, 유교니, 신선사상이니, 무속적 요소니 하는 것들 모두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회 속에서 선택된 것들이며, 판소리에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와 문화 속에 그런 것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음악의 사회 문화적 기원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문화의 인간형성적 기능이다. 문화는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일단 음악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은 그 자체가 문화인 까닭에 다시 일정한 인간적 특성을 형성하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판소리도 마찬가지이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생겨나, 그 자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용을 겪으면서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성장한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들어주는 역할 또한 계속 수행해 왔던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므로 결국 판소리는 한국인의 삶의 결정체, 다시 말하면 수천 년에 걸친 한국인의 삶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제공 : 남원시국악연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