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남원 금지면 천만리장군 추모사당

우리둥지 2011. 8. 16. 14:13

영양천씨 중시조 천만리 장군 추모사당 환봉사

환봉사(環峰祠)-금지면 방촌리

환봉사는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있는 영양천씨 중시조 천만리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환봉(고리봉) 능선에 영양천씨 중시조인 천만리의 묘소가 있고, 그아래 산 기슭에 사당 환봉사가 있다.

현재 사당의 인근에 살고 있는 영양천씨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영양천씨 중시조가 잠들어 있는 환봉과, 사당 환봉사가 있는 금지면 방촌리는 천씨 문중에는 남다른 역사가 담겨져 있다.

남원고을에도 환봉사는 영양천씨가 문중에서 느끼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천만리(千萬里)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파병된 장군이기 때문이다.

천만리 장군은 1543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도 일찍 세상을 떠나 외숙에게 의탁했다. 중용과 대학을 배워 1571년 무과에 급제하고, 1575년 총절사(總節使) 벼슬에 올랐으며, 1592년 왜병이 조선에 침략하자 철기 2만을 이끌고 평양과 곽산 동래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정유년에도 울산에서 승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때에는 남원 숙성령 전투에서 승리한 명장 송대빈을 격려하고 광한루에 올라 남긴 시가 누각에 걸렸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찾아볼 수 없어 문중에서는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1598년에는 남원에서 약 1개월을 남원의 주둔병과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환봉을 답사하던중 길지를 감지하였고, 대동한 큰 아들에게 유택으로 정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임진 정유 양란이 끝나자 조정에서 천장군에게 화산군의 봉작을 내렸다.

한성에서 살다가 평양을 거쳐 명천에서 1620년 76세로 운명하시니 공께서 생전에 정한 금지면 환봉에 장례를 지냈다.

이후 청나라의 조선침략인 병자호란이후 친명출신들의 박해로 인하여 천씨문중은 묘소 수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방촌마을 주민들에 의해 제사가 지내졌다.

이후 천씨들이 묘소를 찾게 된 것은 1843년 족보에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 무렵으로 알고 있다.

200여년동안 묘소를 실전한 천씨문중에서는 1856년 예조로부터 사우 건립 윤허를 받았으며, 1870년 묘혈에서 지석이 발견되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고 천씨문중은 밝히고 있다.

※ 영양(潁陽)은 중국 지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