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육모정 (六茅亭) 가는 길 -3, 4.

우리둥지 2009. 8. 15. 15:37

六茅亭 가는길 3    누석단과 짐대당산, 맥반석 찜질방



주천면 소재지에서 지리산 육모정 방향으로  조그만 다리를

건너 가다보면 육모정 찜질방의 표지가 보인다.

여기서 발길을 머물고 우측으로 바라보면 기다란 솟대 하나가 보이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새가 각 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남원 주천면의 호경리의 솟대는 그 역사가 삼한시대로부터 전해온다는

설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짐대 진대 오릿대 솔대 당산으로 불리 워 지기도 하는데

특히 이 솟대는 累石壇(누석단) 위에 세워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세워 지거나 화재막이 혹은

行舟形 地勢(행주형 지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裨補 的 (비보 적)의미로

배위에 돛(짐대)을 달아 그 운행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지곤 했는데

주위에서 장승이나 벅수 들이 함께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화재막이의 경우 물질이 능한 오리를 올리곤 하여

오릿대라 불리는 연유가 되었다.

이 솟대를 살피며 우리의 민간 신앙 속에  산과 물이 가까운 지역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산불 등의 위험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솟대 아래쪽 육모정 찜질방은 만들어 진지가 이십년 가까이 된다고 하였는데

맥반석을 달구어서 온도를 올리는 찜질방의 시초라고 하였다.

본래 찜질방은 한증막이 그 원조라고 전해지는데 옛날부터 지리산에

고로쇠 물이 생산될 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여러 질병을 고치러 지리산의

한증막을 찾아 한 보름씩 고로쇠 물과 소금을 먹으며

많은 치유의 효과를 보았다고 전한다.


이곳의 육모정 찜질방은 참나무 장작을 때서 맥반석의 돌 더미를 달구어서

그 간접 열로 땀을 빼는데 단골로 찾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원적외선의 다량방출로 몸이 개운하고 특히 눈의 피로 회복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이곳의 묘미를 알려면 비가 오는 날 한번 찾아보아야 한다.

찜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지리산의 연봉들이 구름 속에 오가는

선경 속에서 고온에 데워진  몸을 지리산의 운무에 흠뻑 적시며

심호흡으로 물에 젖은 산기운으로 몸속을 가득 채우면

마치 산과 하나가 된 듯 禪悅을 맛볼 수 있어 우중의 운치를 즐기는 낭만파

애호가들이 많은 곳이다.

백두대간의 등산을 마치고 이곳을 찾아

은은한 참나무 타는 향기로 몸을 적시고 나와 멀리 돌아 걸어온 산을 바라보며

아 아 인생이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요? 하며 묻는 이가 있었다.


여름철 가족들과 오면 민박도 이용 가능하며 옆으로 흐르는 요천 맑은 냇가에서

다슬기도 넉넉히 잡을 수 있고 가끔은 반디 불이도 만날 수 있다.

소박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인심 좋은 곳으로 최신 시설을 갖춘 찜질방보다

몸과 마음이 편한 것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 7월 26일  김 재 희




六茅亭 가는 길 4------궁장현 (弓藏峴)전적지


남원시내에서 동림교를 건너 주천 방향으로 접어들면 눈앞에 지리산의

장엄한 정경이  펼쳐진다. 반야봉 만복대 정령치 고리봉으로

이어 내려오는 산세와 영제봉 그리고 견두산과 이어지는 산맥들이

흰 구름을 머리에 이고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길의

우편에서 작은 망루처럼 생긴 석조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궁장현 전적지 의 기념비 이다.

발길을 멈추고, 활을 감추다 혹은 활을 묻었다 는 뜻의 이 기념비를 살펴보았다.


이 길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에  왜침에 의해 처참하게 피로 물든 곳이다.

정유재란(1597년 8월) 때 왜군은 구례에서 밤재와 수락폭포 쪽의

숙성치 로 나누어 남원을 공략하였는데 바로 이 전적지 앞이  이동통로였다.


왜군의 종군승이 었던 경념 이라는 중의 일기에는 그때의

사정이 이렇게 기록 되여 있다.

들이나 산이나 성곽은 말할 것도 없이

모도가 잿더미가 되고 사람을 칼로 치고 쇠사슬로 엮은 대통으로 모가지를

묶어서 부모는 아들을 부르고 아들은 어버이를 찾는데 아아 불쌍하구나.

처음 보는 광경이로다. 들도 타고 산도 타는데

미친 군인들의 고함소리 마치 아수라의 본고장 같구나.

라고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전란사중 가장 처참하게 유린당한 치욕의 싸움 이였지만

일 만 인의 죽음이 풍전등화의 나라를 살린 불씨가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남원의 처절한 항전으로 로 왜군 역시 치명타를 입었고

그것이 정유재란의 승패의 판가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원 향교지에 의하면 궁장현은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 때 강덕복 이란 사람이

족당과 가동 수백 명으로 의병을 이르켜 싸우다 순절하였는데 그의 부인 양씨가

품안에서 귀고리 한 쌍을 꺼내어 하나는 남편의 시신에 하나는 자신이 물고

후일 구천에서 이것으로 信 하리라 하며 피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시신 옆에서 자진하자 그 가동들이 시신과 활과 칼을 수습하여 묻고

그의 선영 아래 장사를 지낸데 그 이름이 유래 한다고 기록 되여 있다.


또한 이곳은 조경남 장군의 의병이  왜적 56명의 목을 벤 곳이기도 하다.

그때 시산 혈해 를 이루던 그 땅속에서 붉은 피가 선명한 활촉과 칼들이

녹슬고 있을 것이다.

그 곳에 지금은 석조 기념물 하나가 묵묵히 서서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다.


2009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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