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광한루원 공부

우리둥지 2009. 8. 15. 15:31

 

 

 

광한루(廣寒樓) 보물 제281호

전북 남원시 천거동 77-1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다. 인공정원 속에 건립된 대표적인 누인 광한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팔작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다락집이다.

 

지금은 동쪽에 3칸의 부속건물이 붙어 있고, 북쪽에 팔작지붕을 중첩한 3칸의 계단을 두어 4면의 모습이 모두 약간씩 다르다. 아래층의 기둥은 둥근 석주이며 의장효과를 위해 모서리에는 네모난 석주를 세웠다. 이익공계의 공포이면서도 쇠서와 세부기법에서는 다포계의 양식을 보인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조선 중기의 목조누각, 1963.01.21일 보물 제281호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춘향사당)

 

 

- 위치 : 남원시 천거동 77-78번지

 

- 규모 : 241.81㎡

○본루 : 정면5칸, 측면4칸 팔작지붕 루 마루집

○익루 : 정면3칸, 측면3칸

○월랑 : 정면1칸, 측면3칸

 

- 조성년대 : 1419년 화의 광통루 축조

○1434년(세종 16년) 부사 민여공 중수

○1437년(세종 19년) 부사 유지례 단청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 광한루 개칭

○1582년(선조 15년) 부사 장의국 대규모 개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탐

○1599년(선조 32년) 부사 원신 재건

○1626년(인조 4년) 부사 신감 중수

○1855년(철종 6년) 부사 이상억 중수

○1879년(고종 16년) 부사 이용준 월랑 설치

○1931년 군수 백정기, 남원면장 양재영 및 진사 이수봉 등이 보수 완료

 

성춘향(成春香)

성춘향(成春香)은 남원부에서 퇴기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사이에서 1675년(조선 제 19대 숙종) 음력 4월 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과 예의범절이 남달랐던 춘향은 16세 되던 해의 단오에 신관사또 자제 이몽룡(李夢龍)과 광한루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도령은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나게 되고 둘은 훗날을 기약하며 눈물의 이별을 한다. 춘향은 후임 변사또에 의해 목숨을 건 온갖 고초를 겪다가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도령과의 행복한 재회를 한다.

이러한 춘향전 이야기는 한국 고전소설의 백미로서 우리 한민족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남원에서는 아름답고 곧은 춘향의 숭고한 사랑과 마음씨, 신분의 벽을 허물고 불의에 항거하는 선량한 민중정신 등 부덕의 표상으로 널리 선양하고 숭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