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육 모 정( 六 茅 亭) 가는 길 -- 1

우리둥지 2009. 8. 12. 13:11

 


六茅亭 가는길 1 ----龍湖石門(용호석문)


智異山의 西北자락 주천면 호경리 에서 정령치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육모정 아래 왼편으로 무심코 지나기 쉬운 石壁에 깊게 각한

용호석문이라는 글을 만날 수 있다. 옆의 石壁에는 方丈 第一洞天

(방장 제일 동천)이라는 글이 푸른 이끼에 가려 마주하고 있다.

그 옆에는 용호구곡의 일곡부터 구곡까지 용호서원의 소관이라 적혀있다.


龍湖石門....


花開의 쌍계사 입구의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로 썼다는 雙磎石門(쌍계석문)

그리고 오수의 단구대의 三磎石門(삼계석문) 에 비해 글씨체가 뛰어 난 것은

書道에 門外漢도 한눈에  바로 알 수 있다.

石門이라는 글은 洞天 (神仙이 산다는 곳, 산천의 경관이 기이하게 아름 다운곳))의

入口에 새겨져 있곤 하는데

아마도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豫告하는 標識(표지) 인 것 같았다.

 


이글은 蒼巖 李三晩 (1770-1847)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선생은 조선말 不世出의 서예가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다.

그의 이름의 유래가 그러하듯 그는 오직 수행하듯 평생을 붓으로 살아 學文, 交友 ,娶妻

들이 늦어져 훗날 三晩(세가지가 늦었다)으로 불려졌다한다.


圓嶠 李匡師 (1705-1777)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바는 없지만

그의 書體를 깊이 흠모하였고

東國眞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蒼巖體를 완성했다.

창암체는 물 흐르듯 하여 流水體 라고 말 할 만큼 걸림 없고 流麗 한 것은

그의 生涯가 世上名利를 멀리하고 溪流와 바람과 함께한 淸雅한

삶과 지극히 닮아있기 때문 인 것 같다,.


당대 최고로 추앙받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그보다 나이가

16세나 많은 김삼만의 글씨에도 모욕적인 평가를 하였지만

그가 13년이란 긴 제주유배를 마치고 돌아 와서는 제일 먼저 창암 이삼만

을 찾았다고 한다. 긴 유배생활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추사는 몸을 낮추고

겸손을 배웠고 필력과 안목이 깊어 졌을 것이다.

그때 이미 창암은 세상을 떠났고 추사는 그 후회를 창암의 비문에 남겼다고 전한다.


창암은 창의성은 붓도 毛筆에 그치지 않고 葛筆(갈필) 竹筆(죽필)

鶯羽筆 (앵우필-앵무새 털로 만든붓)들을 스스로 創案하여

사용하였으니 이 시대  奇人 문필가인 이외수가 닭털로 그림을 그리곤 하는

그 始祖가 아니었나 생각 된다.

 

그분의 遺墨을 옥과 미술관에서 대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


지리산 맑은 골짜기 구룡 계곡이 시작하는 이런 장소에서 그의  맑은 혼이

숨은 듯 깃든 글을 만나니 감개가 무량하여 나그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2009년 7월 18일 축천 김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