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피의자가 유죄라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무죄입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피고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숨을 죽이며 듣던 판결문이 끝나자 법정에서는 박수가 터지기 시작했다.
36년전 경찰관의 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한많은 삶을 살아왔던 정원섭(73) 씨가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야 마침내 무죄를 판결받자 방청객들이 무거운 침묵을 박수로 갈랐다.
신성한 법정에서 박수와 카메라 후래쉬가 터졌지만 오늘 만큼은 재판관도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순간 사슴같은 그의 눈망울이 잠시 흔들렸다.
지난 28일 오후 춘천지법 1호 법정.
"36년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던 점 등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재심을 요청했건만 이를 묵살했던 법원도 오늘은 그에게 사과를 했다.
진실은 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6년전 춘천에서 경찰관 딸의 강간살인 범인으로 지목돼 15년 2개월 15일간 옥살이를 했다.
무죄라는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몇 번이나 자살을 결심하고 세상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 말 한마디를 듣지 않고서는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것 같아 모질게 생명을 이어왔다고 밝혔다.
◇기록이 진실의 힘
이 정도 이야기는 그날 보도를 통해 대부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진실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있어야 했다.
오래된 사건이라 법원에서도 없어졌을 기록이 전해진 것은 국선변호사로서 진실을 밝히는데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의 무고함을 글로 남긴 변호사가 있었다.
고 이범렬 변호사.
그는 사라질 위기의 재판 기록 등을 남겨 `때를 기다리는 진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법원마저 그의 재심을 기각했지만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고 재심판결이 나온 결과는 이 변호사의 기록물 덕분이었다고 지인들은 회고했다.
◇하늘은 반드시 벌을 내린다.
"오늘 소감을 말해 주시죠"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봅니다.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어요"
통한의 세월을 마친 그는 눈물 대신 허탈한 모습을 보이며 동양의 고전 명심보감 천명편을 꺼내들고 자신의 심정을 대신했다.
천명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장자의 말씀이었다. 「若人이 作不善하여 得顯名하면 人雖不害나 天必戮之니라.」
「사람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해 (옳지 못한 수단으로) 세상에 이름을 얻으면(출세하면) 비록 사람은 그를 해칠 수는 없어도 하늘은 반드시 그를 줄일 것이다.」
그는 `천필육지'의 뜻을 강조했다.
"천필육지는 하늘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찢어 죽인다는 의미입니다.그 사람(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경찰) 비참하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고문에 의해 자백해야 했던 부분에서는 치떨리는 악몽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지금은 요셉처럼 그를 용서해야겠다고 덧붙였다.
위기 상황에서 약자나 부하를 위기로 내모는 사람들이 곳곳에 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자나 상사는 새겨 들어야할 대목이다.
옳지 못한 방식으로 `득현명'해 돈과 지위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천필육지'의 교훈을 가슴의 새겨야 한다.
남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은 남을 죽이면 나는 더 비참하게 죽여야 한다는 진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찍지 못한 그 사람
일제 강점기간과 맞먹는 36년 세월을 버티고 나서야 그는 통한의 세월을 끝냈다.
이날 법정 출입문 근처의 구석에는 목발을 짚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살인자 남편이라는 충격과 교통사고를 당하면서도 그의 무고를 믿어줬던 할머니 아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싫어 "무죄"라는 선언이 떨어지자 마자 자리를 떴다.
뒷모습이라도 담으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그에게 번개같은 불빛을 던질 수가 없었다.
비슷한 순간 판결을 지켜봤던 경찰측은 굳은 표정으로 문을 빠져나갔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아내에게 고마움을 털어놨다.
◇다시 사슴 곁으로
남원에서 올라온 그는 막국수 집에서 한 턱을 낸 뒤 그가 키워온 사슴 곁으로 다시 내려갔다.
감옥에서 나와 생활의 한 방편으로 사슴을 길러왔다는 후문이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싸워온 긴 세월과 이 과정에서 만난 기자들과 그는 어쩌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제는 더 볼일이 없네요"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은 고통의 긴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지만 법정 주변에서는 무덤덤한 세상처럼 공사장 소음만 떠돌았다.
세상은 이렇게 한발씩 전진하는가.
그 디딤돌은 용서와 신뢰, 진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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