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강진에 계실 적에 그때 시색(時色)인 모 씨가 호남의 관찰사가 되어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 유배가 풀릴 길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다산인들 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없었으랴마는 그 편지의 답에 ‘그대의 뜻에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벌써 늙었으며 나 한 사람의 해배는 국가로서 큰일에 관계가 없다. 호남에는 정작 큰일이 있다. 지금 한창 백성들의 고달픔이 극도에 이르고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심하니 큰 대책을 미리 세우지 않으면 호남인들의 고통을 풀어줄 도리가 없고, 이런 고통이 풀리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큰 사건이 터질 것이다. 귀양 사는 내 몸이야 유배지에서 생을 마쳐도 큰 관계가 없으니 모름지기 큰 사건이 일어날 일에 마음을 기울이시라’고 답하였다”(鄭寅普:「다산 선생의 업적」)
다산의 편지를 소개한 정인보는 말합니다. “보라! 다산 선생이 신이 아니냐. 갑오 고부(古阜)의 란(亂)의 예조(豫兆)를 그때 벌써 보지 아니하였느냐. 정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남이 미치지 못한 데까지 미치고, 남이 못 보는 것까지 보는 것이다”(같은 글). 도대체 정인보는 어떤 편지를 읽어보고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요. 1809년 무렵, 다산은 강진에서 귀양을 살며 학문에 몰두하여 밤낮을 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가뭄이 극심하여 호남 일대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거꾸로 매달린 상태의 고통을 당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목민관들은 백성들의 아픔은 돌봐주지 않고 오히려 착취행위만 곱으로 하던 때에 다산은 그런 현장에 있으면서 나라에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글을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진실로 백성들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남우(南憂:남쪽 지방의 민란)가 있을 것이니 성곽과 갑병(甲兵)을 수선하고 장수를 뽑아 군졸을 훈련시켜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게 하여 밖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아야 되고, 병을 숨기고 치료를 꺼려 종기를 키워 어느 날 느닷없이 닥치는 화란을 당해서는 안됩니다”(「與金公厚」)
다산의 친구 김이재(金履載:1767~1847)의 자(字)가 공후(公厚)이니 바로 김이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쪽 지방에서 반드시 민중봉기(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내용을 편지로 알려준 일에서 거론된 이야기였습니다. 김이재는 다산의 젊은 시절 친구로 형조·예조·이조판서 등을 지낸 고관이었지만 다산을 많이 도와준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다산은 유배 살던 강진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백성들의 실상을 고관인 친구에게 보고하였던 것이 바로 편지의 내용이었지만, 김이재도 어쩌지 못해 문제의 해결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갑오동학혁명은 1894년의 일인데 1808~9년의 다산의 편지는 머지않아 큰 난리가 날것을 예언한 셈이어서, 정인보는 ‘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예측을 다산이 했노라는 감탄을 했었습니다. 요즘 광화문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산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입니다. 만약 촛불의 참뜻인 탄핵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이제는 남우(南憂)가 아니라 국우(國憂:나라 전체의 난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감춰둘 수가 없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를 않을 것이라는 걱정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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