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우리나라 화페
광복이후 62년 화폐개혁전 대한민국 화폐
1.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에 우리나라의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되었다. 일반적으로 국호와 함께 중앙은행 명칭도 변경되는 것이 대부분 국가에서 관례이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당시 재무부에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려는 연구가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한 채 조선은행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화폐는 1949년 9월1일 태어난 독립문이 도안된 10원권과 5원권이 있으며 이 외에 보조 화폐로서 1949년 11월15일 태어나 50전, 10전, 5전 등 세종류의 지폐가 새롭게 등장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이들 5종류의 화폐이외에도 구조선은행권과 일본정부의 소액보조 화폐등도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도 한국은행 법에 따라 대한민국 법화로서 지위를 누리며 통용되었다. 독립문 10권과 5원권은 기존의 조선은행권과 달리 종이의 지질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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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소액지폐 |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2년도 채 안되는 기간 중에 태어난 5종류의 지폐중에서 소액 은행권이 세 종류있다. 이 지폐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아닌 조선은행 이라고 표기된 채 발행된 비운의 지폐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정부의 중앙은행 법이 정비가 되지 않아 종전과 같이 한국은행이 아닌 조선은행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명칭변경이 늦어진 것은 중앙은행 설립과 관련하여 당시 재무부에서는 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 자문을 구하였고 자문에 응하기 위해 뉴욕연방 준비 은행의 불름필드 박사등 일행이 한국의 금융과 경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법에 의한 한국은행이 업무를 개시한 뒤에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것과 같이 법화로서 효력을 인정한다고 간주되어 유통되었다. 이 지폐는 해방이 되고 다양하고 무분별한 화폐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 발행 되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다지 유통되지는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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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은행의 설립과 최초의 한국은행권 탄생 |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설립을 변경하여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찾고 통화가치 안정 등 산적한 금융과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무부에서 초빙한 미국의 금융이론 전문가 및 실무자들이 1949년 9월초에 한국을 찾았다. 전문가들이 한국의 금융제도와 경제 상황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재무부에서는 1950년 2월4일 한국은행법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한국은행법은 1950년 5월5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법률 제 103조에 의해 재정 공포되었다. 근대적 화폐가 발행된 지 반세기 만의 쾌거였다. 조선은행과 한국은행간의 업무 승계로서 구체제의 화폐를 새롭게 태어난 한국은행에서 동일하게 법화로서 효력이 인정되었지만 1950년 6월12일 불과 13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 간 한국은행은 1950년 8월17일 최초의 한국은행권으로 1000원권과 100원권 두 종류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인쇄를 담당하는 조선서적 인쇄 주식회사가 전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연합군 사령부의 협조로 급히 일본으로부터 두 종류의 지폐를 제작하여 미군 군용기로 운송하여 발행하였다. 최초의 한국은행권 이지만 일본에서 제조되어 다소 자주성이 희박한 불행을 안고 있다. 1000원권은 기호가 500번 까지는 일본에서 제조되었으며 500번 이후의 기호는 한국에서 인쇄된 것이다. 화폐단위로는 조선은행 시대에 사용된 원단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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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은행 좌이박지폐 시리즈 |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한으로 진군하면서 각종 보잘 것 없었던 국가기관 시설 파괴는 물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탈취한 화폐를 남발시켰다. 이런 폐단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1950년 8월26일 긴급명령 제10호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의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은행권의 법적인 지위를 없애버려 통용을 금지시켰다. 이것이 최초의 화폐개혁이었다. 일차적으로 worker line을 구축하여 서울, 경기, 강원도를 대상으로 신구 화폐교환이 이루어 졌으며 점차 전국으로 확대 시켰다. 이 시기에 발행된 지폐가 좌이박 1000원 및 500원권 일명 좌이박 지폐 시리즈가 발행 되었는데 이유는 물품거래의 편의를 위해 1000원권 외에 남색개통의 500원권의 추가로 발행되었다. 이때까지도 화폐의 유통량이 98%까지 대량으로 유통되던 조선은행권 100원을 제외한 중,소액권의 지폐는 이때까지도 한국은행권과 함께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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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 2차 화폐개혁의 시기의 화폐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지폐시리즈) |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고 전쟁의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우방국들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 구조가 호전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내 정세는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아지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에서는 경제 산업 활동 및 금융제도를 안정을 기반으로 한 시책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다소나마 억제시키기 위하여 1953년 2월에 제2차 긴급통화 조치와 금융조치를 전격 시행 하였다. 이 조치의 중요한 부분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1953년 2월17일부터 원표시의 한국은행권, 전표시의 조선은행권 및 일본정부 발행의 모든 화폐는 유통을 완전히 금지시킨다. 둘째. 화폐표기 단위는 원에서 환으로 변경시킨다. 셋째. 모든 금융거래는 100;1로 절하하여 시행한다. 이때 발행된 지폐는 모두 5종류로 1환, 5환, 10환, 100환, 1000환으로 거북선을 도안으로 전량 미국조폐창에 의뢰하여 제조 되었지만 전면의 화폐단위는 한자로 환 이지만 뒷면은 한글로 원표시로 되어있다. 신뢰성을 중시하는 한 국가의 지폐로서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거북선 도안도 전문가의 고증을 거치치 않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지 못한 일반 민화수준의 거북선이다. 이들은 미리 미국에서 인쇄시켜 놓았기 때문에 원 표시와 환 표시의 이중성이 그다지 신뢰성을 주지 못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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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체제 환표시 은행권 |
1953년 제2차 긴급통화조치시 한국은행은 미국에 의뢰하여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여 유통시키고자 1953년 3월 7일 신체제 10원과 1953년 12월 18일 신체제 100원권을 한국조폐공사에서 제조토록 하였다. 이때 제조된 두 종류의 은행권은 미국에서 수입한 노란색 인쇄용지를 사용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황색지 지폐라 불리는데 잠시동안 발행된 후 몇 개월 후 국산 백지를 사용하여 계속 발행되었다. 신체제 10환 황색지와 신체제 100환 황색지는 인쇄용지 품질이 뛰어나고 단기간에 생산되었기 때문에 희소도가 높아 수집인기가 높으며, 신체제 100환의 경우 기호가 {1}부터 {5}까지 인쇄된 것이 황색지로 분류되며 일반적으로 신체제 지폐와 국산백지로 발행된 지폐는 육안으로 쉽게 구별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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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환권 체제정비와 우이박 지폐시리즈 |
한국은행에서는 경제활동의 다양화 및 금융과 물품거래의 융통성을 원활히하기 위해 1000환권 고액권과 100환권 지폐 사이의 중간단계인 500환권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6년 3월 26일 지폐 중앙에 이승만박사를 도안한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일명, 중앙이박이라 불린다. 이어서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100환권을 순수 국내에서 인쇄된 화폐로 유통시키고자 우측에 이승만박사를 도안소재로 한 신1000원권을 발행하는 등 국내??? 지폐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므로서 거북선이 도안된 5종류 중 1환권과 5환권을 제외한 지폐가 전부 국산지폐로 대체되었다. 이후 소규모 화폐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1958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물인 독립문도안을 주제로 50환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독립문이 도안된 50환권지폐는 주로 인물위주의 지폐에 익숙했던 수집가들 사이에 인물이 아닌 독립문이 삽입되었고 유통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인기가 상당히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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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폐중앙에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된 500환권은 당시의 정치 및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어 웃지 못할 일화로 유명하다. 이승만대통령이 지폐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폐가 접혀졌을 때 얼굴이 접히고 이러 인해 대통령을 경멸한다하여 지폐제조를 중단시키고 1958년 8월 15일 도안을 우측으로 변경한 신500환권이 발행되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또한 1953년에 발행된 100환권도 도안의 위치를 약간 변경하여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모습을 도안한 게100환권을 1957년에 발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3종류의 지폐는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도안이 있다하여 우이박지폐시리즈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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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치격변기의 한글표시 환권지폐 |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정권이 자행한 1960년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빌미를 주었고 이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질서 및 물가불안정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혼란한 정세에서 국면전환을 탈피하고 경제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60년 8월 15일 세종대왕이 도안된 1000환권을 발행하였고 이듬해 4월 19일에는 세종대왕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기존의 지폐가 이승만 대통령이 도안된 지폐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던 세종대왕을 지폐도안으로 채택하므로서 국면전환을 시도하였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에 지폐의 모든 글자도 한자에서 한글로 변경하여 국민에게 친근감을 심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100원권 지폐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 떨어진 국민의 저축율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어머니와 아들이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도안으로 제조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영부인과 영식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지폐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제3차 화폐개혁으로 태어난 지 24일만에 유통이 금지되어 한국화폐사상 가장 단명지폐로 기록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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