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대산면 대곡리 암각화

우리둥지 2010. 12. 30. 18:37

남원 대곡리 암각화 (南原 大谷里 岩刻畵)
( 인터넷에서 옮겨 왔습니다.)


                            


대곡리암각화

tekokri1

남원시에서 순창(淳昌) 방향으로 국도 24번을 타고 약 7Km 서쪽으로 가다보면 '88 올림픽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자리잡은 대곡리(大谷里)가 나온다. 온 산천(山川)을 간단히 품에 안듯이 우뚝 솟아있는 풍악산(楓岳山, 603m) 제월봉을 배경으로 드넓은 대곡리가 펼쳐져 있다. 그 tekokri2 대곡리 한가운데에는 뒷산 제월봉과는 거리를 두고 마치 인근의 기암괴석(奇巖怪石)을 한군데에 모아 놓은 듯이 둥글둥글한 바위 봉우리가 솟아있다. 이러한 특이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옛부터 이곳을 봉황(鳳凰)이 알을 품은 형국(形局)이라 하여 풍수(風水)의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으로 말하여 왔다. 이런 사연인지 몰라도 이곳은 과거 봉황의 먹이라 할 수 있는 대나무를 많이 심어놓은 곳이라 하여 '죽곡(竹谷)'으로 불리웠으며, 봉황의 알이 모여 있는 이 봉우리를 '봉황대(鳳凰臺)'라고 부른다.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봉황대(鳳凰臺)'라는 암각은 1945년 이후 마을 주민이 새겨놓은 것이라 한다. 봉황대 옆을 지나는 하천(河川)은 '봉황내'로 불리고, 이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섬진강(蟾津江)을 이루면서 다시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智異山)을 지나 남해(南海)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의 행정지명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원군(南原郡) 대산면(大山面) 대곡리(大谷里)이다.

tekokri3 봉황대 주변은 모두 평탄한 지형이기에 멀리서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며, 마치 접시 안테나의 중심과도 같은 지형이라 봉황대에서 조그만 소리를 내어도 사방에서 잘 들리는 매우 특이한 지형이다. 봉황대는 모두 풍화(風化)가 상당히 진행된 화강암(花崗巖)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꼭대기와 서면(西面)은 거의 기암괴석으로 마치 벽돌과 둥그런 알들이 쌓여있는 듯하다. 또한 봉황대 아래에는 둥그런 바위 표면에 조그만 바위구멍들이 촘촘히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인위적(人爲的)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自然的)으로 형성된 것 같다. 그렇지만 꼭대기에 있는 바위들 가운데 유독 바위 정상에서만 인위적인 바위구멍(性穴)을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한 군데에서는 사진에서 보이듯이 커다란 구멍이 형성되어 있어 이의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암각화는 봉황대 꼭대기 서쪽의 두개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둘다 바위의 정남면(正南面)에 있으며, 그 아래는 길다랗고 경사진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바로 옆은 절벽이라 탁본(拓本)할 때 상당히 애를 먹었으며, 또 하나의 암각은 거의 풍화(風化)된 상황이라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저 바위의 거친 표면만 보인다. 그만큼 앞쪽에 있는 암각은 뒷쪽의 암각에 비하여 제작 시기가 상당히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뒷편의 암각을 제작할 때는 위험을 무릎쓰고 작업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뒷편의 암각은 절벽 모퉁이부터 바위면 중간까지로서 이를 제작할 때, 오른쪽으로 계속 암각을 하려했던 것처럼 공간을 비워두고 있다. 여기의 암각은 일명 '패형암각(牌形岩刻)' 또는 '검파형암각 (劍把形岩刻)'이라고 불리는 암각화로서, 전세계에서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문양(紋樣)이다. 고령, 경주, 영천, 영일, 영주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아직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내려지지 않고 있으며, 그 용도나 기능에 대하여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는 매우 독특한 문양 암각이다. 그중에서도 여기 봉황대의 암각은 그 무늬가 매우 다양하면서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암각의 크기와 기법상으로는 영일 칠포리와 비슷하다. 영일 칠포리의 암각화들은 고령과 경주에 비하여 후기로 여기고 있는데, 여기의 암각화는 칠포리에 비하여 문양이 발달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칠포리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검파형암각(劍把形岩刻)' 가운데 가장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tekokri5 두개 중 앞 바위에 새겨진 암각은 전체 1.1m x 3.1m 되는 크기로서, 검파형 문양이 모두 4개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 위부분에서 보이는 암각을 제외하면 3개 모두 다른 지역과는 다른 것으로, 단지 외곽형태(外廓形態)만 검파형일 뿐 각기 내용이 다른 무늬를 보여준다. 오른쪽 위의 암각은 고령이나 경주의 암각들과 크기와 모양이 같은 것으로서, 다른 세 개의 암각에 비하여 높은 위치에 있고, 또한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문양과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 상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 암각화를 해석하고자 할 때, 현재의 글을 읽는 순서가 아닌 과거의 방법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순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가장 최초로 암각된 것은 오른쪽 위의 암각이 되며, 그 다음이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처음에는 원래의 크기대로 조그맣게 새겼지만 두번째에서는 매우 확대된 크기로, 그 다음에는 다시 작아지면서 각기 내용의 무늬에 다양함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이 문양들이 어떤 부족(部族)의 독특한 무늬라 할 수 있는 가문(家紋)처럼 각기 부족이나 가족을 대표하는 문양이라고 할 때, (1) 이는 분명 이 지역의 조상(祖上)이 경상도에서 이주했거나 관련이 있는 부족이었으며, 여기에 정착(定着)하면서 새로운 독특한 문양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경상도에서 발견된 문양암각과 크기와 모양이 같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상호 관련이 있음을 시사(示唆)한다. 한편으로 이 지역의 원로(元老)들은 자신들의 조상(祖上)인 조씨(趙氏), 진씨(陳氏)의 근본(根本)이 중국(中國)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 조상들과 이 암각의 제작자들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지금 당장 알아내기는 힘들다.

tekokri4 첫 번째 바위에서 한 걸음 뒤에 있으며, 절벽에 간신히 걸쳐있는 바위에는 약 1.5m x 2.4m 되는 크기로 3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중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암각은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는 분간이 않되지만 마모(磨耗)가 심하게 된 까닭에 그 형태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며, 나머지 2개만이 형태가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아있는 2개의 문양 오른쪽에는 새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남아있다. 대강 보아도 최소한 2개 이상을 새길 수 있는 공간이어서, 이에 대한 의문이 일어난다. 굳이 이를 풀이하자면 아마도 뒤편의 바위 바로 앞에는 또 다른 바위가 있어서 지금의 뒷편 바위의 오른쪽을 가리고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럴 경우 지금의 바위들 사이에 또 하나의 바위가 있어 모두 3개의 바위에 나란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게 된다. 그리고 남쪽 아래에서 이를 보았을 때, 차례대로 문양의 연결이 가능해지면서, 뒤쪽의 가장자리 문양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간신히 제작된 이유가 어느정도는 설명될 것이다. 여하튼 뒤편의 2개의 문양은 그 요철(凹凸)의 깊이가 영일 칠포리의 암각화처럼 매우 깊으며, 굵기 또한 칠포리의 것과 비슷하다. 단지 문양은 칠포리의 것에 비하여 복잡하며, 그만큼 선과 점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 암각은 앞의 암각에 비하여 깊이가 상당히 다르기에 앞의 것에 비하여 늦은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새겨진 깊이로 보아 앞의 것과 뒤의 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고, 하지만 각각의 바위 문양은 동일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앞뒤의 바위에 새겨진 문양들이 과연 어느쪽이 진정 앞서있느냐는 문제이다. 현재 남아있는 상태로 보면 앞의 것이 우선이고, 문양으로 보면 뒤의 것이 앞서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과거 글자를 읽는 방법대로 오른쪽이 우선이라고 할 때, 문양에 상관없이 선후(先後)가 확실하며, 만약에 있을 중간 바위를 고려하면 더군다나 분명해진다. 단지 이럴 경우, 뒤의 문양은 칠포리에서 다시금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어느 곳에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묵묵하게 오늘도 어제같이 저먼 남쪽의 계곡을 바라다 보고있을 뿐이다. 주변에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으며, 그 바위들 정상에는 각기 바위구멍들이 파여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바위 틈에는 조그만 감실(監室)처럼 구덩이가 파여져 있고, 다시 그 아래에는 바위들 마다 스폰지 모양처럼 잔구멍들이 바위 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다. 분명히 과거에는 이 봉황대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한 어떤 의식행사(儀式行祀)가 펼쳐졌으리라. 그것도 수천년을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연연이 전해 내려오는 한반도 유일의 암각(岩刻)과 관련된 가문(家門)의 전통행사가 말이다.
(1997년 5월 사진 촬영, 1998년 9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