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산림 면적이 가장 넓은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천혜의 도시 남원은 옛날부터 지리산에서 자란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이용하여 목기를 만드는 산업이 크게 번창하였다.
더구나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이 남원의 실상사에서 개창되었으므로, 남원은 자연히 한국 선종의 중심이 되었고 이에 따라 나무로 만든 불교 용구 산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목기 산업은 한때 산업화에 밀려 퇴조하였지만 1990년대 이래 웰빙 산업의 발전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 고조로 남원의 목기 산업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남원 목기의 역사는 한때 승려가 3천여 명이 넘었던 신라의 고찰이자 대가람인 실상사 승려들로부터 주민들이 바리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더구나 실상사가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은 산이 깊고 넓어 다양한 수종이 있어 목기의 질 좋은 원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이 남원을 한국 최고의 목기 산업의 메카로 발전하게 하였다.
철제와 프라스틱 제품이 보편화되기 전에 주로 목기로 만든 생활 도구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일상사였던 유교 문화와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남원 목기는 생활 도구뿐만 아니라 제기/불교용품 등의 수요를 감당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남원 목기는 독특한 향과 함께 모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목기 자체가 단단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원 목기는 옛날부터 왕실에 진상하는 진상품이었으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궁궐에서 사용한 제기는 모두 남원 목기였다.
목기는 소리가 나지 않고 질감이 풍부하고 정갈한 맛이 있으므로 엄숙한 분위기를 필요로 하는 제사나 사찰에서의 각종 행사에 잘 어울리는 도구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목재로 목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목기 표면에 옻칠을 하지 않으면 목기의 내구성이 약해 갈라지거나 변색되는 약점이 있다. 남원 목기가 오랫동안 목기 업계에서 지존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원 장인들의 옻칠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디지털 남원문화대전 자료)
제10주 (2009. 6. 20. 토 오후)남원문화대학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3호인 옻칠정제 박강용 장인을 강사로 모시고 남원목기의 전통적 가치와 전망이란 주제 속에 인체에 좋은 옻칠을 통해서 남원목기공예로 새로운 식기문화를 이루겠다는 각오를 들었다.
이어서 남원 산내면 목기의 유래와 관련하여 김찬기(남원시의정회)회장님은 일제강점기에는 산내초등학교에 목공과(3년), 칠기과(2년)가 존립하였고, 해방 후에는 전라공업기술학교에서 남원의 전통 목공예 기술을 전수하여 걸출한 목공예 장인들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오늘날 남원 목기가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원문화대학은 강의를 듣고난 후 "목은공예사" 견학과 "남원옻칠공예관"을 관람하고 금수정을 답사하면서 아름다운 요천의 전경과 시가지를 감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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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을 답사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