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창 기념 한국도자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번 특별전 때문에 진열이 변경됐는지 2층 전시실 두 개의 방에서 그의 기증품을 볼 수 있었다. 조선 도자가 중점이 된 두 사람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2000점의 한·중·일 도자가 모여있는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은 국외의 한국도자를 감상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장소이자 잘 공개되지 않는 국외소재 한국미술품을 볼 좋은 기회였다.
조국에 대한 애정 구현한 일본 내 사업가 이병창
이병창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전북 익산출신에 이승만 정부 당시인 1949년 초대 오사카영사를 지낸 분으로 동경에서 목재무역업으로 입신했다. 한국 역사와 고미술에 깊은 애정을 지녀 많은 한국 미술품을 소장했다. 그가 일본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도 한국을 잊지 않고 고미술품을 그렇게 모아놓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일본 재계에 폭넓은 인간관계를 지닌 사업가로 일본에서 살면서도 종래 조국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구현하려 애썼다.
그는 1978년 한국도자의 걸작품을 추려 3권 1질의 대작으로 꾸민 '한국미술수선(蒐選)'을 2000부를 발행했다.
그는 서문에서 "고려청자, 조선도자에 관한 한 명품 도록의 결정판으로 만들어 연구와 감상을 위한 완벽한 책이 되도록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도자수장품가운데서 명품을 엄선 촬영해 수록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한민족의 예술적 수준이 이 책으로 말미암아 세계에 인식되고 전통에 한 번 더 불이 켜질 기회가 왔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가 거만의 사재를 들여 만든 이 책은 한국과 일본 말고도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고려청자와 조선도자를 1180쪽에 걸쳐 888점을 소개한 대작이었다. 당시 이 책의 편집책임을 졌던 이또 이꾸타로(伊藤郁太郞)씨는 이 박사가 한국미술수선을 만들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필자에게 이 박사님은 그 도록을 출판하려는 동기나 배경, 뜻과 각오를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조용히 계시던 박사님은 갑자기 쌓이고 쌓인 감정을 터뜨린 듯 열렬히 말씀을 시작했다. 그것은 박사님이 문화인으로, 또 전 외교관으로 오랜 외국생활의 경험을 통해, 조국을 국제무대에 더 알리고 싶다, 더 많은 이해를 얻고 싶다, 그래서 문화유산의 도록을 간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뼈에 사무치는 듯한 혼의 외침이었다…"
이병창 박사의 조카 문홍(文弘, 사업가)씨는 "당시 그 책의 절반을 국내외 박물관과 대학 도서관에 모두 증정했다" 고 회상했다. 이또씨는 "이 책으로 한국도자에 대한 높은 평가를 세계에 확립시켰다. 한국미술애호가나 연구자에겐 갖추어야 할 필수도서이다"고 평하고 있다. 동경대학출판회를 통해 발행한 '한국미술수선' 책값이 200여 만원을 넘던 기억이 나고 20년이 넘은 지금 봐도 아름다운 책이다.
평생 모은 301점의 한국도자기 컬렉션을 굳이 일본에 기증한 이유
평생 모은 301점의 한국도자기와 중국도자기 50점을 해서 총351점을 기증해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과 동경의 집과 부동산을 처분한 연구기금이 1999년 한국 아닌 일본에 기증된 것을 두고 충격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기 전 그의 소장품을 두고 사건이 있었다.
이병창 박사는 김영삼 대통령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그가 아끼던 고가의 백자를 한 점 기증하며 "온도, 습도를 맞춰 전시해 줄 것"을 바랐다. 박물관에서는 당시 '그만한 요구조건에 맞출 설비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돈을 내어 그런 전시실을 짓겠다' 했는데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결국 그의 기증품은 공개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다시 서울에 와서 그 물건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절망하고 이 일을 잊지 못 했다.
결국 그의 컬렉션 일괄은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자 한국도자를 수집한 아다까컬렉션이 있는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됐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병창이 펴낸 책 <한국미술수선>의 편집자이며 안택산업에서 미술품관리자로 일했고 현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장인 이또 씨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유물보존 상황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유능하고 좋은 전문가가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병창은 1999년 발간된 <우아한 색·순박한 형태-이병창 컬렉션 한국도자의 미>의 서문을 통해 그가 평생 품어온 한국미술품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밝히고 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수장된 아다까 씨의 한국도자 793점에 제가 모집한 301점의 한국도자와 50점의 중국도자를 합치면 5천 년에 걸친 민족문화의 흐름을 통시할 수 있고 관련된 도자연구가 한층 심화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의 모집품과 미술의 조사활동, 자료구입, 연구, 출판 등의 기금으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동경의 토지와 건물을 기증키로 했습니다.
이 기금이 한일문화교류, 친선과 발전에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을 기원합니다. 신관 1층에 이병창기념 도자자료실과 한국도자전시실을 설치하여 개방하고 있습니다. 적극 이용하시어 훌륭한 연구논문이 학회에 끊임없이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한국인 2, 3세 여러분도, 긴 전통과 풍요로운 역사, 문화의 모국을 자랑으로 용기를 가지고 밝은 신세기를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 4332년 이병창"
이를 보면 '일본에서 사는 재일교포들의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한 방편' 이란 명분이 애초부터 강조됐었다.
그가 남긴 조국 사랑의 자취들
이병창의 조국 사랑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자취를 남겼다. 일본에서 비밀스럽게 전해오던 역사서 후지 미야시다문서(富士宮下文書, 神皇紀)를 1988년 한국학자 최태영 박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공로가 있다.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 당시 한국에 역사연구를 위한 투자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숭실대학에 의과대학 건설을 위해 애썼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출신지인 익산의 왕궁중학교에 오랜 기간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창덕장학재단을 한때 운영했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려 했지만 그 시절 대부분 상대와 호흡이 맞지 않아 어긋났다. 한국을 사랑했던 사업가였지만 성격이 까다로워서 시간에 늦거나 일이 지시한 선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벼락이 내렸다. 대인관계는 극도로 신중해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속을 주지 않았어도 일단 터놓고 인정한 사람들에게는 헌신했다.
최태영 박사는 "그는 조국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내게 후지 미야시다 문서를 보게 다리를 놓아준 것은 한국사를 위해서 큰일을 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이해가 엇갈려 이병창 같은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실책이지만 그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이 한국에 있어야 그의 뜻을 이룸직하다."고 했다.
이병창 선생의 만년, 소장한 한국골동품 수집이야기 등을 듣고 싶어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선생은 동경을 떠나 섬의 요양원에서 병 치료 중었으며 모든 면회를 사절했다. 그가 믿었던 몇 사람 중의 하나인 최태영 박사가 그즈음 "장학재단을 같이 하나 만들어놓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했으나 "또 누가 해먹을 거 아니겠소" 하고 지친 듯 비관했다. 독지가가 세운 장학회가 권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변질되는 것이 심심찮게 목격되고 보면, 예리한 사업가인 그에겐 더더욱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창 박사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2005년 4월22일 작고했다. 비록 일본에서 생의 후반을 보냈지만 자신의 승용차 깃대 봉에는 늘 태극기를 비치해 두었고 단기 연호를 쓰던 사람이었다. 조카며느리 김경완씨가 만드는 서울 음식을 좋아하고 모든 것을 최고수준으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그의 자취는 학술원 통신에 실린 최태영의 '후지미야시다 문서 탐방기'에 적힌 정황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자명단의 많은 이들 이름 속에 그의 이름자도 한 줄 나와있음을 보았다. 기증품 사진만이라도 보고 싶지만 소개되어 있지 않다.
"잠자는 문화유산에 생기 불어넣는 일은 저의 사명"
전시장에서 '안택영일의 눈, 아다까특별전'에 앞서 이병창컬렉션을 보았다. 훌륭한 소장품들이 나와있었다. 생생한 표정을 그대로 전하는 삼국시대 귀면전부터 고려청자와 조선시대에 걸치는 백자, 분청도자기들이었다. 이중 분청상감의 각배는 '구(舊)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다. 호랑이가 있는 백자필통을 보면서 '역시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람만 그릴 수 있던, 소나무 아래 해학의 호랑이가 새겨진 필통 같은 것을 그도 좋아했던 것이다.
그가 한국도자를 수집하던 상황은 측근들도 알지 못할 만큼 신중했다. 어떤 비사가 있었는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좋을 텐데. 단순히 재물만 있는 것을 넘어, 골동품 수집은 재계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특별활동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래된 문화 배경은 권위와 즐거움의 일부이기도 하며 문화사적 역할을 한다. 또한 투자나 세금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병창도 자신의 수집품을 소개하는 436쪽의 두꺼운 도록에서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자는 문화유산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일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저의 염원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피력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병창 박사의 절친한 두 친구분 김주현, 최태영 박사와 서울에 있는 조카 문홍, 김경완 씨 내외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로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과 도쿄에는 부인 김봉랑박사와 자녀들이 있다.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 문화의 정수를 자랑스럽게 모아놓은 방에 들어서는 것으로 이병창 박사의 헌신에 조금이라도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었으면 했다. 조용하고 어둑한 전시장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한국인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 오사카에 가는 한국인 여행객들은 이곳을 들려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오사카시청(일본에선 시역소라고 하고 있다. 요도야바시역과 기타하마 지하철역 사이) 옆에 있는 건물이다.
숨이 막히게 했던 아다까컬렉션
아다까컬렉션은 20세기 초 유수한 기업체 안택산업주식회사의 회장 아다까 에이치가 회사 경영의 일환이자 그의 미의식을 발휘해 1951년부터 수집한 조선, 중국의 도자들이다. 총 1000여 점의 컬렉션 중 한국도자가 793점이나 된다. 신라토기 약간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 등 아다까가 수집한 한국도자는 놀랍게도 하나같이 빼어난 것들이었다. 한국 본토 내의 도자말고, 국외의 어떤 컬렉션도 조선도자에 관한 한 아다까컬렉션에 필적할 수 없다고들 한다.
한국이 한참 6.25로 쑥대밭이 되어 있고 일본이 그로 인해 이차대전의 피폐함에서 부흥하는 경제호황을 누리던 1951년, 일본에서는 세제 개혁이 있었다. 이에 따라 미술품 소유형태에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고 골동품을 수장한 사람들이 물건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다까회장의 안목이 이에 발휘되었다. 회사 자본금이 증자되고 주로 고려청자와 조선도자를 중점적으로 모아 들이면서 1977년 회사가 도산하기까지 약 26년간 한국도자와 중국도자가 수집됐다. 도산 이후 그의 컬렉션이 해체되고 유출될 것을 우려한 일본국회에서 보존 결의가 있었다. 1982년 이를 수용하기 위한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이 세워졌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고대서부터 근대까지 오랜 기간 한국도자기에 대한 미적 갈망과 영향을 받아왔다. 한국인으로서, 중국도자보다 한국도자를 더 많이 지녔던 그의 미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 일본 땅에 모인 것일까. 발 빠른 골동상의 움직임과 미의 본질을 알아본 사람들의 손길과 근대사의 막후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유수한 몇몇 골동상의 이름과 개인 수집가들이 등장하는데 수집에 얽힌 내용을 알기는 어려웠다. 두어 번 이곳 동양도자미술관에서 그의 컬렉션을 보았지만 그때마다 전시된 한국 도자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으면서 느끼는 위압감과 매력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단 한 번으로 완성된 유약의 붓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분청그릇은 도공의 거침없는 확신에 경외감이 든다. 이들의 미의식에 관한 훌륭한 연구가 있으면 한다. 그런 명작들이 100여점 가량 육중한 무게감을 주면서 2,3층의 여러 전시실에 보였다.
"아 어떻게 이렇게 좋은 한국도자가 이렇게 많이 일본에 와 있는 걸까. 우리는 수탈과 전란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던 때 일본에서는 이런 호사가의 업적이 있었구나. 그것도 현대에 와서 단 26년 사이에 이렇게 압도적인 컬렉션이 가능했단 말이구나. 그렇다면 한국인은 과거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명품 도자들을 생활 속에 지니고 살았단 말인가.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나."
찬란한 불교문화와 생활적인 유교에서 장인의 손을 거쳐 나온 그 산물들이 바로 한국인의 미의식을 웅변하듯 보여주는데 주변은 깊은 적막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연구자들에게는 그렇지도 않겠지만 일본 땅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전시장을 보는 것만이 다라는 것은 착잡했다.
불교와 유교에서 우러난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고대이래 일본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애호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오던 것이었다. 비록 근대에 들어서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부정하고 감추고 왜곡하려고 하지만,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막상 일본 사람들은 그런 전통 위에서 한국유물의 중요성을 빨리 알아차렸기에 이런 근사한 컬렉션을 거머쥘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다까컬렉션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기법과 형태, 문양을 대부분 망라하고 있어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전개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다고 이또관장은 소개하고 있다. 도자기 연구자 하야시야 세이조(林屋晴三)는 "아다까컬렉션은 다기(茶器)를 제외한 분야에서 근대 이후 일본에 수집된 한국 도자기를 집대성한 것이다." 고 평했다. 이 미술관 소장품의 핵심은 조선도자이지만 고려자기 중 3점이 일본의 중요문화재 또는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전시장에는 아다까 소장 도자 중 한국과 중국의 도자 10여 점에다 오사카의 한 유명요정에서 마련한 일본식 음식을 담아 연출하여 찍은 근사한 사진도 나와있고 거기다 꽃꽂이를 했던 오래된 포스터도 보였다. "이 사람들은 도자기를 이렇게 즐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아다까컬렉션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전문가들의 많은 언급이 나와있는 듯하다. 일본에 나가있기까지 그 경로를 추적한 연구논문 같은 것은 혹시 없는지 모르겠다.
'아다까 에이치의 눈' 특별전은 오사카에 이어(오는 9월30일까지) 도쿄(10월16일 ~ 12월16일까지), 후쿠오카(2008년 1월5일 ~ 2월17일까지), 가나자와(2008년 2월29일 ~ 3월20일까지)에서 순회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