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공 탄(九(구 孔 炭)
어느새 차거워진 바람이 불어오는 을씨년스런 초겨을로 접어 들었습니다.
진눈깨비가 휘날리면 따뜻한 아랫목 딸아 놓은 이불속에 손을 넣었던 시절이 떠 오르면서 구공탄 생각이 납니다
부모님과 6남매 그리고 아들 셋까지 살고 있었던 대가족이 18칸 한옥과 이래채가 있던 집이었습니다.
새벽이면 먼저 눈비비고 일어나는 어름들이 4곳 아궁이와 보일러 8개의 빨간 불빛의 구공탄을 바꾸어 주었던 기억이
가믈 가믈 하면서도 정겨웠던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 오름니다.
문풍지가 떠는 소리를 들으면서 방문을 열면 찬 공기가 몸을 오싹 움츠리게 만들었던 기억.
4곳 아궁이를 열어보고는 연탄광으로 가서 연탄집게로 불을 바꾸어
다 탄 연탄재는 눈덮인 골목에 아이들 미끄럼을 방지도 했던 풍경을 가끔 보았었습니다
잘 못하면 연탄재가 골목도 못 가서 떨어져 깨지는 난감했던 기억..
아마 그때가 1950년~1980년도 까지 값비산 기름 보일러 피하고 저렴했던 연탄을 사용 않았나 합니다.
물론 지금도 가난한 주택에서는 새깨로 두어개씩 묶어 파는 연탄 사용합니다만 기름 보일러 가스 보일러가 교환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지요.
11월말이 지나면 첫눈이 내리는 소설에 들어 가면서 겨을은 점점 더 깊어 갑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김장준비로 바빠지기도 했었지요.,
12월의 퍼~엉 펑 눈 내리는 한 겨을철이 되면 멀리에서
찹살떡을 파는 어린 친구들의 구슬픈 찹 사~알 떡! 하고 외치는 구슬픈 소리와 함께
크리스마스의 예배당에서 공자로 선물을 나누어 주던 생각.
연탄으로 아침밥도 짛고,국도 끊이고 또 더운물을 섞어서 온가족이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오면 문고리가 차~! 들어 붙었단 그 시절.
5.16 군사구테타 이후 산에서 나무를 못 베게 하니 온 국민 대다수가 구공탄에 의지하다보니 가끔 연탄깨스에 불행한 사건도 자주 생겼습니다
시장에서는 이글거리며 벌것던 연탄화덕으로 손을 녹혀가면서 장사도 하고,
석쇠에 노란 속살이 들여다 보인 군밤 장수, 따끈 따끈했던 고구마 장수, 팟이 들어 달콤했던 국화빵 장수등 열악한 장사 풍경이 향수가 느껴온다.
해마다 아내가 속해 있던 한국부인회에서 금년에도 저소득층 노약자집에 따뜻한 직접 연탄 배달이 있을 것이다.
봉사는 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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