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치하 대구신졍장로교회 주보(1943.4.11.) 상단 일부분 |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는 1937년에 작곡된 일본 가곡이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노래이다. 가사는 이렇다.
“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海行かば水み漬づく屍かばね山行かば草むす屍大君の辺へにこそ死なめ顧みはせじ).
이른바 '대동아전' 일본군 군사들은 우미유가바를 부르면서 전선에 나섰다. '천황'의 이름으로 조선 땅을 종횡 무진 짓밟았다.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가미가제 비행기를 몰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중에 우미유가바를 합창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일왕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겠다고 읊조렸다.
한국교회는 주일예배를 '애국예배'로 드렸다. 애국예배는 국가 ‘기미가요’ 봉창으로 시작됐다. 예배자들은 일동 기립하여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와 침략의 상징인 이 노래를 목소리 높여 합창했다. 지금의 일본 국가가 된 음산한 음조의 노래이다. 교회는 황거요배를 했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황', 그가 살고 있는 도쿄 궁성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것을 '궁성요배', '동방요배'라고도 일컬었다.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중에 최경례를 했다.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일왕에 대한 절대 충성의 의지를 표명했다.
한국교회는 예배 시에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했다. 이 서사는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암송을 강요한 글이다. 내선일체·황국신민화를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강화하려고 제창하게 했다. 한국교회가 목소리 높이 일제히 암송한 황국신민서사에는 성인용과 어린이용이 있었다.
<성인용>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어린이용>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주일예배는 대동아전쟁 필승기원 묵도와 우미유가바 합창으로 이어졌다. 그런 뒤에 제2부 순서로 찬송, 사도신경, 기도, 성경봉독, 헌금 송영, 광고, 찬양, 설교를 했다. 설교 후 나라를 위한 ‘국방헌금’을 했다. 교회는 일제의 전비로 쓸 헌금을 했다. 예배는 찬송, 축도, 송영, 폐회선언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것이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이었다.
이러한 배교 예배가 일제의 강요 때문이며 마지 못해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회사가들이 있다. 강요가 있었던 면이 없지 않다. 참으로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겪는 수모와 굴복, 조선민족의 처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민족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차원에서도 불가항력적이었다. 일제의 국교는 신도교였다. 국가가 국교를 관장했다.
일제말기의 일차 역사 자료들을 검토하고 당시 증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교회가 '솔선수범'하여 배교하고 일제에 아부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친일파 목사들의 지도 아래서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일왕을 태양신 곧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고 하면서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숭배했다. 장로교회 총회와 노회의 임원들은 '성지(일본)순례'를 자청했고, 도쿄와 나라 지방의 신사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중에 신사를 향하여 절을 했다. 일본기독교와 주한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우상숭배로 규정한 신사참배를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총회와 노회가 모이면 각 지역의 신사를 찾아가 최경례로 절을 했다. 교회는 교회당 안에 설치된 이동용 신사(portable shinto shrine)를 향해 절을 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일예배 때 우상숭배를 자진하여 한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는 바지가랭이를 졸라맨 '게도루'와 일본식 군복으로 권위를 뽑내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력과 교회지도자들의 솔선수범 의지에 따라 신학과 교리를 '일본기독교' 또는 '사무라이기독교' 내용으로 바꾸었다. 일본기독교는 일본인의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와 신도주의와 일본민족주의 곧 일본군국주의를 통합시킨 혼합종교 형태의 애국(일본)애족(일본족) 종교였다. 종교국가 일체는 신도주의와 일본민족주의 중심으로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묶었다.
한국교회는 고대 이단자 마르시온처럼 성경을 편집했다. 유대 민족적인 내용을 담은 성경 부분과 예수재림, 세계 통치, 천년왕국 건설을 언급하는 예언서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중왕이심 찬송하는 찬송가들을 삭제했다. 예수를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솔선수범하여 친일에 앞장서 목사들은 교회의 우상숭배, 배교를 지시하고, 지시에 순종하지 않는 교인들을 제명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고색창연한 고문서를 보면서 쓰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대구신졍교회’의 예배순서지이다. 소화 18년(1943) 4월 11일의 주보이다.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한 문서이다. "4월분 애국예배"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런 식의 우상숭배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모든 교회가 이런 식의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제 말기의 문화 여건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예배 순서지를 만든 대구신졍교회는 신도 수가 상당히 많은 교회에 해당한다. 나는 이 역사 문서를 연말에 출간할 예정인 신간 저서에 실으려고 한다.
예배순서지 “광고와 거사” 난에는 두 가지 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사경회 때 할 특별연보는 예배당 건물 수리비용과 방공기구 설비비로 사용하겠다고 한다. 건물수리비용은 무엇인가? 교회당의 구조를 일왕이 살고 있는 궁성, 도쿄를 향하여 절을 하도록 출입구와 강단의 위치를 바꾸고 개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일 가능성이 크다. 나의 고향 교회가 그러했다. 1907년에 설립된 고전교회는, 예배자들이 동쪽 방향으로 절을 할 수 있도록 예배실의 출입구를 서쪽에 두었다. 광복 후 출입구를 다시 동쪽에 두어 서쪽 방향을 향해 예배하도록 개조했다.
방공기구 설비비는 무엇일까? 적국 미국과 영국 비행기의 공습 폭격에 비하여 교회당 건물의 안전 시설 비용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교회당은 적국인 미국과 영국이 항하도록 기도하고 수련하는 곳(敵國降伏祈修)이었다.
둘째는 조선 각 교파 합동 총회가 오는 5월 5일경 경성, 서울에서 모이게 된다고 알린다. 각 교파 합동총회로 모인다는 말은 한국교회를 폐쇄하고 일본기독교조선교회라는 '쪽바리 교회'를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 모인 합동총회로 말미암아 국교회는 해체되었다. 친일파 목사 아저씨들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한국교회를 폐쇄했다. 이들은 한 제국이 들어서면 그 수명이 1천년 이상 지속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찌감치 일제에 아부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하려고 했다.
그 무렵, 한국에 순결한 교회가 없지 않았다.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단일성을 지닌 한국교회가 있었다. 이 신앙고백공동체는 일제의 감옥 안에 있었고, 한촌 사랑방, 심산유곡,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변두리 지역에 있었다. 한국교회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이다. 이 교회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교회사가들이 대체로 친일파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성삼위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주류 교회가 배교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무너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하교회 형태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한국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신앙고백적 증언이다. 이 교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정통신앙의 맥 계승 차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한국기독교의 복이며, 신앙고백적 증언이다. 일본에는 성결교회가 초기에 약간 저항을 하다가 점차 사라졌다.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무했다.
교회가 우상숭배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도록 전국교회에 명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사참배권유운동을 전개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곳저곳의 교회를 방문하고 목사와 성도들이 시류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라고 권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인들을 제명했다.
한국교회는 광복 후, 과거사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했다.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의 죄를 합당하게 참회하지 않았다. 교회의 치리 규정에 따르지 않았다. 죄인석에 앉아야 할 자들이 재판석에 앉자서 자신에게 한 없는 용서를 베풀었다. 무죄를 선언했다. 교권을 휘둘러 교회의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 거룩성을 유지하던 출옥성도들을 조직교회 밖으로 내몰아냈다. 책임을 그들에게 뒤짚어 씌웠다. "독선적 신앙을 과시하면서 교회를 분열했다"고 했다.
광복 기념일을 앞두고, 고색창연한 색깔의 대구신졍교회 주일예배 순서지, 주보를 보니, 나의 가슴이 아프다. 범죄한 한국교회를 버리지 않고 기회를 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를 하던 한국의 기독신앙공동체에 부흥의 기회를 주셨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나라밖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게 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신학자를 가진 나라가 되게 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고, 미성숙한 부분이 많지만 말이다.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차대한 복음전도, 세계교회 건설의 사명 때문이리라.
근래에 장로교회 몇 교단들이 일제말기의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를 결의했다. 한국교회의 침회 과제는 신사참배만이 아니다. 예배시간에 우미유가바를 합창하고 항거요배, 황국신민서서 암송, 국방헌금을 한 배교와 민족배신의 죄에 대한 참회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과거사 청산 과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장로교회는 정치규정과 치리회 규범을 가지고 있다. 모든 공적인 참회는 이 표준문서가 규정하는데 따라야 한다. 권징은 개혁교회의 3대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교회들은 권징 원칙에 따라 참회하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복권은 참회 심정을 담은 반성적 결의로 보인다. 그러한 결의는 해괴한 모순이다.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파면된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 면직당한 것이 정당함을 전제로 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장로교회는 죽은 자를 치리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주기철은 오래 전에 천국으로 이거했다. 죽은 자를 복권시키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습이 아닌가?
한국의 주류 교회는 경쟁하듯이 ‘장자교단’에 연연한다.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하고 민족을 배신한 그 교회, 기구단체를 계승하고 있다는 정통성에 근거하여 ‘장자교단’ 자부심을 가진다.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이 이 점에서 유별나다. 주기철 목사복권이라는 해프닝은 교회교 발상과 장자교단 갑질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조상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와 배교와 민족배신의 죄에 대한 참회 과제는 무시한 채, 그릇된 역사 의식에 함몰된 상태로 2016년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다.
조상들이 범한 굴욕적인 사건을 들추어 밝히는 것은 욕하고 지탄할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가 이러한 과정을 밟아 왔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의 혈관 속에 있는 사라지지 않은 친일파 전통과 체질을 바꾸어야 하고, 실수와 죄악을 반복하지 않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역사왜곡, 사실호도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병들게 한다. 진리성에 토대를 둔 정확한 교회사 해석과 기록이 요청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대구신졍교회’는 광복 후 교회 이름을 바꾸었다. 바뀐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분은 알려주기 바란다.
(이 글은 최덕성 교수의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www.reformanda.co.kr)에 먼저 실린 글이며, 최덕성 교수의 허락을 받고 <바른믿음>에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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