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충무공백의종군로 검토
정유년 (1597)
4 월
1 일 맑음, 출옥
2 일 종일 비,
3 일 맑음, 일찍 남으로 출발, 금부도사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 원부에 가고 나는 인덕원(수원군 과천면, 지금의 안양)에서 말 먹이고 쉬다가 저 녘에 수원에 들어가 어느 군인의 집에서 잤다. 부사가 나와 보았다.
4 일 맑음, 독산(지금의 병점)-오산을 거쳐 진위의 옛길을 따라 가다 평택의 이내은손 의 집에서 잤다.
5 일 맑음, 선영(아산군 염치리)에 도착. 외가/조카/작은 형님/여필의 부인 등의 사당 에 참배. 처가에서 장인/장모의 신위에 참배하고 잤다.
6 일 맑음, 친척/지인이 모여 인사.
7 일 맑음, 금부도사가 아산고을에서 와서 그를 극진히 접대. 금부도사, 흥백의 집에 서 잠.
8 일 맑음, 늦게 흥백의 집에 가 금부도사를 접대.
9 일 맑음, 먼 길 위로차 동네서 가무음주 모임. 금부도사도 술 마심.
10 일 맑음, 흥백의 집에서 금부도사와 이야기.
11 일 맑음, 악몽. 종을 보내 어머니 안부를 묻다. 금부도사, 온양으로 돌아감.
12 일 맑음, 어머니 배로 안흥량(서산군 안흥면)에 도착.
13 일 맑음, 어머니 배에서 사망, 해암(아산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감.
14 일 맑음, 본영에서 가지고 온 관을 짬.
15 일 맑음, 늦게 입관. 천안 원이 와서 행상을 준비.
16 일 궂은 비, 배를 중방포에 대고 영구를 상여에 매고 집으로 와서 빈소를 차림.
17 일 맑음, 금부도사의 서기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서 어서 가자고 재촉.
18 일 종일 비, 계원들이 와서 곗일을 의논.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옴.
19 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 앞에 하직. 금곡(지금의 천안시 광덕면 대덕 리)--보산원(광덕면 보산원리/보산원이 있음)를 거쳐 일신역(공주군 장기 면 신관리/지금의 공주시 신관동/공주대학교 근처)에 이르러 잠.
@@현충사에서 배방을 거쳐 풍세에서 도로 629를 타고 광덕 대덕리/보산원을 거쳐 남하하여 일신역에 도착하였다고 믿어짐.
20 일 맑음, 공주 정천동에서 아침 먹고 저녁에 이산(공주군 노성면 읍내리)에 옴. 이 고을 원이 극진히 접대. 군청 동헌에서 잠.
21 일 맑음,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를 거쳐 여산(익산군 여산면 여산리)에 와서 관 노의 집에서 잠.
22 일 맑음, 삼례를 거쳐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서 잠. 판관이 기름먹인 두터운 종이와 생각을 보내주고 부윤이 후하게 접대해 주었다.
23 일 맑음, 오원역(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지금의 관촌면 춘향로 관촌역 근처/오원 서 비스센타가 있음)에 와서 말도 쉬고 아침도 먹었다. 저물어 임실현에 도착하였다. 고을 원이 보통으로 대접하였다.
24 일 맑음, 일찍 떠나 남원에 도착. 읍에서 15 리 쯤에서 정철 등을 만남, 그들과 남원 부 5 리 안까지 가서 작별하고 10 리 밖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25 일 비가 올 것 같음, 아침 식사 후 길 떠나 운봉 박용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크게 퍼부어 머리를 내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 들으니, 원수는 벌써 순천으로 갔다고 하므로 금부도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머무르게 하였다. 이 고을 원 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26 일 흐림, 일찍 식사하고 길을 떠나 구례현에 도착하니 금부도사가 먼저와 있었다. 손 인필의 집에 사처를 정하였음. 이 고을 현감 이원춘이 급히 나와 극진히 대접하였 음. 금부도사도 보러 왔음.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라고 원에게 청하였더니 원이 아주 대접을 잘 하였다고 함.
27 일 맑음, 일찍 떠나 송치(순천군 서면) 밑에 이르니 구례 원이 점심을 지어 보냄. 순 천 송원(순천군 서면 송원리/지금의 순천대 근처/송원 곱창집, 송원 돼지구이집 등 있음)에 이르니 이득공 등이 문안하였음.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름. 원수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 조문/문안함. 위문하는 말이 자못 간곡함. 저녁에 이 고을 원이 보러 옴. 정사준도 보러 와서 원균의 망령과 패악을 많이 말 함.
28 일 맑음, 아침 원수가 권승경을 보내 문안하면서 “상중에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 로 나오라” 하였음. 또 “친근한 군관이 통제영에 있다고 하므로 편지와 공문을 보 내어 나오게 할 터이니 데리고 가서 간호하도록 하라”고 하였음.
29 일 맑음, 신 사과와 응원이 보러 왔음. 병사 이복남이 원수의 지시를 들으려고 고을 에 왔다고 함.
30 일 흐리다가 비, 병사 이복남이 보러 왔음. 감사 박홍노도 원수에게 왔다가 군관을 보내 문안함.
5 월
1 일 비, 신 사과가 머물러 이야기함. 순찰사와 병사가 원수가 머무는 정사준 집에서 회동하여 술을 마신다 함.
2 일 늦게 갬, 원수는 보성으로, 병사 이복남은 본영으로, 순찰사는 담양 가는 길에 보 러 왔다가 감. 부사도 보러왔다 감. 진흥국, 좌수영에서 와서 울면서 원균의 일 을 말함. 남원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님 영연이 평안하시다고 함.
3 일 맑음, 강소작지가 와서 곡함. 저녁에 원이 보러 왔다.
4 일 비, 어머님 생신.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5 일 맑음, 새벽꿈이 어지러웠다.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의 못된 짓 을 전하면서 장졸이 모두 배반하여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고 하였다. 천리 밖에서 종군으로 어머니 장례도 못 모시니 나와 같은 사정이 고금에 예가 있겠 는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6 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뵈었는데, 그 분들 말씀 가운데 남원의 추수 감독 일을 염려하셨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흥양에 있는 종 우노음금, 박수 매, 조택과 순화의 처가 와서 인사하였다.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한 자의 못된 짓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우수사가 편지 보내 조문하였다.
7 일 맑음, 정혜사 중 덕수가 짚신 한 켤레를 바치는데 두세 번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값을 주어 받고 이것을 정원명에게 주었다.
8 일 맑음, 승장 수인이 밥 지을 중 두우를 데리고 왔다. 종 한경은 일이 있어 보성으 로 보냈다. 흥양 종 세충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니 이것은 원수의 명령이었다.
9 일 맑음, 종 한경이 보성에서 말을 끌고 왔다.
10 일 궂은 비, 부찰사, 서장으로 조문. 전라도 순찰사, 백미와 중품 쌀 각 1 곡씩을 군 관을 시켜 보내면서 콩과 소금도 구해보낸다고 말했다. 녹도 만호, 삼과 종이를 부의로 보내옴.
11 일 맑음, 부찰사가 고을에 이르렀는데 정사립과 양정언이 와서 부찰사가 보러 오겠 다고 전하였으나 몸이 불편하다고 거절하였다. 정원명이 보리밥을 지어 내었다.
12 일 맑음, 이원룡을 보내 부찰사에게 문안하였더니 부찰사도 김덕린을 보내 문안하였 다. 남해 원 박대남이 조문 편지와 함께 쌀 2 섬, 참기름 2 되, 꿀 5 되, 조 1 섬, 미역 2 동 등을 보내옴. 저녁에 향사당에 가서 부찰사와 함께 밤늦도록 이야 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과 양정언이 와서 닭이 운 뒤 돌아 갔 다.
13 일 맑음, 정사준이 떡을 만들어 왔다. 부사가 노자를 보내주어 참으로 미안하였다.
14 일 맑음, 아침에 부사가 보고 가고, 부찰사는 부유(승주군 주암면 창촌리)로 떠났다. 정사준, 정사립, 양정언 등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하므로 일찍 아침을 먹고 떠 나 송치 밑에 이르러 말을 쉬이고, 바위에 올라 앉아 한 시간 넘도록 잤다. 운봉 의 박용이 왔다. 저물어 찬수강(승주군 황전면/오늘날 구례구역 앞 강가에 잔수 역/진이 있었음. 찬수가 아니고 잔수임)에 닿아 말에서 내려 건너가 구례 고을 손인필의 집에 도착함. 현감이 보러 왔다.
15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주인집이 아주 낮고 험하여 파리가 벌떼 같이 꾀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동헌의 모정으로 옮겼더니 남풍이 불어들어 왔다. 원과 함께 종일 이야기하다가 거기서 그대로 잤다.
16 일 맑음, 원이 점심을 내는데 너무 융숭하였다. 대단히 미안하였다.
17 일 맑음, 남원 탐후인이 와서 전하되, “원수가 운봉 길로 가지 않고 양 총병을 영접 하는 일로 전주로 달려갔다”고 하였다. 내 걸음이 낭패라 민망하였다.
18 일 맑음, 저녁에 남원에서 김종려 영공이 바로 보러 왔다.
19 일 맑음, 체찰사가 들어온다고 하므로 성안에 머물기가 미안하여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나갔다. 명협정에 앉았는데 원 이원춘이 보러 왔다. 저녁에 체찰사가 고 을로 들어 왔다.
20 일 맑음, 체찰사(이원익)와 이야기.
21 일 맑음, 박천 유해가 서울서 내려와 한산도로 내려가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22 일 맑음, 손일필 부자가 보러 왔었다. 유박천이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에 간 다 하므로 전라, 경상 두 수사와 가리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23 일 맑음, 아침에 정사룡, 이사순이 와서 보고 원공의 말을 많이 전했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였는데, 시국의 그릇된 것을 무척 분히 여기며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였다. 내일 초계(도원수 진이 있는 곳)로 가겠노라 하였더니 제찰사가 이대백이 모은 쌀 두 섬을 붙여 주기에 성 밖 주인 장세호 집으로 보냈다.
24 일 맑음, 제찰사가 군관을 보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 연해안의 지도를 그리고 싶 으나 그럴 수가 없으니 본대로 그려주면 다행이겠다” 하므로 거절할 수 없어 대 강 그려 보냈다. 저녁에 비가 굉장히 왔다.
25 일 비, 아침에 떠나려다 비 때문에 정지하고 혼자 촌집에 기대어 앉았으니 회포가 그지없다.
26 일 종일 큰 비, 비속에 떠나 석주관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왔다. 말을 쉬이 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 이정란의 집까지 왔으나 문을 닫고 거절하 는 것이었다. 그 집에는 뒤에 기와집채도 있었다. 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물색 해 보았지만 합당한 곳이 없으므로 조금 뒤에 돌아왔다. 이정란의 집은 김덕령의 아우 김덕린이 빌려서 든 집이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 억지로 청해서 들어가 잤 다. 행장이 다 젖었다.
27 일 흐리다 개다 하였다, 늦게 떠나 두치(오늘날 하동읍의 서쪽 5 리 지점 즉 강변에 있던 진이었다. 악양에서 갈 때 하동읍을 들어가는 입구의 강변) 최춘룡의 집에 이르니 사량 만호 이종호가 와 있었다.
28 일 흐림, 늦게 떠나 하목현(하목현은 하남현을 잘못 쓴 것이라고 생각됨. 하동은 태 종 때 남해를 편입시켜서 하남현이라고 부르고 현령을 두었다. 다시 하동이라고 불린 것은 숙종 때의 일. 그전은 하동의 위치도 오늘날 하동에서 남쪽으 로 30 리 쯤 떨어져 있는 고전면 고하리에 있었다. 허물어지는 하였지만 아직 도 하동읍성이 여기에 남아 있다. 오늘 날의 하동으로 읍치를 옮긴 것은 역시 숙 종 때(1703)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찾은 하동은 당시에 하남현으로 불 리었고 그 위치도 오늘날 하동이 아니고 고전면 고하리일 수 밖에 없다.)에 이르 니 그 고을 원 신태가 반가이 맞았다. 그가 나를 성 안의 별사로 맞아들여 간곡 한 정을 베풀었다.
29 일 흐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현감이 정다운 말을 많이 하 였다.
6 월
1 일 비,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지금 정수리에 “청수교”가 있거니와, 그 언저리에 청수역이 있었을 것임.) 시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이고, 저물어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들어갔다. 주인이 반가 이 접대하기는 하였지만 잘 방이 좋지 못해 간신이 밤을 지냈다.
@@고전면 고하리의 하남현(하동) 읍성 안의 별사에서 자고 이튿날 양보면을 거 쳐서 북천면의 정수리까기 왔을 것임. 여기서 북상하여 지금의 옥종면 두양리 에서 두양교를 넘었을 것임. 계속 단성을 향해 북상하다가 단성과 진주의 경계였 던 현재의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박호원의 종의 집까지 가서 거기서 잠.
2 일 비가 오다 개다하였음, 일찍 떠나 단계(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시냇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늦게 삼가현에 이르니 현감 신효업은 산성에 가서 없어서 주인 없는 공관 에서 잤다. 고을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이 밥을 지어먹으라고 하였지만 종들에게 먹 지 말라고 하였다.
3 일 비, 아침에 비가 와 머물었다.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 므로 종을 매 때리고 밥쌀을 도로 갚아주었다.
4 일 흐리다 맑음, 일찍 떠나려는데 현감 신효업이 문안장과 함께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 땅에 이르러 10 리 쯤 떨어진 곳에 괴목정이 있었다. 그 곳에서 쉬고 5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니 갈림길이 있는데, 한 길은 바로 고을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었다.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10 리 남짓해서 원 수의 진이 바라보였다. 문보가 우거하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괴한 바위가 천 길이나 되고, 굽이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였다. 길은 험하고 위태로와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 어렵겠 다. 여기가 모여곡이다.
@@첫날 이순신이 모여곡에서 잔 집은 문보가 우거하는 집이라고 하였다. 문보가 누군지는 알 수가 없는데 그의 지인 가운데 한 명이었지 싶다. 그가 우거하고 있는 집이 이어해의 집인지 아니면 별개의 집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어해의 집에서 도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별개의 집인 듯하다. 그렇다면 도배 가 끝나는 이삼일 동안은 이순신이 문보의 집에서 임시로 기거한 것이 된다.
5 일 맑음, 아침에 초계 원이 달려와 불러 들여 이야기하였다. 거처할 방을 도배하였다. (이어해의 집을 빌려서 지내게 됨) 이 날 아침 구례 사람과 하동 현감 신진이 보 내준 종과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6 일 맑음, 자는 방을 새로 도배하고 군관 휴게소 두 칸을 만들었다.
7 일 맑음, 원수의 군관 박응사와 유홍 등이 보러 왔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므로 곧 답례해 보냈다.
8 일 맑음, 아침에 정상명을 보내어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원이 그의 아우와 함 께 보러 왔다. 점심 뒤에 원수가 진에 이르므로 나도 가 보았다. 종사관이 원수 앞 에 있었다. 원수와 한참 이야기하였다.
9 일 흐림, 늦게 정상명을 원수에게 보내 문안하고 다음으로 종사관에게도 문안하였다. 처음으로 노마료(奴馬料)를 받았다.
11 일 맑음, 중복날이라 쇠라도 녹일 것 같고, 땅은 찌는 듯하였다. 명나라 차관 경략 군 문에 있는 이문경이 보러 와서 부채를 선물로 주어 보냈다. 한산도 여러 곳에 편지 14 장을 썼다.
12 일 맑음
13 일 맑고 비,
14 일 흐림
15 일 맑고 흐림, 원수 종사관 황여일이 군관을 보내어 말하되, 원수가 오늘 산성을 가려 한다고 하였다. 나도 뒤 따라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의견이 있을까 보아 서 냇가에 앉아 정상명을 보내 병이라고 아뢰고 그대로 돌아왔다.
16 일 맑음, 열과 이 원룡을 불러들여 책을 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하였다.
17 일 흐림, 아침 식사 뒤에 원수에게로 갔더니 원공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 다.
18 일 흐림, 저물어 원수가 사천 갈 일을 통지해 왔기에 곧 정 사복을 보내어 물었더니 원수가 수군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 하였다고 하였다.
19 일 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 종사관이 함께 나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가 내 게 원균의 일을 말하되, “조정에 청하여 안골, 가덕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가 토벌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사겠소. 밀고 나가려고 하지 않으려는 뜻에 불 과하기 때문에 사천에 가서 세 수사를 독촉하여 진격하도록 할 예정이오.” 라고 하 였다.
20 일 종일 비, 어릴 때 친구 (합천에 살고 있는) 서철이 보러 왔다. 오후에 종과 말의 급 료를 받아왔다. 병든 말이 차도가 있었다.
21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22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23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24 일 입추, 찌는 듯 더웠다.
25 일 맑음, 아침 식 전에 황 종사관이 보러 와서 수전에 대한 일을 많이 말하였다. 또 원수가 오늘 내일 진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황종사관이 군사문제를 토론하 다가 늦게야 돌아갔다.
26 일 맑음, 작은 워라 말이 죽었다
27 일 맑음, 늦게 황여일이 와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하였다.
28 일 맑음, 초계 아전이 보낸 고목에는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고 하였다.
29 일 맑음, 문임수가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초계역에 당도하였다고 하였다.
30 일 맑음, 새벽에 정상명으로 하여금 체찰사에게 문안드리게 하였다.
7 월
1 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늦게 개었다.
2 일 맑음
3 일 맑음, 점심 뒤 원수의 진중에 가서 황 종사관과 이야기하였다.
4 일 맑음, 아침에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5 일 맑음
6 일 맑음
7 일 맑음
8 일 맑음, 늦게 집 주인 이어해가 최태보와 함께 보러 왔다.
9 일 맑음, 내일 열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에 쓸 과물을 감봉하였다.
10 일 맑음, 새벽에 열과 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 날 새기를 기다렸다. 아침을 먹고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11 일 맑음, 열이 어떻게 갔는지 걱정스러웠다.
12 일 맑음, 종 평세가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열이 잘 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 다.
13 일 맑음
14 일 맑음
15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16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17 일 가끔 비, 변대헌, 정운룡, 득룡, 구종 등은 모두 초계 아전들인데, 어머님 족성의 같은 파 사람들로서 보러왔다.
18 일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 일 새벽 수군이 밤 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많은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하였다”는 것이다. 듣자니 통곡이 터져 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 이윽고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다. 오후 10 시께까지 이야기하였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 가 없었다. 나는, “제가 직접 해안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 겠습니다” 하였더니 원수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 선각, 방응원, 현웅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삼 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도 와서 오래 이야 기하였다.
19 일 종일 비, 오는 길에 동산산성(단성에 있음)에 올라 그 형세를 보니 매우 험고하 였다. 단성현에서 눌러 유숙하였다.
20 일 종일 비, 낮에 진주 정개산성(정개산, 현재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아래 강정(현재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에 이르렀다. 진주 목사가 보러 왔다.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처음 모여곡을 갈 때 간 길을 다시 타고 내려왔을 것임. 굴동이 지금 어디인지 는 분명하지 않음.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조에 “굴촌(屈村)폐현(廢縣), 주에서 서쪽으로 50 리에 있다,” 하였고 ‘방면’ 조에 “운곡(雲谷) 서쪽으로 50 리, 끝이 55 리이다,” 라고 있다. 이순신이 굴동과 운곡을 같이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두 지 명은 같은 지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주(진주, 숙종 이전까지는 옥종면도 다 진주 의 땅이었다)에서 서쪽으로 50 리 지점이 대체로 옥종면 문암리가 거기에 해당하므 로 다른 이들이 굴동을 문암리에 비정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21 일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다. 군수 이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제 고 장에 있다. 점심 먹고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위와 영등포 조계종 등 10 여 명이 와서 통곡하였다.
@@21 일에 노량에서 잤다는 말은 없지만 전후사정을 보아 그렇게 생각한 다. 즉 굴동에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곤양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노량에 가서 일을 보고 거기서 일박하였다고 믿어진다.
22 일 맑음, 아침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보러 와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하였다. 오 후에 곤양에 이르러 몸이 편치 않아 그대로 잤다.
23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아침에 노량에서부터 만들던 서류를 송대립에게 주어 먼저 원수부로 보내고 뒤따라 떠나 곤양 십오리원(곤양면 봉계리)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 려 잠시 쉬었다. 진주 운곡—-초고에 굴동이라 썼다가 운곡이라고 고쳐 썼다—의 전 날 숙박하였던 곳에서 잤다.
@@내려 오면서 20 일에 잤던 굴동(옥종면 문암리) 소재 이희만의 집을 뜻함.
24 일 비, 식후에 이홍훈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이 정성(정개산성의 줄인 말)에서 와 전 하기를, 황 종사관이 산성에 와서 연해안 사정을 보고 들은 대로 전하였다고 하였 다.
25 알 늦게 개임, 주인 이홍훈이 보러 왔다.
26 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일찍 밥을 먹고 정성(정개산성) 밑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 서 황종사관 및 목사와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27 일 종일 비, 이른 아침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으로 옮겨 머물렀다.
28 일 비
29 일 비, 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 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탄식할 일이다.
8 월
1 일 큰 비,
2 일 잠시 날이 들었다, 아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다 있었다.
3 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를 가지고 왔는데, 분부의 내용인 즉, 겸삼도통제사 사령이었다. 숙배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 고 곧 길을 떠났다. 바로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오후 8 시 경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횡천리 행보 마을)에 이르러서 말을 쉰 다음, 자정이 넘어 길을 떠나 두치 에 이르니 먼동이 트려했다. 쌍계동(화개면 탑리 화개장터)을 지나 석주관(토지면 연 곡)에 이르니 구례현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 토벌할 일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다. 저물어 구례에 이르렀는데 경내가 쓸쓸하였다. 성 북문 밖 전날 주인했던 집에서 잤다. 주인은 산골로 피란가고 없었다. 손일필이 곧 보러왔다. 손응남은 이른 감을 가지고 왔다.
@@전날 그가 머문 집은: 4 월 26일에 손일필집, 5 월 14 일 손일필의 집, 5 월 15/16/17/18 일 동헌의 모정, 5 월 19/20/21/22/23/24/25 일 장세호 집. 이순신이 잔 집은 손일필 집 아니면 장세호 집 둘 가운데 하나인데 손일필집은 북문 밖에 있었고 장세호 집은 동문 밖에 있었다. 위 치로 보아서는 손일필 집이 맞을 터이지만, 위에서 손일필이 보러 왔다고 한 점은 이순신이 현재 머무는 집이 손일필집이아니라는 뜻이고, 더욱이 집 주인이 산골로 피란을 갔다고 한 점은 머무는 집이 장세호 집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순 신이 북문 밖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착각일 듯하다.
4 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뒤 압록강원(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 현재 죽곡면 압록 임)에 이르러 점심을 짓고 말의 병도 고쳤다. 오후에 곡성에 이르니 관청이고 민가 고 온통 다 비어있었다. 이 고을에서 잤다.
5 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옥과 지경에 이르니 피란 가는 사람들로 길이 찼다. 고을 원 홍요좌가 처음에는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더니 조금 있다가 보러왔다. 붙잡아다 처벌하려 한 때문에 보러 온 것이다.
@@6 일에 옥과에서 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순신이 거기서 머무렀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5 일에 옥과에서 잤는지는 그런 말이 따로 없어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밤을 세워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 온 이순신이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갔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처음 옥과에 간 날 즉 5 일에도 옥과에 서 잔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6 일 맑음, 이 날 옥과에 머물렀다. 오후 8 시 경에 송대립 등이 적정을 탐지해가지고 왔다.
7 일 맑음, 이른 아침 길을 떠나 곧바로 순천으로 가는데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임금 님의 분부를 받았다. 곡성 강정(현재 곡성군 석곡면 능파 1 리에 강정마을이 있음)에 서 잤다.
@@흔히 말하기를 이 때 이순신이 현재 곡성군 석곡면 능파 1 리에 있는 능파정에서 신씨 5 형제와 밤새 나랏일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한 것인지 어떤 지는 내가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회의적이다. 첫째, 강정에서 잤다고 하는 것이 강 가에 있는 정자에서 잣다는 뜻이 아니고 강정마을에서 잤다는 뜻으로 보아야 옳다. 그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자에서 잔 예가 없다. 또 상식적으로도 정자에서의 숙박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둘째, 강정마을 출신으로 진사였고 관리였던 신대년이 실존한 인물이기는 해도 그가 그의 네 아우들과 함께 그 시점에 집에 있었다고는 생 각되지 않는다. 이순신이 곡성에 처음 들어와서 “관청도 민가도 온통 다 비 었다“고 저간의 사정을 적고 있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시라서 이순신이 잔 같은 곡성 강정 마을도 사람들이 피란을 가서 동네가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대년이 관리였다면 임지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사정이 이러한데 신대년 오형제가 모두 정자에 나와 있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셋째, 이순신은 자기가 자는 집이 개인일 경우 그 집이 누구의 집인가를 꼭 밝혔다.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군인의 집도 관노의 집도 기타 종의 집조차도 꼭 그렇게 명기해 놓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신대 년이 이순신의 친구였다면, 더욱이나 친구 누구의 집에서 잤다고 분명히 적 어 놓았을 것이다. 강정의 마을 이름은 강(보성강)가에 능파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이 능파정 정자가 마침 이 동네 출신 신대년이 축조 하였다는 점을 들어서 신대년과 그의 형제들을 이순신과 연결시켜 높이고자 하는 뜻에서 훗날 지어낸 설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8 일 맑음, 새벽에 길을 떠나 아침을 부유창(승주군 주암면 창촌리)에서 먹었다. 구덕령, 원종의, 김희온 등이 근처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 배경남과 함께 구치 고개에 이르렀다. 내가 말에서 내려 영을 내린 즉 한꺼번에 나와 절을 하 였다. 내가 피해 다니는 것을 들어 책망을 하니 모두 그 죄를 병사 이복남에게로 돌 렸다. 곧 길을 재촉하여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팍이 인적 하나 없이 쓸쓸하였다. 중 혜 희가 와서 보기에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그 순천부에서 잤다.
9 일 맑음, 일찍 길을 나서 낙안에 이르니 5 리 밖까지 많은 사람들이 보러 나왔다. 흩어 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병사 이복남이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 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관청에 들어가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상 봉이 와서 절하였다. 늦게 보성 조양(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고내 마을)에 이르러 김 안도 집에서 잤다.
10 일 맑음, 몸이 편찮아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11 일 맑음, 아침에 양산항의 집(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박곡 마을)으로 옮겨 묵었다.
12 일 맑음, 장계 초안을 잡았다. 그대로 양산항의 집에 묵었다.
13 일 맑음, 거제 현령 및 발포 만호가 보러왔다가 돌아갔다. 우후 이 몽구가 와서도 보러 오지 않았다.
14 일 맑음, 아침에 우후 이몽구에게 곤장 80 대를 때렸다. 밥을 먹은 뒤 장계 7 통을 윤 선각을 시켜 올려 보냈다. 오후에 어사 임몽정을 만날 일로 보성군으로 가서 잤다.
15 일 비, 식후 열선루에 나가 앉아있는데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8 월 초7 일에 만들어진 서류였다. 곧 편지받은 데 대한 장계를 작성하였다. 보성의 무기를 점고하여 네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실었다.
16 일 맑음, 아침에 원과 군관들을 굴암에 보내어 피해 달아난 관리들을 찾아내게 하였다. 선전관 박천봉이 돌아가는 편에 나주 목사 및 어사 임몽정에게 편지 답장을 부쳤다.
17 일 맑음, 일찍 밥을 먹은 뒤 곧바로 장흥의 백사정(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명교 마을)으 로 갔다. 점심 뒤에 군영구미(보성군 회천면 전일 2 리 군학마을)로 가니 경내가 이 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 배설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 감관과 색리는 군량을 모조리 도둑질하여 나눠가던 참인데, 내가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 호되게 곤장을 때렸다. 거기서 잤다.
18 일 맑음, 회령포(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갔다. 수사 배설이 배 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그 포구 관청에서 잤다.
19 일 맑음,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였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건방 진 태도가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영리를 곤장 때렸다.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그 전선 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 등에게 준 죄로 곤장 20 대를 쳤다.
20 일 맑음, 앞 포구가 협착하여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완도 들어가지 전에 있음)으로 진을 옮겼다.
21 일 맑음, 곽란, 인사불성
22 일 맑음, 곽란 거동불가
23 일 맑음, 너무 아파 뭍에 상륙
24 일 맑음, 일찍 도괘(해남군과 북평면 영전리, 완도 입구의 이진과 땅끝 마을에 있던 갈 두 사이)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어란(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땅끝 마을 가기 전에 있음)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에서 잤다.
25 일 맑음, 그대로 어란 앞바다에 그대로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 먹이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문을 퍼뜨려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헛소문 퍼뜨린 두 명을 잡아 곧 목을 베어 효수하니 군중인심이 크 게 안정되었다.
26 일 맑음, 그대로 어란에 머물었다. 적이 이진에 왔다.
27 일 맑음,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머물렀다.
28 일 맑음, 적선 8 척이 뜻밖에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수사 도 달아나려고 하였다. 나는 꼼짝도 않고 있다가 적선이 다가오자 각지기를 흔들어 뒤좇으니 적선은 물러났다.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땅끝)까지 좇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장도(해남군 송지면 내장)로 옮겨 머물렀다.
29 일 맑음, 아침에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건너갔다.
30 일 맑음, 그대로 벽파진에 머물렀다.
9 월
1 일 맑음, 그대로 벽파진에 머물렀다.
2 일 맑음, 이 날 새벽 배설이 도망갔다.
3 일 비
4 일 북풍, 배를 겨우 보전하였다.
5 일 북풍, 배가 부지할 수 없었다.
6 일 바람은 자는 듯 했지만 파도는 가라앉지 않았다.
7 일 바람이 완전히 잤다. 적선 55 척 가운데 13 척이 어란 앞바다에 나타났다. 오후 4 시 적선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 배가 공격하니 적선이 도망하였다. 오 후 10 시 경 적선이 포를 쏘면서 공격하였다. 내가 탄 배가 공격하면서 포를 쏘니 적선이 자정께 물러났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8 일 맑음, 적선이 오지 않았다.
9 일 맑음, 중양절, 소 5 마리를 잡아 군인들을 먹이고 있을 때 적선 2 척이 우리 배의 많 고 적음을 관찰하러 왔다. 영등포 만호가 뒤좇았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10 일 맑음
11 일 맑음
12 일 비
13 일 북풍
14 일 북풍,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적선 55 척이 이미 어란 앞 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15 일 맑음, 밀물이 들었다.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 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잤다. 밤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16 일 맑음, 이른 아침 망군이 와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 여 척이 명량을 거쳐 돋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하였다.
명량전투!
'♧ 나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8 수복 때 (0) | 2016.06.26 |
---|---|
백범 김 구 선생 교훈 (0) | 2016.06.16 |
[스크랩] **나는 한국의 후손이다. (0) | 2016.05.19 |
효녀 의 탄생 (0) | 2016.02.05 |
이승만 초대 대통령 (0) | 201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