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이야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우리둥지 2016. 1. 22. 18:14

‘이승만 국부론’
이 만 열(숙명여대 명예교수)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이 4·19 민주묘역을 참배한 자리에서 ‘이승만 국부(國父)론’을 노래했다. 그는,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분을 ‘국부’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승만은 원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분이었고 그때 만들어진 뿌리가 성장해서 4·19 혁명에 의해 민주주의 가치가 확립됐다고 했다. 이는 뉴라이트계로부터 자주 듣던 소리였다. 이 발언으로 ‘국민의당’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이 쏟아지게 되자, 그는 며칠 뒤 4·19 유가족과 관계자들을 향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폐를 끼쳤다면서 자신의 ‘이승만 국부’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이승만이 국부란 호칭에 어울릴 도덕적 기준을 갖추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자신은 사회통합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므로 그 진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이승만 국부론'을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하필 4·19 민주묘역에서

  그의 발언은 이념과 지향,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세력이 이합집산하는 작금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출된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것이어서, 정치적 이해득실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단순화시켜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공동위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민(中民)이론가’로서 학문적인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으며, 4.19와 5.18의 민주정신을 체휼해 온 분으로 깊은 생각없이 그런 중요한 문제를 주장할 분이 아니다. 때문에 그의 사과발언이 학문적 통찰력에 의해 다듬어진 것인지, 창당과정의 이해득실을 고려, 임기응변으로 발언한 것인지 가벼이 판단할 수 없다. 아무튼 그의 발언은 MB 정권 이래 심심하면 한 번씩 튀어나왔던 ‘이승만 국부론’을 다시 여과할 수 있게 한 것은 다행스럽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그가 집권했을 때, 전기가 간행되고 동상이 세워지고 화폐의 화상으로 등장했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4.19 이후에는 독재자로 배척, 평가되었다.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진영논리에 영향을 받으면서 첨예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더구나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역사적인 접근법으로 그의 행적을 살피면서 그를 평가하는 수밖에 없다. 그를 국부로 평가할 수 있는가의 여부도 이런 역사적 평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 역사를 어떻게 객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일 수밖에 없지만.

  좀 엉뚱한 듯하지만, 근대국가에서 국부(國父)는 어떤 존재인가. 과문이어서 지금도 국부를 내세우고 숭상하는 나라가 몇이나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미국이 조지 워싱턴과 건국의 아버지들을 언급하고 있다지만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한때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그런 대접을 받았고, 남미 5개국을 독립시킨 시몬 볼리바르나 수천 년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쑨원(孫文) 또한 국부라고 칭송받았다. 그 누구보다도 국부로 추앙받는 분은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이다. 그는 1차 대전 후 전승국과 그리스의 압력으로부터 터키를 보전, 근대국가로 재탄생시켜 ‘터키인의 아버지(아타튀르크)’로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 장군으로 1차 대전 때 오스만 터키가 붕괴되자 독립군을 이끌고 사분오열된 터키를 구하여 공화정을 세우고 국부로 추앙받게 되었다. 국부로 추앙받는 분들은 대부분 독립전쟁에서 영웅적으로 활동하여 나라를 세운 공로로 그 명예를 헌상받았다.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이승만을 대하면서 다음 두 경우에 특히 존경한다. 한 말 옥중에서 초인적인 활동을 보였을 때와 정부수립 초기의 특정 활동에서다. 그는 몰락 왕족(讓寧大君)의 후예로서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여 영어와 신학문을 익히고 개화·개혁적인 활동에 나섰으며 독립협회 사건 후 옥에 갇혀서도 저술에 힘쓰고 사전을 만들며 옥중학교를 열어 죄수들을 가르쳤다. 이때 그의 사상과 활동은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다. 또 그가 대한민국 정부를 임정의 전통 위에 수립한 것도, 그의 독립운동의 성과와 관계없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공적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제의 폭정하에서 3.1혁명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수립되었는가를 밝힌 것은,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으로,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이승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후세들이 대한민국의 건립을 행여나 연합국 승리의 결과로 인식할까 봐 헌법 전문에 그것을 밝히되, 대한민국은 1919년 ‘3.1혁명’의 결과로 이뤄졌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정부수립 직후 관보(官報)나 공식 문서에 대한민국이 건국 30년이 되었음을 밝힌 것도 그의 이같은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전통이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초대 대통령으로서 분명히 한 것으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나 이승만 추종자들이 눈을 씻고 봐야 할 대목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판단 위에서 분단정부를 택했지만, 대한민국의 정통을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 자리매김 시킨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를 ‘국부’로 떠받들려고 하는 이들조차 그의 이런 역사의식에는 눈감아버린다.

  이승만에 대한 이런 평가와는 달리 그에 대한 비판은 지뢰밭처럼 널려 있다. 그런 비판은 자연히 그를 국부로 추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우선 그의 독립운동이다. 그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하와이와 미주였는데 이는 그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외교노선으로 결정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외교노선은 많은 충돌을 일으켰다. 한길수와의 갈등은 미국정부의 임정 승인을 방해했다. 그가 미주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제치하의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그가 다른 나라의 ‘국부’처럼 그런 피나는 독립투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독립운동 기관인 임정으로부터 탄핵(파면)당했음을 검토하는 것은 괴롭다.

  정부수립 후 그는 반공방일(反共防日)을 국시처럼 내세웠지만 친일파 처리를 왜 그렇게 했으며,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 독도에 대한 대책을 왜 그렇게 허술하게 했는가는, 해방 후의 혼란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남북대결에서 국토방위에 대한 그 숱한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6.25는 그의 사전대처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보여주었고, 서울철수와 수복 후의 서울시민에 대한 처리과정, 보도연맹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무고한 생령 수십만이 죽음으로 몰린 것은,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여 대한민국을 보전했다는 그에 대한 칭송에도 불구하고, 국부라는 이름과는 쉽게 어울릴 수 없다. 그뿐인가, 그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국가로 터닦는 데 공헌했다고 강조되고 있지만, 불법적인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그리고 부정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던 것도 그였다. 이승만 국부론은 이런 지뢰밭을 헤쳐나가야만 가능하다.

국부라고 치켜세우려다 그의 치부만 더

  한상진 공동대표의 발언 장소가 4.19 민주묘역이었다는 것도, 의도적이라면, 그와 그의 동행자들의 몰역사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 장소가 어떤 곳인가, 이승만의 실정과 부정선거에 항의하다가 희생된 민주영령들이 누워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다니, 그것은 ‘중민이론’이나 ‘국민의당’ 당명에도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라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한국민주주의를 답답해하면서 반어적 수사(修辭)로 그런 표현을 했다고 선의적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승만 국부론’이 파생시킬 복잡미묘한 역효과까지 감안했어야 했다.

  ‘이승만 국부론’, 이념적인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서 오죽하면 사회통합이라는 관점을 내세워 그런 주장을 폈을까.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정식정부 초대 대통령이기도 해서 ‘국부론’이 뒷받침될 만한 분이다. 그렇지만 그의 역사적 행적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좀 더 냉정히 생각해 보자. 그는 임시정부에서 탄핵되었고, 정식정부에서도 12년간 장기집권 후에 4월 혁명으로 쫓겨났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를 국부로 추앙하고 싶어하는 국민의 자존감에 많은 상처를 안겨준다. 폐일언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승만을 그대로 쉬게 하라, 언젠가는 그의 공과를 감안하고 포폄이 정리되면 역사 앞에 그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현시점에서 그를 국부라고 치켜세우려다가 자칫 그의 치부를 더 건드리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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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 사학자(전 국사편찬위원장)

· 저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14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지식산업사, 2010
〈역사의 중심은 나다〉 현암사, 2007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푸른역사, 2007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넷, 2003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단채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 두레시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