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의 탄생 |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효녀의 이름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이들은 주로 위기에 처한 어버이를 구해내는 캐릭터다. 바다로 간 심청이나 남장(男裝)하여
전쟁터로 나간 목란(木蘭)을 보아도 그렇다. 그 외에도 시집가기를 포기하고 부모 봉양에 일생을 바친 딸, 어머니의 입맛을 대느라 엄동설한의
대밭으로 죽순을 찾아 나선 딸, 아버지를 덮치려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딸 등이 전통사회 효녀서사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그러고 보면 효녀란
자기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이름이다. 효의 우상화 그런데 내 부모를 내가 돌보는데, 동네에서 박수치고 나라에서 상을 주고 하는 것은 왜일까? 효성은 훌륭한 덕이지만 인정에
가깝지 않은 과도한 행위가 난무할 때는 의심해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후기의 다산 정약용은 “왜 ‘효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이 기필코 얼음
속의 잉어나 눈 속의 죽순만을 찾는단 말인가?”라며 우상화한 효행을 꼬집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진정한 효가 무엇인가를 묻고 실천하도록 돕기보다
효행의 깃발 아래 열을 세우는 따위의 일이 어디 그 시대만의 일이겠는가. 사라진 효녀들 부계의 존속을 중시하고 시집중심의 혼인문화가 확대되면서 효녀가 사라졌다. 유교적인 효 개념은 아들과 며느리 즉 효자와 효부를
위한 것이지 효녀를 원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효녀가 없을 수 없지만 효자와 효부와는 달리 효녀 지원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말이다. 돌아온 효녀 긴 잠을 자던 효녀가 깨어난 것은 19세기 말 근대적 가치가 유입되면서 부터이다. 개항기의 여성교훈서들은 기존에 없던 ‘효녀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효녀들을 불러 모았다. 여자수신서들은 제영·지은·목란 등의 역사 속 효녀들이 수행한 사회적 행위를 칭송하는데, 프랑스 여자 잔다르크도 ‘약안’이라는 이름의 효녀로 소환되었다. 근 5백 년 만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고려 지식인 이곡(李穀, 1298~1351)에 의하면 고려사회에서 부모 봉양은 딸의 몫이었다.
효녀를 권하는 사회는 봉양의 의무를 지울 만큼 딸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의무에는 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따른다고 볼 때
효녀의 등장은 딸의 지위가 변했다는 징표가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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