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춘향을 찾아 세계여행

우리둥지 2015. 9. 4. 13:30

춘향을 찾아 세계 여행을 떠나다
노 관 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춘향전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이다. 그런데 그 고전문학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춘향전을 춘향의 사랑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있다. 춘향전을 춘향의 투쟁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마음으로 춘향전을 읽는 것은 어떨까? 가령 관아를 부수고 사또를 축출한 민란의 시대에 춘향전의 의미는 시골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조선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는 개항의 시대에 춘향전의 의미는 외국인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개항기에 춘향전은 세계 각지에 퍼져나갔다. 춘향전 연구자들의 안내를 받아 오늘 춘향을 찾으러 세계 여행을 떠난다.

평민 춘향이 여장한 이 도령에 호감을 갖다

  일본 오사카. 그곳에 가서 1882년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계림정화 춘향전(鷄林情話 春香傳)’을 찾는다. 나카라이 도스이는 대마도에서 태어나 조선의 부산 왜관에 건너가 한국어를 배웠으며 조선이 개항한 후 주로 일본 신문사의 통신원으로 조선에 체류하면서 신문 기사를 기고했다. 그가 춘향전 앞에 ‘계림정화’라는 말을 붙였는데, ‘계림’이란 일본에서 조선을 부르던 고전적인 이름이고 ‘정화’란 사랑 이야기라는 뜻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의 연애물이 유행이었다. 그는 조선과 통상무역이 활발해지는 이 시기에 조선의 풍토와 인정을 잘 알 수 있는 책자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춘향전이 여기에 적합한 책이라고 연재 취지를 밝혔다. 그는 춘향전을 일본풍으로 각색했는데, 이를테면 춘향이 음력 5월 5일 단오 그네 뛰는 장면이 음력 3월 3일 삼짇날 곡수(曲水) 놀이하는 장면으로 바뀐 것은 일본에서는 단옷날이 남자의 명절이고 삼짇날이 여자의 명절이라서 그런 것 같다.

  대만 타이베이. 그 곳에 가서 1906년 리이타오(李逸濤)가 『한문대만일일신보(漢文臺灣日日新報)』에 연재한 ‘춘향전’을 찾는다. 리이타오는 당시 여성을 주제로 하는 많은 신문학 작품들을 신문 지면에 발표하고 있었는데 춘향전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는 서언에서 천지는 하나의 정연(情緣)이고 하루라도 정이 없으면 세도가 멸망할 것이라 하였고, 남녀의 정에서 우러나는 기특한 절개와 고상한 행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경판 춘향전을 저본으로 삼아 중국풍으로 각색했는데, 원본에 없는 남원 협객 이맹협(李孟俠)이 출현해 춘향을 탈옥시키는 장면처럼 파격적인 줄거리가 담겨 있었다.

  프랑스 파리. 그곳에 가서 1892년 프랑스 소설가 로니가 출간한 ‘향기로운 봄, 조선 소설(Printemps Parfumé, Roman Coréen)’을 찾는다. 그는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서 동양서를 분류하고 번역하던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했는데, 춘향전이 조선에서 반정부적인 비판을 담고 있어서 그 작자를 알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당시 기메 박물관에는 조선을 여행한 샤를 바라가 수집한 조선의 서적과 공예품이 다수 있었고, 그중에 춘향전 경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경판과 달리 프랑스어판 춘향전에서 춘향은 기생이 아닌 평민이고, 이 도령은 처음 여장을 하고 춘향을 만나 호감을 쌓다가 춘향의 집에서 비로소 남성임을 밝힌 후 결혼을 약속하고 사랑을 키웠다는 점이다.

1910년대, 자유는 가고 옥중만 남다

  이 도령이 여장을 하고 춘향을 만나 춘향의 호감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이 도령이 정체를 드러내 둘 사이에 사랑의 맹세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프랑스어판 춘향전의 커다란 특징이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가 1910년 베트남에서 티쏘가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편찬한 베트남어 교재에 수록된 ‘춘향낭자(Nang Xuan Houng)’에서도 보인다. 프랑스어판 춘향전이 베트남어판 춘향전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인 현상으로 해석된다. 또, 모나코에 있었던 몬테카를로 러시아발레단은 1936년 ‘사랑의 시련’을 공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얻었는데, 이 발레 작품의 부제가 ‘충양과 욕심에 찬 관리(Chung-Yang et le Mandarin Cupide)’인 것에서 보듯 춘향전, 아마도 프랑스어판 춘향전을 바탕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윽고 귀국. 이곳은 대한민국 서울이다. 이해조는 1912년 『매일신보』 1면에 두 달간 「獄中花」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연재했다. 나라 잃기 직전 ‘자유종’을 연재한 그가 나라 잃은 직후 ‘옥중화’를 연재하다니, 자유는 어디에 가고 옥중만 남았는가? 선교사 게일은 1917년 The Korean Magazine에 옥중화를 완역한 작품 Choonyang을 연재하였다.

  춘향전은 개항기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본, 대만, 프랑스의 서로 다른 춘향전은 한국 고전문학 춘향전의 새로운 확장이다. 춘향전은 조선 시대의 춘향전에서 정지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춘향전으로, 세계의 춘향전으로 끊임없이 운동 중이다. 지금 춘향전이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 글쓴이의 다른 글보기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논서
〈고전통변〉김영사, 2014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한국실학연구 제25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