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스크랩] 아막산성(모산성)

우리둥지 2015. 2. 2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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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막성(모산성)........                    

 
 
                                                                                                           



아막산성(모산성)




밤사이 저 멀리 높은 산에는 하얀눈이 쌓였다.
설날인 오늘은 봄날의 화창함에 태양빛이 따갑게 여겨진다. 투터운 외투마저 벗어던지고 산길을 오른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오면서 아이들과 함께 아막산성을 올라간다.
지난 11월에 다녀왔는데, 하얗게 쌓인 눈엔 짐승발자국외엔 사람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찾는이들이 드물었던 것 같다....


↑산위로 어느정도 오르자 쌓인 눈이 발목까지 빠진다.




봄볕이 유난이 따스한데, 어느정도 산위를 오르자 쌓여진 눈에 발목이상까지 빠진다.

 
아막산성은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영토다툼이 되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문화적으로 국력적으로 열세였으며. 특히 왜는 백제 권의 영향으로 신라 지역에서의 노략질이 더욱 잦았음을 예상 해볼수 있다.

아막성은 신라와 백제의 근접지역으로 전장이 치열할 수밖에 없으며, 지형적으로도 백제는 신라 침범의 교두보가 되는 곳이 아막성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에서는 아막성이 지형상 신라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요새가 되는 곳으로 상호 중요시 여겼음을 알수있다.



 

아막성은 1500여년전의 고산성으로서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무너져 수북이 쌓여 있으며, 산 중턱에는 4~5m 높이의 돌기둥처럼 생긴 돌탑 2기가 서 있었으나 현재는 한기는 거의 무너진 상태다. 금방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유구한 세월 넘어가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이 돌탑은 성 돌로 쌓은 데다 덩굴들이 탑을 감고 있어 오랜세월이 지냈음을 알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돌탑은 아영이 고향인 박철수씨가 1967년 스무 살 새내기 때 아래 문성암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쌓은 거라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새로운 대학생활과 삶의 꿈을 하나씩 돌덩이 싣고 쌓고 또 쌓았다 한다.

혼자서 맨손으로 손가락 하나 다친 적 없이, 위단을 쌓기 위해 계단을 만들어 올리었다고 하는데, 큼직한 돌들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하나를 쌓고 나니 요령이 생겨 두 번째 탑은 처음보다 더 멋지게 공을 들여 쌓았다고 전한다. 

얼마 전 삼국의 영토분쟁사를 TV 사극에서 백제와 신라의 모산성(아막성)에 대한 얘기에 눈이 갔다.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아막산성을 포위하니 신라왕 진평은 정예 기병을 보내 막아 싸웠다는 대목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평지로 끌어내기 위해 패한 척 도주하여 매복했는데, 신라 장수 무은이 이긴 기세를 타 군사 1천으로 추격하다 매복 부대에 덜미를 잡혀 장수는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동요한다. 이에 무은의 아들 귀산이 나서 부장 추상과 함께 싸우다 장렬히 산화했다. 이렇게 젊은 화랑 귀산과 추상이 전사한 곳이 바로 아막산성 이다.


↑아영에사는 박철수라는 새내기 대학생이 쌓았다는 돌탑



젊은 박철수는 이 두 젊은 화랑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돌탑을 쌓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칫 돌덩이만 구르는 황량한 옛 성터로 남아있을 터인데 그래도 돌탑 덕분에 천오백년 비밀을 간직한 무형의 공간언어로 긴장감이 감도는 역사의 한 장면을 생각케한다.


지금은 탑하나는 무너져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602년 백제와 신라의 아막산성 전투에서 산화한 두 젊은 신라장수 귀산과 추상의 임전무퇴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영 사는 스무 살 박철수가 1967년 아막산성 양지바른 곳에 두 탑을 쌓았다.’는 탑 이야기가 살이 붙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탑으로 인해 전설이 만들어지고 구전되어 누군가에 의해서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고, 그러다 보면 역사의 명소가 되고 관광객도 늘어나지 않을까 한다.

아막산성은 남원 아영면 성리에서 한 시간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아막산성 곁 우리 키 정도의 둥그런 탑은 옛 문성암 터에 쌓은 것이고, 그 아래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두 탑이 보인다. 지금의 문성암은 성지 일부를 복원하면서 더 아래로 옮겨졌다. 아영은 지리산 줄기에 소쿠리처럼 파고 앉은 흥부의 발복지(發福地)로 유명하다. 옛 가야의 고분군락과 고인마을의 고인돌이 곳곳에 산재하여 선사시대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주위에는 변강쇠전의 이야기인 산내면과 이성계장군이 아지발도를 잡은 황산전투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또한 英과 莫은 글씨를 흘겨쓰면 혼돈하기 쉬워 아영(阿英)이란 지명도 아막(阿莫)성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아막성은 역사속에서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으로서 또한 젊은 장수들의 충성심과 애환이 함께한 지역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곳이지만, 겨우내 짐승의 발자국만이 남겨져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이 한겨울을 쓸쓸히 보낸 듯하다.

 

출처 : 남원사이버홍보단
글쓴이 : 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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