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옥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1. 추적의 동기
2013년 9월 25일 구 남원역 구내 여객홈에서 제10회 『만인의사 추모 및 만인정신 계승 범 시민대회』가 열렸었다. 이때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제8회 방아치전투전라좌도 농민군제향 『2013 남원동학 농민혁명시민문화제』의 자료집은 출간에 들어가 있었고, 만인의총 본무덤 남원성 북문 복원과 구/남원역의 민족교육 평화공원 조성을 위하여 『구 남원역 퍼즐맞추기』는 출간이 늦어져 당 행사에 보급 활용 할 수 없는 단계여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필자는 아무런 자료도 갖추지 못하고 맨손을 짧은 강연을 해야 했는데, 왜 일제는 세계에서도 가장 불합리한 이 자리에 남원역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의 치명적 타격으로 결국 정유재란을 일으켜 놓고도 결과적으로 패전한데 대한 일본의 보복이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이 행사를 계기로 구 남원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최초로(적어도 필자가 알기로는) ‘만인의총 본무덤은 지금의 본부덤자리가 아니라 남원역 구내에 있었던 것을 일제가 역을 만들면서 본무덤 자리로 옮긴것이라는 말이 전하고 있으니 이것도 조사해 확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정석 83세 전, 행정공무원, 향교동 거주)는 말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제언이 황당하다고 느껴져 무시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중 친구 신영주선생(72세 전 교육공무원 전주시 거주)을 만나 이 얘기가 나왔는데, 그게 맞다는 것이었다. 20대때 대학을 다닐 땐데, 어느 자리에서 ‘만인의총 자리는 무덤자리일 수 없다. 어떻게 묘를 논 가운데 물구덩이에 만들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분이 아니다, 본래는 역에 무덤이 있었는데, 일제가 역을 만들면서 그 물구덕으로 묘를 옮겨서 그렇다고 한 말을 분명히 들었고,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나 어떤 자리에서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기억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신선생은 부친이 역무에 종사하시어 남원역 관사에서 태어나 40대에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그 관사에서 살았던 사람이어서 남원역과 만인의총 본무덤 자리가 놀이터 였으며 생활공간이었던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까지 추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과제를 안게되었으나 정말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1년 4월에 전주. 남원간 전라선 공사는 착공되었고 1935년 10월에 개통했으니 이 기간에 태어나신분의 연세는 80대이다. 생존자 중 이때의 상황을 아는 분은 있을 수 없고 전해들은 분들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어데서 그런분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래서 10월 26일 ‘남원동학농민혁명 시민문화제’때 남원평생학습센터 제1강의실에서 2000년대 초기에 남원경실련에서 만들었던 민족교육의 현장 「구, 남원역」이라는 30분짜리 CD를 상영하고 이 자리에서 만인의총 본무덤의 이전 건을 거론했다. 주변분들에게 알아봐 달라 했고 전해들은 말이 있으면 꼭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제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2. 토지대장과 등기부 그리고 면담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팀의 강경식 회장(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이 전공을 살려 만인의총 주변의 위성사진과 지적도, 토지대장과 법원발행 등기부를 입수해 왔다.
토지대장에 만인의총 본무덤은 동충동 420번지로 되어있고 소유권은 충렬사(忠烈祠): 동충동 362 번지)로 되어 있으며 1945. 9. 28로 되어 있었다. 분묘지로 된 면적은 27평이었으며, 大正4년 1월 22일(1915년) 査定(사정)으로 기록돼있었다. 이것이 소화 19년 (1944년) 8월 15일자로 소유자가 재단법인 제국재향군인회 남원분회 유지재단으로 소유자가 바뀌었고 소화 20년 (1945년) 9월 28일자로 소유자가 다시 충렬사로 다시 되돌아가 있었다.
폐쇄된 부동산 등기부에도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소유주가 ‘충렬사 종중’으로 된것만 달랐다. 분명해진 것은 전라선 남원.전주간 공사가 시작되기 17년 이전에도 만인의총 본 무덤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1915년에 일제는 아직 전라선 건설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래전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는 충렬사가 관리하던 묘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만인의총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묘가 하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며 (말무덤 얘기도 있으니) 역 구내에 있었던 무덤을 일제가 남원역을 만들며 동충리 420번지 분묘로 합장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는 고로들을 찾아 면담을 해보기로하고 역시 강회장이 주선했다. 11월 중순 정현갑(80세, 충렬사 거주) 어르신을 만났다. 이분은 만인의총 본무덤을 확장 복원할 때 흙이 없어 증기기관차 석탄재를 가지고 땅을 높이며 복토를 했다는 것과 남원역 여객홈의 축대를 만든 돌들이 모두 성돌이라고 증언해주셨고(확인결과 돌의 규격과 색깔 및 크기가 성돌과 일치했음, 그 위를 시멘트로 덮어 주의하며 보지 않으면 확인 할 수 없게 되었음), 성의 폭은 36자라는 것까지 확인해 주셨다. 어르신은 남원성 북벽을 헐어낸 위를 시(당시에는 군)에서 불하 받아 그 성위에 집을 짓고 지금도 살고 계셔서 정확한 성의 폭을 알고 계신 것이다. 강회장의 안내로 우리는 북쪽 성벽의 뒤로 돌아가 봤는데 성의 기반돌이 거의 드러나 있었으며 마면에는 또 독립된 가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의 기반돌이 드러나게 된 것은 그 아래 호를 메울 때 파냈기 때문임이 분명한데 돌들의 크기가 엄청나게 컸고 땅에 묻혀있었던 부분 이어서 원래의 돌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할 짓이 따로있지 성을 팔아서 살림을 한 지방행정도 있었구나.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묘의 이장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없다 하셨다.
다음에 강계원(77세, 동충동 거주) 어르신을 만났는데, 이 분은 만인의총 본 무덤 서쪽 논(지금은 밭)의 소유자 였고 본 무덤을 확장할 때 논의 일부를 매매 한 분이기도 했다. 이분은 어렸을 때 초라한 봉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고 내리면서 놀았던 분으로 현재의 집현전 근방에 말무덤이라 했던 돌과 흙으로 함께 쌓아올린 무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묘자리가 옛날에는 작은 방죽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빠져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남원성 전투때 우왕좌왕 몰리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본다 하셨다. 이분이 얘기한 것들 중 말무덤과 방죽 얘기를 다양하게 추측, 추정해 볼수 있게 하기도 하고 어쩌면 황당하기도 한 그런 것들이었다. 역시 묘의 이장 혹은 이전 문제에 대한 얘기는 못들었다 하셨다.
그리고 처음 만인의총 본 무덤의 이장설을 제언했던 이정석 어르신을 만났다. 그러나 묘 이장 얘기를 들었다는 외의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고 정조 때에 이르러서야 북문 근방에 만인의총을 조성했다고 알고 있으며 일제가 토지 측량을 시작한 것은 1914년이었으니까 토지대장에 나타난 1915년은 굉장히 빠른 시기에 측량을 마친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이 면담이 있기 전에 필자는 거리에서 김판주(79세, 죽항동 거주) 어르신을 만나 이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냐고 물었는데 묘 이전에 관한 것은 처음 듣는 다면서 현재의 만인의총으로 이장할 때 본무덤을 파묘하는 현장에 있었다면서 굴삭기로 무덤을 파는데 계속해서 석탄똥(증기기관차가 사용한 연탄재를 그렇게 불렀다 했다) 만 계속 나와 애를 먹고 있었다 했고 ‘아무것도 안 나왔지 아마?’하셨다. 이후 관심있는 분들은 본무덤 파묘 때 유골이나 유품중 어느 한 가지도 찾아내지 못했고 돌맹이 큰 것 하나 나왔다는 분이 있었으나 결과가 허망했던 것은 분명하다.
3 지금까지의 검토 분석
유골, 유물의 유무를 불문하고 1915년 이전부터 만인의총 본 무덤자리에는 이미 무덤이 있었다는 것이며 처음 법적인 기록으로 소유주가 충렬사 였음도 확실하여 그 무덤은 만인의총 본무덤이라는 것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집현전 근방에 말무덤이라고 하는 무덤이 있었다는 것은 문제였다. 봉분이 큰 무덤을 말무덤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람이 묻힌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 남원역 일대에서만 줄잡아 5천여명이 순국했을 것을 상정하고 왜군도 어딘가에 시체를 묻고 갔을 것을 예상한다면 말무덤은 사람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일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면 역구내에 또 다른 무덤이 있었고 이무덤을 일제가 역을 조성하면서 만인의총 본 무덤자리로 합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 것인가의 과제는 해소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 문제와 상관없이 얻은 수확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북쪽 성벽의 돌을 끌어다가 여객홈을 만드는데 써먹었다는 것이 실증되었고 그럼 그 외의 성돌은 어데로 갔을까? 역구내의 지대가 낮았음은 분명한데 그 낮은 지대를 높이는데 성돌을 넣어 다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는 동충동과 충렬사의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또하나 남원성 북벽은 남은 부분(복원 아닌 복원을 했다고 하는 부분) 외에도 북 성벽의 기반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이 적어도 복원해논 성벽길이 못지않게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남원성 북성벽을 복원 한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북벽의 성벽폭이 36자라는 것도 실증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일제는 왜 1944년 8월 15일 ‘제국재향군인회 남원분회’로 충렬사의 분묘지를 이전해 갔을까? 정식 매매에 의한 것인지 탈취한 것인지 밝힐 수는 없으나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려 분묘지를 이전하지는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기회를 보아 어떤 명분을 세워 폐허화된 묘지를 깨끗이 없애버리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이 다음 해에 해방이 되어 묘지가 살아남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음흉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다음은 석탄똥이라고 하는 석탄재다. 남원역은 전라선 기점인 익산에서 종착역인 여수역의 중간지점이어서 재를 치우고 석탄을 실으며 물을 공급 받아야 했던 중요 역이었다. 그런데 역의 부지가 동북쪽(향교동 5거리쪽)은 부지가 넓고 큰데 비하여 서남쪽(서문 오거리쪽)은 비좁다 긴 이등변 삼각형이다. 그렇다면 물을 공급받고 석탄을 실으며 재를 배출하는 곳이 동북쪽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물을 공급하는 곳은 동북쪽이면서 석탄재를 버리는 곳은 만인의충 본무덤의 가장 가까운 쪽이었다.
박영철(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 공동대표;74세, 동충동 거주) 대표에 의하면 일제는 의도적으로 기관차 석탄재를 만인의총쪽에 퍼 버리도록 했을 것이며 어렸을 때 보면은 눈애피 오른다는 뱅이를 그쪽에 해두어 계획적으로 만인의총을 보지 못하게 경계하였다고 했다. 이것이 단순한 낭설이며 미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제가 1944년 제국재향군인회로 분묘지를 옮겨간 것과 연결시켜 보면 그 진의는 들어 나게 된다. 풍수에 관심이 없는 필자도 분묘 조성이나 주변 흙에는 관심이 간다. 그런데 ‘파도 파도 석탄재여서 ’라고 할만큼 무덤 혹은 그 주변은 흙이 아닌 재로 채워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흙은 파올 형편이 되지 못하니 가까이 있는 연탄재를 쓴 것을 탓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풍속을 연구하면서 까지 익히 잘알고 있었던 일제의 의도가 손에 잡히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분석을 해보면서 의도적으로 일제의 만행이나 음모에 초점을 몰아 붙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면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다. 이 추적 자체가 일제의 남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성하면서 살펴봐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틀리지 않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정이면서 오히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또 다른 방향으로의 추적,『남원지』1949년 판을 중심으로...
구전을 통한 자료수집에 한계를 느낀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재 시도를 시작하기 로 했다. 하나는 토지 대장, 등기부 기록 등을 더 추적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1915년 기록이 보존 돼 있는 이상 남원역 구내의 모든 번지에 대한 법적기록을 뽑아 확인해 본다는 것이었는데 성안이나 북문터 밖 인근에 분묘가 있다면 이는 합장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로 귀착될 수 있었다. 성내에는 묘를 쓸수 없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문헌기록을 추적하는 방향이었다. 성과물은 문헌추적에서 먼저 나왔다. 먼저 『용성지(龍城誌)』(1995. 12. 31 발행, 남원문화원) 번역본을 보았다. 《성곽(城郭)》난의 읍성(邑城) 항목에 “정유년 성이 함락” 에 남원성 전투상황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었으나(번역은 뒷부분을 생략했음) 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사묘(社廟)》난의 충렬사 (忠烈祠) 항목을 살펴봤으나 역시 묘에 관한 내용은 없었고 ‘봄가을 제사때의 축문...’의 기록이 있어 연2회 제향을 모셔 내려온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영조 28년 (1752년)까지는 7충신을 모시고 충렬사에서 제향을 모셨으나 묘에서인지 사당에서는 알기가 어려운 상태였고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장황할 것 같아 생략한다.
다음에 접한 기록물은
『남원지(南原誌)』인데 단기 4282년(1949년) 11월 10일 발행된 이 최초의 남원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머리말을 남원공립국민학교장 이기홍(李起弘)이 쓴 최초의 한글본 『 남원지 』는 ‘조성교(趙成敎)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선생님들의 피의 결정이라는 것을 동지들 만이라도 다시 한번 상기하고 또 감히 여러분 앞에 삼가히 알리고자 ....’라는 대목이 있다. 곧 이 한글본 최초의 남원지는 당시남원초등학교 교장과 교사들이 만들어낸 사료다. 그리고 집필자는 조성교 선생이 분명한데 조선생은 11월 10일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국한문 혼용본 『南原誌』를 발간할 때 1949년 남원지를 초간본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청이나 읍사무소에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일을 초등학교에서 해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책을 김학승 선생께 받았는데 이사를 가면서 내게 필요할 것 같아 주고 간다며 전해 주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감사드린다.
이 남원지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들어 있다. 제12장 전란사의 2, 남원성은 왜 함락 하였나? 의 난에는 용성지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제15장 명승고적난 10, 충렬사(忠烈祠) 항목에서는 1. 유래(由來)에 이어 2 연혁(沿革) 난의 가,의총(義塚)을 물음에서 ...이에 우리의 장병들이 시체를 걷우어 한곳에 묻으니 이른바 의총(義塚)이란 것이며 또 만인총(萬人塚)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팔충신묘(八忠臣墓)“ 라고 하는 것은 즉 이것을 가르킨 말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1940년대에는 만인의총의 명칭을 팔충신묘라 했고 일명 의총, 혹은 만인총이라 했음을 밝히고 있어 이때 까지도 만이의총이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고 있었음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그러나 197 년도 판 남원지에서는 만인의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라. 충렬사를 옮기다 에서는
...처음에는 객관(客館)-휼민관 즉 용성관을 말함-의 동편에 이룩하고 연년이 차례를 모셔 오다가 숙종원년 을묘해-단기 4008년 서기 1675년 -에는 지금 있는 곳에 옮겨 세웠으니 그 까닭은 대개 이러 함이었다. 첫째에 시내가 점점 복잡하여지기 때문이었으니 사우는 모름지기 민가와 조금 떨어 고요히 자리를 잡아야 할 것, 둘째는 의총(義塚) 즉 “八忠臣墓”가 그곳에 있은 즉 그들을 사주(祠主)로 받든 “忠烈祠” 도 마땅히 그 옆으로 위치함이 옳다는 것 , 셋째에 교통의 불편이 심하였음이니 객관에 가 있게 되면 “八忠臣墓”와 거리가 멀기 까닭에 그곳 제장(祭場)까지 석채(釋菜)를 운반하고 왕래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이 심하므로 가깝게 시우를 세우자는 것 따위였다. 이러한 이유 밑에 “충렬묘”로부터 서북으로 약 200미터의 곳에 아담하고 단정한 사우를 지어 옮겨 모시게 되었으니...... 이 일을 발기한 분은 때의 전라도 관찰사 였던 이동직(李東稷)이란 분이었는데, 씨는 먼저 남원부사 한성보(韓聖補)와 꾀하고 순창군수 송시걸(宋時傑) 등과...... 오늘에는 버젓한 마을을 이루었으니 어느덧 그 마을의 이름조차 충렬사로 불려지게 되어 시방 충렬사라하면 오히려 마을의 이름인양 오해되고.... 東忠里 란 이명도 실은 “충렬사”로 말미 받아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원성의 동편 충렬묘의 있는 마을이란 정도의 뜻인양 싶다.
우리가 추적하고자 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에 가까운 내용이 위 인용문에 거의 다 들어 있다. 조성교선생의 생몰연대는 지금 모르는 상태지만 당시 교장이었던 이기홍선생은 1910년을 전후해서 태어나신 분이다. 그러니까 이기홍 교장선생이 20대일 때 일제는 남원역을 만들었고 그때 역구내에 어떤 묘가 있어 의총에 합장했다면 그것을 모를 이가 없으며, 『남원지』를 집필하고 있을 당시 그 얘기가 나오지 않을 이가 없다. 그렇다면 남원역 구내에 정유년 남원성 전투시의 순절자 무덤은 없었다 단언해도 된다. 대신 충렬사(용성관 동편의 사영루 자리로 추정되고 있음) 이전을 묘의 이장으로 착오를 일의켰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수 있고 이정석 어르신이 얘기한 정조 때는 숙종의 착오였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위 예문의 ‘충렬묘’는 만인의총 본무덤의 다른 이름인 이상 ‘충렬묘로부터 서북으로 약 200미터인 곳’은 동충리 362번지 충렬사로 현 만인의총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유지된 마을 이름을 충렬사로 만든 그 충렬사(현재 복원한 성벽 밑에 있었음)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아직은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좀더 문헌자료를 더 추적해 보기로 했다.
5. ‘만인의총’ 명칭과 『남원향교지』
가. 명칭과 향사(享祀)
우리가 『남원지』(공립남원초등학교 발행)의 기록에서 가장 놀란 것은 발행당시인 1949년 당시까지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는 명칭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명칭이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지기 시작하였는가를 알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만인의총 본무덤에 대한 비밀이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앞서기도 했다.
우리는 이 추적을 시작하면서 ‘충렬사(당)’은 제외시키고 있었다. 7충신 봉안에서 시작하여 20위까지 봉안하고 추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는 부당하다고 결론짓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싸우다 함께 죽은 영령들이 벼슬아치라고 추앙받고 무명인이라 하여 귀신 취급도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만인의총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지 충렬사의 역사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의총에 관계되는 자료는 모두충렬사와 연계돼 있어 『남원향교지(南原鄕校誌)』(단기4328년(1995) 2월출간)를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제4장 충렬사와 만인의총이란 항목(p, 853)이 설정돼있고 ‘만인의총 비문’(P,940)항목도 등재되어 있었다. 책의 발간은 1995년 이지만 비문은 1964년 5월 이었다. 『남원지』(남원국민학교판)가 발간된지 15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우리가 찾아낸 ‘만인의총’의 공식적인 기록 연도 최초의 것이었다. 이 비문은 ‘이에 뒷사람들이 그 유해를 거두어 한무덤을 짓고 이를 만인의총이라 이름하다. 단기 4297년 (서기 1954년)5월 이곳 ‘정지(淨地)’를 모시다?‘ 로 끝난다. 이 정지는 ’군북(郡北) 향교의 왕봉산(王蜂山)아래 높고 깨끗한 곳에 사우(祠宇)를 이건하고 의총(義塚)을 사우의 동편에 옮겨 대총(大塚)을 지었다.‘ 고 밝히고 있는 현재의 만인의총자리이다. 단기 4299년(1966년) 병오 3월에 완산(完山) 이상의(李相儀)기(記)로 된 충렬사추배사실기(忠烈祠追配事實記) 비문의 끝부분이다.
1966년에도 ‘의총’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1964년에 의총을 왕봉산으로 옮기면서 ‘만인의총’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우리가 만인의총 본무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동충동 362번지의 충렬사에서 24위를 모시고 제향을 올렸던 무덤의 명칭은 ‘의총’이 일반적이었으며 일명 ‘8충신묘’나 ‘만인총’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향교동 왕봉산으로 이장하면서 즉 1964년부터 공식적으로 ‘만인의총’으로 명명했는데 아직도 의총이 혼용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8충신도 24충신도 아닌 1597년 정유년 남원성 전투시 순국하신 영령을 다함께 추모하여 제사를 모신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로써 유림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남원충렬사이건기실비」의 비문이 있는데, 〈광복 39년(1983년 7월 상순 윤정복> 여기에는 ‘..... 단기 4306년(1973년) 계축, 당국이 의총을 정화한다 하여 그전의 사우를 헐고 새로 사당을 지었는데 위패봉안에 있어 만인(萬人)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23현의 위패를 동서 양쪽으로 나누어 모셨기에 의례상 크게 불가함을 다투었다. ..’ 고 하였다. 결국 4214년(1981년) 선비들이 분연이 일어나 새 규모로 향교동에 이건하게 되었다. 24위에서 23현의 위패로 내려간 것은 구례현감 이원춘을 따라왔던 손공생을 제외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비하여 「충렬사 추배사실기」(이상의)에서는 「...수백년을 두고 하지못한 일을 지금에 와서 이루어 동시사절(同時死節)한 충령(忠靈)으로 하여금 일시(一室)에 함께 향사(享祀)케 하였으니 이에 가히 유감이 없는 지라....」 라 하고 있다.
나, 만인의총 본무덤 이외의 무덤이 있었는가?
아직도 우리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 될수는 없었다. 그런데 『남원향교지』 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이만기(李萬器) 선생이 순국 제 371주년 (1964년) 봄에 쓴 「충렬사와 만인의총이건사적비문(忠烈祠와 萬人義塚移建事蹟碑文)」은 대단히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사 (祠)의 동남방 30보허 쑥대 우거진 초원 속에 주인 없는 한 무덤이 있으니 이를 곧 만인의총이라 불러왔다. ....이 열남의녀(烈男義女)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무덤을 이룩한 것이 곧 이무덤인 것이다. 비록 시제상(時制上)사액(賜額)의 은전은 받지 못했으나 그 충과 열이야 어찌 20충(忠)에 비할 바이랴. 해방후 4년 기축(1949년)에 남원군 교육감 이기홍(李起弘)이 이 무덤을 개봉함과 동시 큰 상석과 아담한 장원(담장)까지 마련하고 사에 향사를 마친 사람들은......’
이라하고 1963년 겨울 유도회장 이상의(李相儀) 본사 장의 황용현(黃龍顯) 씨 등이 이전을 획책하여 군수 이화익(李華翼)씨의 결단으로 1964년 3월 14일 왕산남쪽으로 사우와 분묘를 동시 이건하였음을 밝혔다.
우리는 해방후 사우와 분묘를 옮기려 하셨고 그 일에 적극 참여하셨던 분들의 출생연도를 알아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1948년에 새운 「충렬사복구사적비명」을 쓰신 노병인(盧秉仁)선생은 1888년, 「충렬사추배사실기」를 쓰신 이상의(李相儀)선생은 1892년,「충렬사와 추배사실기」를 쓰신 이상의 선생은 1892년 충렬사와 만인의총이건사적비문을 쓰신 이만기 선생은 1912년, 이만기 선생이 향교전교 재임시 함께 이건을 주도하셨던 황룡현(黃龍顯) 선생은 1901년 생이었고 해방후 사우를 복설하고 첫 장의를 맡았던 진경하(晋慶夏) 선생은 1873년 생이셨다. 일제가 전라선 건설을 시작하고 개통한 (1931~1935)중간지점을 1933년으로 할 때 최 연장자인 진경하 선생은 60세, 노병하 선생은 45세 이상의 선생은 41세였고 최 연하인 이만기선생은 21세의 청년이었다. 한가지 일을 함께 해 나가면서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서로 상의하고 토론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전라선을 만들고 있을 당시 21세~ 60세에 분포해 있던 분들이 남원역 구내의 실상을 모르고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어떤 기록에도 역구내에 또 다른 분묘가 있었다는 것은 전무했고, 비문을 쓴 이만기 선생이 당시에는 20대 초반이었으나 해방당시에는 33세, 비문을 쓴 당시 1964년에는 52세 였는데 사실을 모르고 썼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결국 만인의총 본무덤은 의총이라 불리웠던 그 자리의 그 묘일 수밖에 없음이 밝혀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유해를 거두어 한 무덤을 이룩한 것이 곡 이 무덤이라는 말로 확정된다. 그런데 본무덤인 ‘의총’을 왜 ‘만인의총’이라 불러 왔다는 는 표현을 썼을까? 이는 묘의 명칭을 바꾸려는데 대한 저항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면 의총을 팔충신묘라 했다고도 했는데 그러한 반발에 못을 박기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유추가 틀리지 않으리라는 뒷받침은 그 충(忠)과 열(烈)이야 어찌 20충에 비할 바이랴’에 있다 하겠다.
다음은 1949년에 남원군 교육감 이기홍선생에 대한 문제다. 앞에서 보았듯이 49년에 이기홍 선생은 공립남원초등학교 교장이었다. 그러나 비를 세우던 1967년에는 남원군 교육감(지금의 교육장을 당시에는 교육감이라 했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대 49년 교장 당시 이기홍 선생은 『남원지』를 집필하고 있을 때 벌써의총을 개봉하고 상석을 놓았으며, 담장까지 마련했고 향사를 치루고 있었다. 남원지는 당년 11월 10일 출간되었으니 틀림없이 향사는 그 이전부터 모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충렬사를 복구하고 사적비를 세우고 있을 당시(1948년) 유림들이 신경쓰지 못했던 의총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자가 이런일을 해냈다는 것은 대단한 선각자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기홍 선생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만인의총 원 무덤과 본 무덤에 대한 추적은 끝이 났다. 결국 역구내에 원 무덤은 없었고 우리가 본 무덤이라 하는 무덤은 의총 만인총, 팔충신묘라고도 불렸던 동충동 420번지 분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지대장이나 등기부 열람 등을 접어버렸다. 그렇다고 허망하다거나 꼬막 껍데기에 비유되는 수확을 얻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필자는 잘못 추정하고 잘못 인식했던 많은 부분이 이번 기회에 시정되었고 각성하기도 했으며 선배 선현들에 감사드리며 노고에 무릎 꿇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
6. 분묘관리 왜 허술했나?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은 의총이라고 했던 만인의총의 본 무덤의 관리가 왜 그렇게 허술했었을까 하는 문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해방 전의 어떤 기록에도 의총이라는 분묘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충렬사라는 사우에 대해 기록한 것들이기 때문에 분묘에 관해서는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할지모르지만 바꾸어 보면 분묘없는 사우가 있을수 있을까? 그런데 분묘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가 찾아낼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1949년의 한글판 남원지 밖에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충렬사에 대한 역사를 약술하면 1597년 남원성 전투이후 광해 4년인 1612년(정유재란 15년후) 용성관 동편에 최초로 사우를 짓고 배향을 시작한다. 효종 4년인 1653년 충렬사라는 사액을 내려지고 숙종원년에는 (1675년) 동충동 362번지로 이건했고 고종5년인 1868년에서 고종 8년인 1871년 사이에 사우훼철령에 의해 철폐된다. 그러나 고종 16년인 1879년 충단(忠壇)이라고 하는 단을 세워 제향을 모시고 있었는데 1941년 일제는 충단이라는 단을 파괴했고 1943년 에는 묘(廟)를 파(破)했으며 비를 넘기고 자(字)를 멸(滅)했으며 제전(祭田: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산의 전답)과 제기(祭器)를 몰수해 갔다. 이를 항의하다 여러 사람이 구속되어 70여일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여기 까지가 해방 전까지의 충렬사에 대한 기록인데 이중 분묘에 대한 얘기는 단 한줄도 없다. 이는 향사(享祀)라고 하는 제례의식을 충렬사당에서 모셨고 사당이 철폐되자 충단이라 하는 단(壇)을 만들어 모셨다는 것이어서 이른바 묘제(墓祭)는 없었다는 것이다. 사우(사당)는 혼령을 모시고 제례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따라서 『남원지』에서 용성관 동편에 있던 사우를 의총의 북서쪽으로 이건한 이유중 석채(釋菜:제물)의 운반 이 어려워서 였다는 이유는 잘못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조용하면서 분묘와 가까운 곳으로 사우를 옮겼다는 내용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충렬사 사당과 가까이 있는 분묘 관리 역시 충렬사 종중에서 관리했을 것으로 보아 분묘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서원철폐령에 따라서 사우가 훼철된 때부터로 보아야 겠다. 서원 철폐령은 1868년에 내려졌으나 버티고 있다가 1871년에야 철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관리가 소홀해진 분묘는 일제 강점기에 임자 없는 무덤인 듯 버려졌고 일제의 눈에는 눈가의 종기같은 것이어서 이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제국재향군인회 소속으로 돌려버렸으며 그 수순으로 분묘자리에 쓰레기인 석탄재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 버림은 절대로 억측일 수가 없다. 분묘 관리의 소홀은 대원군의 사우철폐령으로 시작되었으나 일제를 거치면서 충렬사는 사당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잃고 특히 태평양전쟁말기에는 충렬사종중의 전답까지 몰수당하면서 제기까지 빼앗겨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니 완전하게 사당으로서는 기능은 종식되었다 하겠다. 이런 처지에 분묘를 돌본다는 것은 무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 해도 의총, 혹은 만인총, 팔충신묘라는 명칭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풀리지 않은 의문은 남아있다. 왜 의총은 물구덩이인 논 가운데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으며 왜 그런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을까? 이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상의 선생의 「충렬사추배사적기」에 ‘원래 사지(祠址)가 함습불결(陷濕不潔: 습기가 침범하고 깨끗지 못함) 함은 함성당시에 당황히 시설함이요’ 하였고 이만기 선생의 「충렬사만인의총이건사적비문」에서 ‘사우의 주위는 인가가 밀접하여 계견(鷄犬)이 상침한가 하면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도로조차 두절되고 각 지역에서 배출한 진애(塵埃:티끌, 쓰레기 )는 묘분까지 압축하여’ 왔기 때문에 왕봉산 아래로 이건한다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왜 군의 종군승이자 군의관이었던 경념(慶念)의 『조선일일기』 8월 17일에서 ‘성내사람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쳐 죽여서 생포할 놈은 한 사람도 없구나’ 하는 한탄과 왜적이 남원성에서 3일간을 머무르다 전주로 떠났던 사실, 그리고 당시의 기온이다. 남원성 전투는 추석을 전후해서 치러졌고, 이때 모든 성민이 순절하셨다. 아직 가을이라 하기에 이른 계절이어서 시신의 부패속도는 대단히 빨랐을 것으로 보아야 하며 단 한사람의 시신도 확인된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내로 들어 왔을 때는 이미 시신이 부패한 뒤였고, 부사, 전라병사, 접반사 등의 시신도 구분할 수 없었을 정도 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신이 일만구가 널려있을 수 있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 당시의 시신을 어떤 방법으로 어데에 어떻게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또 성을 찾아들어온 사람들도 소수에서 시작했을 것을 감안해 보라. 우리는 그냥 무심코 큰 구덩이를 파고 묻었을 것이어서 만인의총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1만여구(왜병사망자도 있을 것을 감안하여)의 부패한 시신을 묻을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옮겨 묻을 겨를 이 있었을까? 다시 상기해 봐야 할 것은 ‘둠벙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는 동충동 강계원 어르신의 말이 그냥 흘려 넘길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충동 충렬사 근방은 저지대여사 홍수의 피해를 지금도 많이 받고 있는 지역이다. 이중에서 가장 낮은 곳을 골랐었을 밖에 없었던 여건이라면 방죽 밖에 더 있을까?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다시 떠오르는 의심은 향교동으로 이장할 당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현장 목격자 김판주 어르신을 비론한 현존하는 분들의 이구동성이다. 굴삭기로는 아무리 파도 석탄똥 밖에 나오지 않아 당황해 하더라고 김판주 어르신은 말한다. 이는 주변을 복토해서 농경지(논)으로 만들어 저 아래 깊숙히 묻혔다는 반증이 아닐까? 물론 수백년 전의 시신이 흙으로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는 없다는 가정도 전제된다. 그러나 이빨하나, 장신구 한점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절망적으로 끔찍한 추정이지만 1만여 순국시신은 지금, 의총이라 했던 만인의총 본 무덤아래에 그 보다 훨씬 광범위한 자리에 진토가 되어 잠들어 계신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기까지 생각지 않고 본 무덤은 복원해야 한다고 했었다. 적어도 진토 몇 삽을 떠 옮겨 현재의 만인의총을 조성한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황당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만인의총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는 다한 상징적 무덤으로 하고 그 처절한 원혼의 육신들이 지금도 그대로 잠들어 있을 본 무덤은 반드시 복원되어 예를 갖추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한다.
7. 억측 속에는 민족혼이 들어 있다.
끝으로 우리가 어쩌면 무위로 돌아갔다 할 수 있는 만인의총 본 무덤의 이장설, 즉 남원역 구내에 있었던 무덤을 의총 즉 동충동 420번지 분묘자리로 이장했다는 말이 몇몇 사람에서 이지만 왜 나오게 되었을까를 되집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능성은 앞에서 충렬사 이건을 의총의 이장으로 착각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해 보았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악의적인 이야기가 나왔을까?
이는 일제에 대한 우리 고장과 우리 민족의 감정, 바꾸어 말하면 민족혼이 고스란히 배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학문도 학술도 연구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버리고 싶은 감정이며, 혼이다. 우리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서 이 추적을 시작했지만, 그 민족적 감정과 민족혼은 무시할 수가 없다. 얼마나 혹독한 핍박과 억압과 학대와 착취를 당했으면서 고통 받고 죽어갔으면 그런 억측이라도 자아내고 이를 갈면서 심리적 치유의 수단으로 했을 것인가? 그러나 한편에서는 또 다른 냉철한 지성들이 해방을 맞아 의총을 이건하고 팔충신으로 제한했던 숭모의 재향을 만인으로 모시면서 닭과 개들이 오물을 배설하는 자리에서 양지바른 좋은 자리를 잡아 모시는데 착안 하시고 감행하셨다.
특히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면서 남원을 바로 알고 그 정신을 세워 계승하고자 하셨던 이기홍, 조성교 선생을 비롯한 선생님들 향교에서 일하시면서 충렬을 받들고 정신계승에 노력하셨던 노장 진하경, 노병인 선생과 이상의, 황룡현, 이만기 선생을 비롯한 유림 제위께 감사드리며 이분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앞선 「통한의 남원성 북문, 구 남원역」 이란 글에서 남원역 건설을 막지 못했던 선배 선인들에 대한 원망스러운 투의 얘길 했었고 만인의총 본 무덤을 그렇게 버려두었던 선조들에게도 좋은 감정일수 없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엄흑한 시대에 그래도 만인정신을 지켜내려 혼신의 힘을 다하셨던 분들이 많으셨음을 이제야 깨닫고 죄송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삼가 명복을 빌면서 사죄의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용서해 주실 것을 간곡한 심정으로 빌며 이런 추적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면서 밝혀진 내용들을 어떻게 추스르고 발전시키면서 남원의 정신이며, 만인정신을 선양발전 계승할 것인가를 더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단계이면서 이 유적들을 어떻게 보전하여 민족정신으로 확장해 나가고 향토 자원화 하여 국민과 민족 모두에게 보탬이 되게 할수 있는 가를 치열하게 연구하고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원만이 아닌 민족 전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남원인 특히 정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과 후학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성원에 큰 기대를 건다.
충렬사와 만인의총(의총)의 연혁
o 1597년(선조 ) :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o 1612년(광해 4) : 용성관 동편 사우 짓고 제향.
o 1653년(효종 4) : 충렬사忠烈祠로 사액.
o 1675년(고종 1) : 의총義塚 북서쪽(동충동362)으로 이전.
o 1868년(고종 5) : 서원 훼철령.
o 1871년(고종 8) : 사우 훼철영으로 철.
o 1872년(고종 9) : 충렬단忠烈壇 사적비 세움.
o 1879년(고종16) : 단(충단忠壇)을 만들어 제향.
o 1941년 : 충렬단 깨트림.
o 1943년 : 임진,정유 유적 소말(消抹:단을 헐고 묘廟를 파破, 비를 넘겨 자字를 멸滅, 제전祭田, 제기祭器몰수, 항의자 70여일 수감)
o 1945년 : 해방.
o 1946년 : 충렬사우 복설.
o 1949년 2월 : 충렬사 복구 사적비 세움(비문 노병인盧秉仁)
o 1949년11월 : 한글본『남원지南原誌』출간
- 공립 남원초등학교 교장 이기홍李起弘, 집필 조성교趙成敎
o 1963년 : 만인의총 이건 계획.
- 전교 이만기李萬器, 유도회장 이상의李相儀, 장의 황룡현黃龍顯
o 1964년 3월14일 : 왕봉산 남쪽으로 사우 분묘 동시 이건.
o 1964년 5월 : 만인의총 비 건립.
o 1967년 봄 : 충렬사와 만인의총 이건 사적비 건립(비문: 이만기)
o 1973년 : 위패봉안으로 갈등.
o 1981년 : 충렬사, 향교동(현위치)으로 이건.
o 1983년 : 남원 충렬사 이건 기실비紀實碑 세움.
※ 유관인물 출생연도(앞:단기, 뒤:서기)
진경하晋慶夏 : 4206(1873), 노병인盧秉仁 : 4221(1888)
이상의李相儀 : 4225(1892), 황룡현黃龍顯 : 4234(1901)
이만기李萬器 : 4245(1912),
-- 2013. 12. 1(일) 한병옥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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