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스크랩] 호남3대석물을 찾아서....

우리둥지 2013. 6. 2. 19:55


남원문화대학에서는 답사활동을 통하여 호남3대석물로 알려진 윤효손선생, 최상중선생, 최시옹 선생의 묘동을 답사하였다.
 

 

○문효공 윤효손(文孝公 尹孝孫) 묘동


↑신도비 규모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윤효손 신도비
 (국가보물 584호) 전남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신도비
는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 <경국대전> <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을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이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세워진 비이다. 비문은 신용개가 짓고 신공제가 글씨를 썼는데 글씨는 고려시대에 비해 필력이 떨어진다.


-문효공 윤효손 묘전석등 및 석 비 (墓前石燈 石碑)
전남 유형문화재 제 37호 지정.
석등
은 받침돌 위에 불울 밝혀두는 화사석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전체가 4각을 이루고 있다. 화사석은 네 면마다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작은 창을 뚫어 놓았으며, 옛 가옥의 지붕을 본떤 듯한 지붕돌 위로는 정교하게 조각된 머리장식을 올려 놓았다. 비는 단을 높직하게 마련하여 거북받침을 올리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뒤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 하였다. 돌거북 아래의 높직한 단은 보기드문 모습이며, 용 대신 연잎을 조각해놓은 머릿돌도 특이하다. 비 앞면 위쪽에는 '부부합장지묘 夫婦合葬之墓' 라 새겨 놓았다.
 


문효공 윤효손의 화려한 묘이다. 상석 및 석비 그리고 석등 등 그 예술성이 뛰어난다.



▷문효공(文孝公) 윤효손(尹孝孫
)은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 끝까지 절의를 굽히지 않은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을 들 수 있는데 윤효손이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의 사위가 된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윤효손(尹孝孫)은 세종32(145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장흥부윤과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크게 치적을 올려 임금으로부터 비단옷 한벌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489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서적을 구입하여 임금께 바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그후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무오사화 때 파직당했다가 이듬해 우참찬을 거쳐 1503년 좌참찬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효(文孝) 시호를 내렸다. 구례 방산서원(方山書院)에서 제향하는데 그의 신도비는 보물 58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윤효손의 이야기..

윤효손의 아버지 윤처관이 의정부의 녹사란 낮은 벼슬에 있으면서 한번은 새벽 일찍 영의정 박원형의 집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문지기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며 대감에게 알려달라고 청해도 문지기는 아직 주무신다며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허탕을 치고 돌아온 윤처관이 어린 아들 효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는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나처럼 이런 수모를 당하지 말거라!” 이튿날 윤처관이 다시 박원형의 집을 찾아가 명함을 올렸는데 한참 후 안에서 들어오라는 명이 내렸다. 처관이 들어가자 박원형이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물었다.
“이 명함 뒤에 적힌 시는 누가 쓴 것인가?”  영문을 모르고 받아서 보니 아들놈 효손의 글씨가 분명한데 내용이 맹랑하였다.
相國酣眠日正高 재상께서 늦도록 단잠을 주무시어
門前刺紙已生毛 문 앞에 놓인 명함에 보푸라기가 일었네
夢中若見周公聖 꿈속에서 혹시 성인 주공을 뵙거든
須問當年吐握勞 그 당시 토악하던 수고로움을 물어보시오
시의 내용인즉, ‘재상 당신이 늦잠을 자 공무를 보러온 사람이 올린 명함 종이에 보푸라기가 일도록 공무를 못보고 돌아간다. 꿈길에 옛날 중국 주나라의 성인인 주공을 만나거든 그분이 정사를 볼 때 어떻게 했는가를 물어보시오.’하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토악(吐握)이란 말은 주공이 정사를 보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밥을 먹는 동안 세 번이나 입에 든 밥을 토하고, 한번 머리를 감는 동안 세 번이나 감던 머리털을 쥐어짜고 나와 즉시 만났다는 고시에서 나온 말이다.
“제 아들놈이 장난을 친 모양입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박원형이 얼굴을 펴며 말했다.
“그래? 그 아이를 내게 한번 데려와 보게………”
윤효손을 만나본 박원형이 그 영리함과 효성스러움에 감탄해 마침내 사위를 삼았다는 것이다. 박원형은 죽산박씨이다.
남원윤씨는 크게 함안공파, 전서공파, 문경공파, 현령공파로 나뉜다.


 

최상중선생의 문관석


남원시 사매면 계수리 (수동부락)에 자리한 최상중 선생의 묘역으로 묘비 및 상석
그리고 문관석 등 전체적인 규모가 웅장하다.

최상중(崔尙重)은1551(명종6)∼1604(선조37)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제(未能薺) 영의정 항(恒)의 6대손 어모장군(御侮將軍) 영(穎)의 아들 류희춘(柳希春)의 문인 1575(선조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600년 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602년(선조35) 사간(司諫)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이어 아들 연(衍)의 공으로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최시옹선생의 상석

 


↑전남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잔수에 자리한 최시홍 선생의 묘동, 커다란 규모의 상석으로 한덩어리인 원석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상다리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최시옹(崔是翁)은 1646년(인조 24)∼1730년(영조 6).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한신(漢臣), 호는 동강(東岡). 부는 최휘지(崔徽之)이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으로, 19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30세 이후로는 과거(科擧)나 영리(榮利)를 버리고 수행독학(修行篤學)하였는데, 이때부터 윤증과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694년(숙종 20)에 좌의정 박세채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 지평(持平)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로
《동강유고(東岡遺稿)》《동강가의(東岡家儀)》가 전한다.



↑최시옹 선생의 묘동은 규모나 짜임새가 웅장하고 조화롭다. 특히 상석과 묘비
그리고 문관석 등이 규모도 있으며, 조화를 잘 아루고 있다. 
 

출처 : 남원사이버홍보단
글쓴이 : 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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