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이야기♧

운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똑바로 알자 !

우리둥지 2011. 7. 14. 18:54

김동길 교수 “한사람이라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 정신 이어받기를"
인보길 대표 "반공은 반외세 반패권, 불굴의 리더십, 통일 앞두고 절실"

 

 부산에서는 건국대통령의 동상이 참혹한 페인트 테러를 당했다. 머리 정수리부분부터 무릎부위까지 붉은 페인트로 범벅이 된 건국 대통령의 동상은 우리시대 건국세대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20대 대학생들에게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인식돼 있을까? 대학생들은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이에 앞서 과연 우리 대학생들은 이승만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20대 대학생들이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다시 보기 위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자유통일 세대의 리더십>이란 주제로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와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은 7일 오후 2시 서울 중구구민회관에서 제1기 우남아카데미를 열었다(후원 조선일보, (사)대한민국사랑회, 도서출판 기파랑 / 협찬 현대자동차 그룹, 이승만소사이어티).

이날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전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첫 강의(주제 ‘이승만 다시 보기’)를 시작으로 운영에 들어간 제1기 우남아카데미는 7월 28일까지 모두 여섯차례의 이승만 관련 강의와 이화장 및 안보현장 견학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1기 우남아카데미는 참여 대학생들이 이승만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그의 공과를 논박하는 모의재판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한다. 강사진은 인대표를 비롯, 이주영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건국대 명예교수), 류석춘 교수(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장), 오영섭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김광동 박사(나라정책연구원장), 김효선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사무총장등이다. 이 날 행사에는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사단법인 대한민국사랑회 김길자 회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날 제1기 우남 아카데미에는 한국대학생포럼(회장 윤주진, 연세대 4년) 소속 회원들을 중심으로 모두 40여명의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인보길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평창 올림픽이 결정된 새 날에 우남아카데미를 시작해 감회가 새롭다"며 “수십년간 용평을 개발했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회장의 공로를 회고하고 "오늘의 대한민국 국력도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Nation Founding Fathers)이 자유국가를 세워준 덕분에 성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길 교수는 격려사에서 “여러분을 만난다는 기쁨에 장대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왔다”고 운을 뗐다. “스크랜튼 여사가 설립한 이화학당도 단 한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다”면서 첫 발을 내디딘 우남아카데미 출범의 의미를 강조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김 교수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면서 3.15부정선거는 분명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이것은 이 대통령을 보좌했던 자유당 정부 인사들의 과오이지 이 대통령이 직접 부정선거를 지시하거나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3.15선거가 끝나고 4.19의거가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부정선거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부정선거 사실을 알게 된 이 대통령은 격노하면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하야성명 발표 직후 처소를 이화장으로 옮기기 위해 길을 나선 이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길가에 나온 시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그를 떠나보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국민들이 이 대통령을 파렴치한 독재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국민들에게 ‘이승만’은 애증의 존재였던 셈이다. 

김 교수는 리비아의 카다피를 예를 들며 “권력에 집착하는 지도자는 결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대통령은 부정선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물러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3.15 부정선거를 앞장서 규탄했던 4.19세대들이 젊은 세대에게, 지금이야말로 이승만 대통령의 정신과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몰락과정과 ‘반미’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석이 이어졌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대통령이 다져놓은 민주적 역량은 군사정권에서 표출돼, 유신체제에 저항토록 했다면서, 이들이 바로 4.19세대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합당으로 보수반동세력으로 전락했고 바로 이때부터 반미친북세력이 민주화세력을 가장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가, ‘반미’는 진보인가?”라고 반문하며 “지금의 반미는 잘못한 것이 있어 이를 바로잡겠다는 측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북한 김정일 정권의 반미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반미감정’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질타했다.

김 교수는 “이 대통령은 불과 20대에 조선왕조의 개혁을 주장하다 옥고를 치른 사람”이라며 “개혁정신이 있는 사람은 수구세력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이 대통령과 같은 정신과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중에서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며 끝을 맺었다. 

 4.19세대가 들려주는 ‘이승만 이야기’

인보길 대표는 1960년 4월 19일 아침의 일화로  강의를 시작했다.

“4월 19일 아침 대학가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 전날 만든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시작했다. 동대문 경찰서앞에서 경찰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행진은 계속됐다. 종로를 거쳐 중앙청이 있는 광화문까지 진출해 電車(당시에는 서울시내에 전차가 다녔다)를 방패삼아 경찰과 대치했다. 이때 첫 발포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었다. 26일, 이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 뉴데일리 추진혁 기자

 

인보길 대표는 4.19 세대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정면으로 정권과 맞섰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승만의 리더십과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전파하려 한다. 3.15 부정선거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4선 도전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건국사와 호국사 전체를 4.19로 뒤덮어 독재자 이승만으로 매장해버린 현 한국사교과서와 학교교육은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하야하던 날 데모 학생 대표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다. 백성이 아니다.”

다음은 인 대표의 이날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의 對美 자주외교 /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이승만대통령에 대해 가장 널리 퍼진 이미지 중 하나가 ‘친미’와 ‘굴욕’이다. 사람들은 독재와 부정 못지않게 이 대통령을 친미주의자로 몰아붙인다. 미국의 꼭두각시였다는 비아냥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 잘못 알려진 오해도 없다.

1954년, 미국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이승만대통령은 방문 다음날 두 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1954년 워싱턴 백악관에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 및 손자손녀와 함께.
▲1954년 워싱턴 백악관에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 및 손자손녀와 함께.

 

정상회담 직전 미국측이 작성한 공동성명 초안을 본 이 대통령은 격노한다. 초안에는 “(한국은) 일본 정부와 우호관계를 회복하고...(중략)”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한다.

이를 본 이 대통령은 "이 자들이 나를 데려다놓고 덤터기를 씌운다"며 정성회담은 더할 필요도 없다고 거부했다. 양국의 보좌진들이 간신히 만류해 어렵사리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합석했다. 아이젠하워는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국제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반응은 추상같았다.
“공산주의는 내가 더 잘 안다. 당신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봤느냐”
이 대통령의 호통이 계속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때 이 대통령의 마지막 호통이 터졌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이승만도 일어섰고 회담은 깨졌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10억 달러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경제원조를 확보해서 귀국한다.

“이승만은 친미(親美)주의자라기 보다 지미(知美)였으며 용미(用美)였다.”
미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미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것이인대표의 평가다.
이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자주적 대미 외교를 펼쳤다. 

 이승만의 청년시대, 23때 수구내각 해산 요구하다 사형 선고

<이승만 리더십>의 첫번째 키워드는 '자주 독립과 통일'이다.
'反외세 독립'노선과 '민족통일' 노선은 이승만의 한결같은 국가 통치 철학이었다.
'독립과 통일'이란 근대국가 개념이 세계사적으로 확립된 것도 이승만이 태어나던 시기와 맞물린다.
나폴레옹의 '라틴 제국'이 불러온 민족의식과 국가독립 요구가 이탈리아를 통일 시키고 독일을 통일시켰다.
이때 일본 역시 '명치유신'으로 봉건사회를 청산하고 근대국가의 틀을 유럽에서 배워 강국으로 변신한다.

청일전쟁, 명성황후 암살, 아관파천...이승만이 20대 청년시대 몸으로 겪었던 한국 근대사의 암울했던 주요 사건들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이다. 몰락한 왕손 가문의 6대독자였던 그는 6살 때 천자문을, 7살때는 동몽선습을 뗐다. 4서3경 등 정통유학을 배우며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던 그는 13세 때부터 과거시험을 봤다.

그러나 부패한 조선사회에는 몰락한 양반 가문출신인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청일전쟁후 친일내각때 과거시험이 폐지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황하던 그는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이유는 소박하고 단순했다. '영어나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그는 하루가 다르게 신학문에 눈을 떠갔다. 미국과 프랑스의 독립정신을 배우고 ‘국가’와 ‘인권’ 등의 서구적 가치를 접하면서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민비 살해의 복수음모도 실패로 돌아가고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품에 안은 러시아는 국토 빼앗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승만은 신문을 3개나 만들면서 러시아와 왕실을 규탄하고 투쟁했다. 압록강의 용암포를 '니콜라이 항구'로 차지한 러시아는 부산 영도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이런 비밀거래 문서를 입수해 신문에 폭로하고 저지운동을 계속한 결과, 러시아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부정부패에 찌든 왕정을 개혁하자는 요구를 계속했다.
배재학당에서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협회 회원을 모아 덕수궁앞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간다. 오늘날의 현대식 데모의 시초이다.

몇주일씩 철야농성 데모에 드디어 ‘입헌군주제’라는 결실을 맺는다. 고종황제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추원(오늘날의 국회) 의관(국회의원)이 된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의 거침없는 개혁적 성향은 여기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 그는 중추원에 들어가자마자 수구내각의 해산을 요구했다. 개혁내각 구성과 당시 일본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총리에 앉힐 것을 요구했다. 수구파는 경악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조선왕조를 무너트리려는 대역죄인으로 몰아세워 중추원을 해산하고 투옥시킨다. 

사형 선고가 종신형으로 감형돼 5년 7개월이란 세월동안 옥고를 치르고 1904년 29세때 출소한다.

 

그가 출소하게 된 이유는 극적이다. 일본의 야욕이 본격화되던 시기, 당시 정부는 미국의 보호와 지원이 절실했다. 미국에 한국의 뜻을 전달할만한 적임자가 필요했다. 당시 이 나라에는 이승만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한국인이 없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입학 6개월만에 초급영어교사 자격을 갖출 만큼 뛰어난 어학능력을 보여줬다. 옥중에서 영어사전까지 만들 정도였다.

이승만의 옥중생활 막바지, 러일전쟁이 터지자 부랴부랴 저술한 책이 ‘독립정신’이다.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유민권 독립국가를 만들자는 '백성 계몽 지침서'로 쓰여진 국민 교과서다.

특히 '독립정신 6대 강령'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한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철학 그 자체다.
1.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된다.
2.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자
3. 외교를 잘해야 한다.
4.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외국 국적을 갖지 마라
5.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라,
6. 자유를 소중히 여겨라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의 밀사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미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미국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나부터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한 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는다. 동양사상에 정통하면서도 미국 동부 아비리그의 명문 대학에서 서양사상을 마스터한 것이다. 동-서양의 정치철학 국제법에 통달한 그는 미국 지도층과 소통하는 '글로벌 리더십'을 완벽하게 갖춘 지도자로 변신한 것이다. 

 이승만 리더십 / "소련이 세계의 종주국이란 말이냐”

이승만은 왜 반공주의자가 되었을까.
하와이 망명시절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공산혁명이 일어난다.
이 때 이승만은 본인이 발행하던 신문에 ‘공산당의 당(當) 부당(不當)’을 규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무산계급의 평등은 나도 전적으로 찬동한다. 그러나 자산계급을 없앤다면 물질의 창조와 문명의 진보는 누가 해나갈 것이냐. 경쟁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창조정신의 싹이 없어질 터.....국제 공산주의를 퍼뜨려 이를 따라야 한다니 소련이 만국의 종주국이란 말인가....또한 국가를 소멸시킨단 말은 우리 한민족에겐 당치도 않은 일이다. 우리가 독립국가를 세워서 부강해지고 나서야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구한말 아관파천을 악용해 대한제국의 이권을 침탈하던 러시아는 이승만에게 있어 반드시 몰아내야 할 외세였고 침략세력이다. 그가 공산주의 반대를 외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명백한 또 하나의 식민주의였기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국제공산주의의 패권 침략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경고하는 논문이었다.

해방 후 그가 좌우합작을 거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당시 공산세력의 흉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미국은 소련과 손을 잡고 그에게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소련의 위성국 전략이 실패한 유일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이승만이 고군분투한 세계사의 신기록이다.

6.25 휴전을 결사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외세 자주독립을 필생의 염원으로 삼은 그에게 또다시 분단상태의 휴전이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강대국들의 패권이었다. 그에게 삼팔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다.
"한반도에 중국과 소련군이 한명이라도 있는한 휴전할 수 없다. 단독 북진하겠다. 우리에게 휴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이승만의 결의를 끝내 꺾어버린 것은 영국이었다. 트루만에게 매달려 원상유지 휴전을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반 외세, 반공, 반일 기조는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해인 49년 1월 신년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때 그는 일본정부에 대해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수백년전 일본이 불법 강점한 대마도는 한국의 전통적 영토이므로 반환하라는 것, 이후 이승만 통령은 기자회견과 성명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전쟁중에 '평화선'을 선포해 영해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한 이승만의 리더십, 그 50년후 김대중 대통령이 독도 근해의 영유권을 일본에 개방함으로써 영토분쟁의 불씨를 남기고 말았다.

 이승만 리더십 “일본이 망하면 소련이 들어온다”

“일본이 망하면 소련이 들어온다”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한 그가 미국정부와 국회에 임정의 승인을 요청하면서 줄기차게 말한 내용이다. 

대한민국 통일정부를 완충국으로 만들지 않으면 일본 패망 시 미국이 소련과 직접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란 이 경고는 20여년간 해방될 때까지 미국 조야에 설파한 '예언'이었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란 경고도 했다. 1942년 출간한 책 <Japan Inside Out>에서 발한 폭탄 선언은 불과 4개월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저서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는 생전처음 몫돈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의 탁월한 통찰력과 판단력은 얄타회담 직후에도 빛을 발한다. 1948년 2월 열린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정상들은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 내지 남북분활을 논의한다. 이승만은 연합국 정상들 사이에 “적당한 절차 밟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의 내막을 확인하고 맹렬히 반대했다. 한반도 분단 방지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북한점령을 양해받은 소련은 그후 유엔의 한반도 자유총선을 거부하고, 북한 점령 즉시 재빨리 단독정부를 먼저 구성하면서 분단이 현실화 되었다. 이승만에게 분단책임을 묻는 것은 소련이 '안개작전'으로 뒤집어 씌운 누명을 따르는 무지한 친북노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후 맥아더와 기쁨을...
▲인천 상륙작전 성공후 맥아더와 기쁨을...

 

6.25 휴전이 불가피해지자 이승만은 미국을 인질로 잡아 버린다. 한미방위조약이 그것이다.
그는 미국의 책임을 낱낱이 묻는다.
조성왕국과 맺았던 '조미수호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에게 한반도를 양보한 죄, 
2차대전후 공산주의 소련과 손을 잡고 한반도를 소련에게 내주려 좌우합작을 강요했던 죄,
가까스로 세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군사원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묵살하고 철군한 죄,
국제공산주의 침략음모를 알면서도 이를 외면한 죄,
 "한반도는 미국 방어선 밖"이라고 선언하여 6.25 남침을 유발한 죄,
일방적 휴전으로 한국을 방치해서 또다시 전쟁이 나도 좋으냐며 미국을 다그쳤다.

2만8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세계가 놀랐다. 아침 면도를 하던 처칠은 너무 놀라서 살을 베고 말았다.
"당신들이 참전한 이유를 모르느냐? 자유인권을 지키는 것 아니냐? 나는 포로들의 자유인권을 지키려 석방했다." 이승만의 당당한 주장에 아무도 반론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은 두 손을 들었다. 이승만이 '단독 북진전쟁'을 하지 말기만은 바랄뿐이었다. 이리하여 역사적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공표되었다.

미국이 세계 유일하게 서명한 '국가대 국가 방위조약'이다. 일미안보조약은 일본의 재무장 저지용이다.

 이승만 리더십 / 왜 하필 미국동맹인가

'원교근공'(遠交近攻), 한국의 미국동맹을 말할 때 쉽게 떠오르는 말이다.

 ‘먼 나라와 손을 잡고 가까운 적들을 공격한다’는 이 말은 10대시절 동양전적을 섭렵한 이승만에겐 병법의 상식이다. 그러면 미국과의 한미동맹이 중국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 시달린 약소국 한반도의 군사적 방위개념으로 그치는 것일까. 분명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위수단을 넘어서서 한민족의 문명사적 대전환을 가져오게 되는 글로벌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이승만은 그의 ‘독립정신’ 결론에서 ‘6대 실천강령’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 째,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더라도 서양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문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경험하고서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라는 영원히 없어지고 그 백성도 없어지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외국과 교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아야 한다....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보다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경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겨룬다는 뜻으로, 한 걸음이라도 남보다 앞서고자 하며 남보다 먼저 얻으려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할 때도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새로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신학문을 열심히 배워 경제적 이익을 외국인들에게 뺐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지금 보아도 글로벌 자유무역국가 시장경제론을 국민에게 교육시키는 글이다.

미국 유학을 하기 전에 감옥에서 이런 이론을 설파한 이승만은 6년 후에 하버드-프린스턴대학 석박사 학위로 서양문명권의 선도자 미국 사회의 시스템을 완벽히 터득하게 된다.

"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들은 자자손손 번영을 누리게 될것이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한 이승만이 대국민 담화에서 발표한 말이다.
그 말 그대로다.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은 이승만이 만들어준 무대위에서 이룩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승만이 김구처럼 중국에 망명하여 중국과 손을 잡았다면, 미-소의 좌우합작에 동의하고 김구와 함께 김일성을 만나 남북합작에 참여했다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세계10대 경제대국’은 한민족에게 그림의 떡일 것이다.

대륙문명권의 변방에서 시달리던 나라가, 한미동맹으로 해양문명권의 중심에 우뚝 선 대한민국, 이승만 특유의 불굴의 리더십이 이뤄낸 현대사의 기적이다.

이승만 리더십 / 왜 ‘독재자’가 되었나

이승만에겐 별명도 많다.
독립운동 시절엔 미국 정치계와 언론으로부터 ‘독립 병자’ ‘독립 미치광이’ ‘늙은 과대 망상자’로 불렸다.
해방후 <좌우합작 반대>투쟁때엔 ‘옹고집’ ‘분단주의자’ ‘반민족분자’ ‘반통일분자’등으로 매도 당했다. 소련과 북한을 비롯한 남로당등 공산세력의 공격이었다. 미국측도 마찬가지였다.

6.25때 ‘분단 유지의 휴전’을 결사반대하며 ‘북진통일’을 밀어붙이는 이승만은 전세계로부터 고립상태에 빠졌다. 미국, 소련, 북한은 물론이고 휴전을 강행하려는 영국도 격렬한 ‘이승만 독재자’ 캠페인을 벌였다.
‘통일병자’ ‘늙은 독재자’ ‘전쟁광’ ‘세계평화의 장애물’등등 온갖 중상모략을 당해야 했다.

특히 무력남침 통일전쟁에서 이승만에게 패배한 김일성 일파와 남한의 친북종북 세력들은 휴전후 지금까지 극단적 저주와 욕설을 퍼붓고 있다. ‘철천지 원쑤’ ‘친미 독재자’ ‘민중의 적 독재자’ ‘분단 원흉’ ‘반통일 원흉’ ‘친일파’ ‘매국노’ ‘전쟁광’까지 부지기수다.

더구나 미국은 이승만을 세번이상 제거하려했다. 암살작전을 만들어 여차하면 발동하려던 이른바 'Ever Ready Plan'이 그것이다. 언제라도 명령만 내리면 이승만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
좌우합작을 한사코 반대할때, 휴전을 반대할때, 미국정책에 번번히 맞설 때 등 미국에게 이승만은 눈엣가시였다.
부산 피난수도에서 이승만이 휴전반대에 총력을 기울일 때 미국은 장면을 후임자로 정해 미국함정에 데려다놓고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다. 이승만에게도 이런 정보는 다 들어왔다. 실제로 부산 역전광장서 연설할때 저격을 당했으나 권총 불발로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안되겠다.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자. 내가 믿을 것은 국민의 힘 뿐이다."
적대적인 한민당등 야당들이 국회 간선에서 미국과 합작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 개헌작업을 강행했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 '발췌개헌'은 이래서 생긴 것이었다. (이 직선제 헌법이 그후 민주화 투쟁의 바로메터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사면초가의
이승만은 북한군과 싸우면서 목숨을 걸고 미국과 싸우고 국내야당세력과 싸웠던 것이다.

1948년 4월, 북한에 들어간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 뒤를 따르고 있다.
▲1948년 4월, 북한에 들어간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 뒤를 따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일찍부터 ‘독재자’로 비난 받은 것은 그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김구처럼 미국의 좌우합작 강요에 굴복하여 김일성과 손잡았더라면,
자유선거를 포기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한까지 넘겨주었더라면,
‘북진통일’을 포기하고 강대국들의 ‘분단 휴전’ 강요에 응하였더라면,
이승만이 그랬더라면 ‘독재자’라는 욕을 안 먹었을까?
아니다.
한국의 정치세력들도 일찌감치 이승만을 ‘독재자’로 맹렬히 비난했다.
대한민국 건국 전야, 이화장 ‘조각당(組閣堂)’에서 이승만은 또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한민당이 내놓은 입각요구, 총리와 7명의 장관자리를 달라는 요구를 이승만은 단칼로 거부해버린 것이다.
당시 한국 최대 정치세력 한민당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으랴.
“당신들은 친일파로 비난 받는 지주계급이오. 나의 농지개혁도 반대하잖소.”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위해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한다. 입각한 한민당 의원은 재무장관 김도연 한명 뿐이었다.

이때부터 이승만 정부는 야당으로부터 ‘독재정권’으로 집중공격을 받았다.
한민당을 지지하는 신문, 김구를 지지하는 신문, 북한에 동조하는 신문들이 한목소리였다.
어느 것이 북한 선동이고 어느것이 야당 비난인지 분간을 못하는 상황이 4.19때까지 계속되었다.
집권세력은 더욱 위기 의식에 몰렸고, 노골적인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결국 이승만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씨구나, 북한도 야당세력도 ‘독재자’의 거적속에 이승만을 묻어버리고 손을 털었다.

 

불굴의 자유민주주의자 85세 건국대통령의 운명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 리더십 / 똑똑한 국민 만들기 ‘교육 대통령’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어느 덧 7년째가 되었다.....러일전쟁이 벌어지니 남아로서 경륜은 없지만......분노가 치밀어 눈물을 금치 못하여 그동안 해오던 영한사전 작업을 중단하고 이글을 쓴다......되도록 일상 쓰는 쉬운말과 한글로만 쓴 것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려는 것이며 특별히 백성에 대해 많이 쓴 것은 대한제국의 장래가 백성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한문을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썩고 잘못된 습관에 물들어 기대할 것이 없고......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우리나라의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올바로 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여 날로 국민정신이 바뀌고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
건국 4237년 6월 29일 한성감옥에서 죄수 리승만 씀.

이것은 1904년 이승만이 직접 쓴 옥중 저서 ‘독립정신’의 서문중 일부이다.
전국민 의무교육, 남녀 평등 교육, 직업 교육, 과학기술 교육, 육해공 사관학교 교육, 대규모 유학생 보내기, 생활개선 운동, 허례허식 추방운동, 도덕 재무장 운동, 4H(Head, Hand, Heart, Health)클럽 운동.....1948년 정부 출범과 동시에 국민교육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망명생활때부터 수십년 쓴 타이프라이터로 직접 편지를 쓰는 이승만.
▲망명생활때부터 수십년 쓴 타이프라이터로 직접 편지를 쓰는 이승만.

“그는 교육에 미친 교육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내각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들의 회고다.
각급학교 증설에 없는 예산을 털어넣고 한국의 MIT를 만들자고 인천에 인하공대를 설립하고, 서울공대엔 원자력공학과를 만들었다. 지금 원전 수출국의 원점은 50년대 이승만이 도입한 원자로에 있다.
특히 남녀 평등 선거권은 미국 흑인보다 20년이 앞서고 스위스 여성선거권보다 앞섰다.

“백성이 깨어 있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문물을 부지런히 배우고 일해야 한다”
“자유를 존중하고 국기를 존중하고 외국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개개인의 도덕문제부터 실천사항을 시시콜콜히 열거하며 감옥에서 ‘강한 국민’을 열망하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국민교육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자유시민 교육, 왕국 계급사회의 신민으로서 국가개념도 국민의식도 없이 곧바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일이야말로 이승만에겐 무엇보다 시급히 이뤄야할 꿈이 아니던가.
“엽전은 어쩔수 없지” “우리 힘으로 무얼 어쩌겠어” 자아상실에 빠진 마이너스 아이덴티티(-Identity)를 플러스로 전환시키려면 ‘주체성 찾기’ 교육 외에 다른 무엇이 있던가.

 

특히 이승만은 민주주의 훈련에 열정을 바쳤다.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6.25 전쟁중에도 시도면(市道面) 의원 선거까지 치룬 것은 국민들에게 민주시민 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에서다. 전시 비상조치등 헌정 중단을 한번도 안한 일 역시 갓출범한 자유민주주의를 조속한 기간내 정착시키려는 이승만의 신념 때문이었다.


아아, 4.19....국민이 들고 일어난 것은 건국 12년, 직선제 도입 8년 만이다.
4월26일 아침, 하야성명을 비서진에게 구술한 이승만은 데모학생 대표들을 만난다.
“부정선거를 다시 해야 합니다.” 경무대서 마주앉은 대통령에게 학생이 말했다.
“그래야지. 부정을 왜 해, 부정선거는 선거가 아니다. 부정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청년은 청년이 아니다. 국민이 아니다. 내가 그만둬야 학생들이 다치지 않겠지.”
학생들의 손을 쓰다듬는 이승만은 눈앞에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똑똑한 국민의 얼굴을 보았다.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는 방송이 나갔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함께 경무대를 나왔다.
‘국민이 원하면 하야’라는 새로운 민주 전통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흔히들 이승만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10여년간 교육시킨 막강한 국민의 탄생을 확인한 기쁨---이승만에게 4.19는 반세기 전 ‘독립정신’의 꿈이 현실화된 마지막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