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언론인)
등화가친, 독서의 계절이다. 남다른 독서가였던 법정(法頂)은 그가 쓴 책 속에 독서에 관한 어록을 꽤 많이 남겼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고, 시는 꼿꼿이 앉아서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 “나는 이 계절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이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만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이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인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쓰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온전히 쉴 수 있다.”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던 그가 왜?
법정은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법정의 책은 그 하나하나가 속세의 사람들을 향한 법문에 다름 아니었다. 법정이 열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던 것도 그 대부분이 책을 통한 인연 때문이었다. “법정은 무소유를 말하지만. <무소유>란 책만은 꼭 갖고 싶다”고 김수환 추기경이 말할 정도로 그의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꼭 갖고 싶은 책이었다. 그런데 법정은 왜 자신의 모든 책들을 절판하라 했을까. 유언장에는 다만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고만 되어있다.
나는 법정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알 법한 사람을 만나 물어보기도 했고, 지면을 통해서도 그 뜻을 헤아려 보려고 애썼다. 이런 저런 대답이 나왔다. “판권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일이 벌어질까봐 미리 쐐기를 박아 놓으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신은 수행승인데 죽고 나서 다만 문사(文士)로만 기억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 “깊은 뜻이야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평생 베풀었던 당신의 말을 책임지겠다는 뜻”, “책 속에서 참된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좋은 말만 챙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죽비의 경책이다.”
혹자는 말은 사람의 영혼인데, 말로써 평생을 산 법정이 더 이상 말로는 진리를 향해 갈 수 없다는 인간된 한계를 깨닫고 우리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참회하며 떠나는 법정의 모습이 얼마나 장엄하냐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법한 외침인 절판유언을 용서해 드리자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먹고 사는 사람들, 말의 관리자들은 법정의 유언이 죽비가 되어 어깨를 후려치는 것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8만 4천의 법문을 설파한 부처가 “나는 한마디도 설법한 일이 없다”고 한 사실을 들어 오랜 전통의 선불교(禪佛敎)의 정신으로 그 유언을 이해하려 했다. 근본에 이르는 길과 그 방편은 말과 글에 담을 수 있어도, 근본 그 자체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도저히 필설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법정은 그런 유언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유언은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자 화두 ‘무(無)’자의 경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고심 끝에 나온 해답이요, 또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의 독자가 모두 불자만이 아니요, 설사 불자들이라고 해도 해탈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피안에 이르거든 거기까지 타고 온 뗏목은 버리라는(捨筏登岸)이란 말은 들었어도, 처음부터 책을 버리라는 얘기는 일찍이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말을 많이 한 데 대한 반성, 그렇지만
‘말빚’이란 말이 처음 그의 책에 보이는 것은 1982년에 나온 <말과 침묵>의 서문이다. 1977년 6월,「샘터」증간호에서 불교의 명언들을 모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펴냈는데 그것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불타석가모니의 설법과 조사들의 어록을 읽으면서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던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는데, 그동안 산의 일이 많아 ‘말빚’을 뒤늦게 갚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갚아야 할’ ‘말빚’과 유언장의 가지고 가고 싶지 않은 ‘말빚’은 그 뜻이 확연하게 다르다.
유언장에서 말하는 ‘말빚’의 뜻은 무엇일까.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법정이 그 ‘말빚’에 대해 쓴 글이 있다.(<홀로 사는 즐거움>, 샘터사, 2004)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보니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대중 앞에서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를 너무 많이 쏟아놓았다. 기회있을 때마다 침묵의 미덕과 그 의미를 강조해 온 장본인이 침묵보다 말로 살아온 것 같은 모순을 돌이켜 본다. …… 서가를 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쓴 글들이 번역물을 포함해서 서른 권 가까이 되는구나. 말을 너무 많이 해 왔듯이 글을 너무 많이 쏟아놓은 것 같다. 세월의 체에 걸러서 남을 글이 얼마나 될지 자못 두렵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는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그의 유언은 자신의 말과 글이 삶의 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더구나 침묵을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말을 많이 한 데 대한 반성과 후회의 표현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소유’가 ‘얽매임’이 되듯이 ‘말’을 많이 해서 그것이 큰 ‘빚’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 말의 빚을 내생까지는 가지고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유언이 수긍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책을 모두 절판하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쳤다. 그의 뜻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가을, 그의 글을 읽고 싶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