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이야기♧

제주도 와 자전거 여행

우리둥지 2009. 7. 23. 21:32

[솔푸른, 2009/07/22 23:53, 제주도 자전거여행]

송악산

송악산 절벽 위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

산방식당에서 밀냉면 먹은 힘으로 송악산을 오른다. 송악산은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이다. 내게는 조금 벅찬 경사인데, 있는 힘을 다해 올라간다. 송악산에 관광을 온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편하게 차타고 가면 되는데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는지도 모르겠다. 송악산을 걸어서 오르는 올레꾼들을 앞서 가면서 인사를 했더니, '화이팅' 힘내라는 응원을 보낸다. 올레꾼들은 산 정상까지 오르거나 정상을 에돌아가는 길로 해서 하모해수욕장까지 걸어간다.

송악산 산책로는 송악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을 지나쳐 자동차가 다니는 시멘트길을 따라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굽이길을 돌 때 안쪽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송악산 해안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모두 장관이다. 한 떼의 돌고래 무리가 푸른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듯한 형제섬과, 드넓은 평지에 홀로 우뚝 솟은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바라다 보인다는데, 마침 안개가 끼어서인지 형제섬 너머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망망대해다.

송악산 분화구 위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일본군 동굴진지

송악산 절벽 아래 일본인들이 뚫어 놓은 동굴진지.

동굴진지 안에서 내다본 바다, 형제섬.

송악산에서 내려와 그 절벽 아래 동굴진지를 찾아간다. 이 동굴진지들은 일제시대 일본군이 제주도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것이다. 이곳 동굴진지는 송악산 해안을 따라 절벽 아래에 16곳, 절벽 중간에 1곳이 있으며, ㅡ자, H자, U자 등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군은 이곳 송악산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역에 동굴을 팠다. 한라산은 물론, 제주도의 웬만한 절벽 아래에는 어딜 가나 이런 시커먼 구멍들이 뚫려 있다. 그 수가 80여 곳에 700여 군데나 된다고 한다. 거의 벌집 수준이다. 일본 사람들, 자기네 땅이 아니라고 너무 함부로 손을 댔다. 이것이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와 국민의 비극이다.

일본군들은 제주도에 왜 이처럼 많은 동굴을 뚫어야 했을까? 거기에는 무서운 의도가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본토 대신 제주도에서 미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준비를 했다. 그걸 '결7호작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작전에 따라, 일본인들은 제주도 해안가만 아니라, 한라산 중턱에도 대규모 동굴진지를 구축해 놓고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전세가 급격히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미군과 맞서 싸우려 했을까? 이곳 동굴진지 앞에 놓인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결사 항전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는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미군 함대를 향해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시설이다.'

그러니까 이곳의 동굴진지는 일본이 패전을 앞둔 시기, 옥쇄를 강요당했던 군인들의 자살공격용 무기를 감춰두는 데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절벽 아래로 촘촘히 뚫려 있는 동굴진지들.

동굴진지 설명문. 그 안의 작은 사진이 자살 공격용 인간 어뢰.

일본인들이 제주도에 만든 군사시설에는 이외에도 '비행장, 포대, 참호, 고사포진지, 훈련장, 대피소, 특공대기지, 전투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매립지'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주도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만약에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제주도가 전장의 불바다로 변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이곳 동굴진지를 한가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제주도에서는 이 동굴진지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인간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려는 전쟁의 잔인한 속성과 함께, 그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마라도선착장

마라도행 배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관광객들.

송악산 옆 마라도유람선착장에 사람들이 득시글하다. 선착장이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뒤섞여 정신이 없다. 작은 섬 마라도가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너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라도 때문에 '2등'으로 전락한 가파도가 더욱 더 궁금해진다. 영원히 2등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가파도, 내일 그 현장을 찾아간다.

송악산 동굴진지 부근에도 관광객들이 꽤 몰려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보다는 중국인들이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아무래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배를 타고 마라도로 들어가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중국인들이 이곳을 들러 가는 건, 이곳이 대장금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대장금에만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알뜨르비행장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그 위로 흙을 덮어 풀로 위장했다.

알뜨르비행장 찾아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아니 내가 길은 잘못 든 탓이다. 마라도유람선선착장에서 나와 알뜨르비행장으로 곧장 가는 길은 찾지 못했다. 결국 다시 하모해수욕장까지 되짚어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올레꾼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간다. 길이 조금만 복잡해도 금방 방향을 잃고 마는 습성 때문에 다리가 참 고생이다.

알뜨르비행장은 일본군이 정뜨르비행장(지금의 제주공항)을 만들기에 앞서, 1926년에 중국 대륙을 침략할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넓은 평지가 비행장을 만드는 데 적격이었다. 그 후 이곳의 격납고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부터 12월까지 2달 간 매일 수천 명의 제주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이곳에 아카톰보(빨간잠자리 비행기)라고 불리는 작은 비행기를 숨겨두고 미군과 맞서 싸울 궁리를 했다.

지금도 이곳 밭 한가운데 작은 돔 형태의 비행기 격납고들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농산물들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비행기 몸체와 날개를 감추는데 맞춤한 형태를 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표면에 시멘트와 자갈이 튀어나오는 등 그냥 되는 대로 아무렇게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걸로 봐서 꽤 튼튼하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20동을 지었는데 그중 19개동이 아직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멀리 산방산을 배경으로 한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앞에 감자를 캐는 농부들.

그런 격납고들이 밭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살풍경인데, 제주 사람들에겐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격납고 사이로 농부들이 부지런히 감자를 캐 상자에 담고 있다. 그 모습이 한가롭다.

알뜨르는 '아래에 있는 뜰'이라는 뜻이다. 주변에 모슬봉, 단산, 산방산, 송악산 등이 에워싸고 있는 걸로 봐서 그 산들의 아래에 있는 뜰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일본 사람들, 제주도에서 참 못된 짓 많이 했다. 농사지을만한 땅에는 비행장을 만들고, 제주 사람들이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한라산에 개미굴같은 진지를 만들고, 절경인 해안 절벽마다 군사용 구멍을 뚫었다. 두더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제주도 전역을 군사기지화하고, 전쟁터로 만들려 했던 일본인들의 의도는 '다행히'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알뜨르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래 이 땅은 제주도 사람들의 것이었다. 일본인이 이 땅을 지배할 때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가, 해방이 된 이후에는 이 나라 국방부가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이 땅에서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국방부로부터 땅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내 땅을 남의 손에 넘겨주고 다시 임대해 사용하는 심정, 그 누가 알까? 게다가 최근에는 제주해군기지 건설과 함께 이곳 알뜨르를 다시 군용 비행장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제주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 사람들이 권력자들에게 땅을 빼앗긴 사례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일본이 이 땅을 지배하던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4.3사건이 일어나고 난 이후에는 불에 타 없어진 중산간 마을의 땅 상당 부분이 권력자들과 그 권력자들에게 기생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가족 모두가 학살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땅과, 마을 공동 소유로 있던 목장 등이 대명천지하에 남의 손에 넘어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제주 사람들이 그렇게 잃어버린 땅은 그 후 1970년대 제주도 땅 투기바람이 불면서, 다시 서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 와중에 기획부동산에 속아 사기를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한국 사회에서 이처럼 남의 '재산'을 폭압적으로 빼앗는 일은 2009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약자들의 등골을 파먹고 사는 하이에나 권력은 그 역사가 매우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