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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록.정춘풍.권삼득 등의 법제를 뼈대로 하여, 운봉.구례.순창. 홍덕 등지에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구분은 후대에 와서 동.서 양쪽 가객들이 서로 이동하게 됨으로써 큰 의의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 대화에 있어서 호령을 한다거나 호걸스럽게 의사를 표시할 때에는 어세(語勢)가 강렬해지고 활발해지는데 판소리에서 이와 같은
흐름으로 노래한 유파가 동편제이다. 동편제는 통성과 우조를 중심으로 하며 대마디대장단을 위주로 장단을 짜며,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을
구사하는 소리이다. 또 동편제는 소리가 웅장하고 가맥마다 힘이 들어있다. 또한 발성의 시작이 신중하며, 귀절의 끝마침이 쇠망치로 끊듯이 명확하고
상쾌 하며, 소리는 자주 붙이지 않고 쭈욱 펴며, 계면조 가락을 많이 장식하지 않는다.
동편제의 근대 명창으로는 권삼득,송홍록,박기홍,김세종,송만갑을 꼽을 수 있는데, 송만갑은 뒷날 서편제와 가까운 새로운 창법을 개척하여
족보에서 할명(割名)당했다. 이는 판소리 법통에서 유파 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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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가 판소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판소리는 세계적으로 빼어난 문화적 가치와
음악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고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이 살아오면서 이어온 민족의 혼과 선조들의 지혜가 그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들어있고 온갖 해학이 판소리에 스며들어 있기에 우리 조상들은 판소리를 들으며 밤새도록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하면서 또 더덩실 춤도 추고 싶은 흥도 느꼈던 것이다. 판소리를 들으며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판소리를 들으며 인간의 도리를
배워 왔던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판소리가 우리나라에 남아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복이고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으며 특히 우리고장이 판소리의
고장임은 더더욱 긍지를 가질만한 일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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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오래전 부터 불려왔지만 이조 영조, 정조 때 가장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판소리하면 남자만 불렀던 것으로 이조말기
대원군이 경북궁내 경회루 신축식(1869.7)에 여자 명창 진채선을 불러 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 여자 명창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남자들이
소리를 하다보니 소리가 자연히 웅장하고 호탕하며 굵직 굵직하여 하늘이 무너지듯, 땅이 꺼지듯 또 폭포가 떨어지듯 그러한 엄성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소리를 들어보려고 극장이고 장터에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자의 소리가 바로 동편제인 것이다. 동편제의
묵직하고 장엄한 소리에 막힌 가슴이 뚫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장수의 호령소리에 혼비 백산하는 전쟁터를 실감케 했던 것이다. 판소리의
제(制)에는 동편제와 서편제 또 중고제와 보성제 등으로 크게 나눈다. 동편제는 지리산을 끼고 운봉을 비롯하여 남원, 순창, 구례와 같이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함양, 하동, 진주까지를 포함시키며 동편제의 시조가 바로 운봉출신에 가왕(歌王)이란 칭호를 받은 송흥록(宋興祿 조선조
정조∼철종)명창이다. 동편제는 장단도 길게 빼지 않고 짧게 그리고 분명히 끊어지며 리듬 또한 단조로우며 담백한 맛이 있다. 동편제와 구별되어
일컫는 서편제는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와는 달리 애절하며 섬세하여 여성적인 면이 있는 소리다. 동편제의 무뚝한 맛과는 달리 서편제는 수식과 기교가
많아 자상하며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감상적인 면이 강조되는 소리이다. 주로 섬진강을 넘어 광주, 담양, 나주, 목포, 보성 쪽이라
할 수 있겠다. 중고제(中古制)는 서울, 경기, 충청 일원 지방에서 주로 부르던 제(制)로 가볍고 경쾌한 음에다 경드름조를 가미한 선비음의
점잖은 소리라 하겠으며 서편제보다 동편제 소리에 가깝다. 중고제를 소리하는 명창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성소리는 강산제(江山制)라고도 하는데
동편제 소리에다 서편제를 가미하여 좋은 점만을 따서 만든 소리로 이 또한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이다. 순창 출신 박유전(朴裕全
1835∼1906)명창이 그 시조이며 보성군 강산마을로 이사하여 살면서 소리를 했으며 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듣고 천하제일 강산(江山)이라
칭찬했다 해서 강산제라고 한다. 이런 유명한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이 바로 운봉이다. 바로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그의 아우이며 자신의
고수였고 후일 명창이 된 송광록(宋光祿),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雨龍),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萬甲 1865∼1939)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宋門一家)는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큰 계보인 것이다. 운봉에서 살다가 구례로 이사간 송광록과 송우룡은 물론 송만갑 역시 비록 구례에서
살았다고는 하나 결국 운봉에 태를 둔 운봉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으며 운봉의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함께 마을 입구에 그의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1916∼1984)명창의 고향이기도하며 그녀가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이밖에도 운봉은 남원이나
구례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로 명창끼리 오가면서 공부도하고 친하게 지냈던 명창들이 대단히 많다. 유성준(1874∼1949),
김정문(1887∼1935), 배설향(1895∼1938), 이화중선(1898∼1943), 박봉술(1921∼1989), 강도근(1917∼1995)등
많은 명창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안숙선, 정춘실, 이난초, 전인삼 등의 젊은 명창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정춘실은 운봉면 권포리 출신이다.
운봉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국악인들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속의 고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춘향가 속의 무대는 물론 남원이다. 그러나
변사또 생일잔치에 모였던 현감(縣監), 군수(郡守)들이 모인 가운데 가장 눈치 밝고 현명하게 처세하여 후일 승직하여 좌수사(左水使 : 좌수영의
절도사)가 된 사람도 바로 운봉 영장(1728년 부임한 손명대가 있긴 하지만 판소리 속의 인물과 동일한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음))이었다. 그는
어사또를 미리 알아 보기라도 한 듯 그를 후히 대접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따금 박동진 명창과 오정숙 명창의 어사 출두 장면의
소리를 들으면 변사또 생일잔치에 어사가 출두하자 자리의 현감 부사등 각 고을 수령들이 어쩔줄 모르고 도망칠 때 운봉영장도 말을 꺼꾸로 타고
달아나는 대목을 넣고 있다. 이는 앞뒤에 이면이나 결과로 볼 때 본래에 없었던 말을 흥미 위주로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정숙의 스승 김연수
명창은 본래 한문에 박식하여 춘향가 뿐만 아니라 다른 바탕도 해방 후 판소리를 새로 길게 짜서 많이 개작을 하고 소리를 보완하여 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춘향가는 이사람 소리제, 저사람 소리제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첨가하여 필요 이상으로 소리가 길고 지루하다는 평도 받고
있다. 판소리 중에서 다급한 상황에서 말을 거꾸로 타고 가는 대목은 적벽가 중 조조군사가 적벽강에서 제갈공명의 동남풍의 힘으로 오나라 군사에게
대패할 때 조조가 도망가는 대목을 비하하여 했던 소리대목이다. 정욱이가 여짜오되 "승상님 말을 거꾸로 탔소" "언제 옳게 타겠느냐. 말 목아지만
빼어다 뒤에다 박아라 박아라..." 그런데 이러한 대목의 소리를 운봉 영장에게 붙여서 될 일이겠는가? 말을 거꾸로 타고 도망가는 소인에게 임금이
후일 좌수사로 승진을 시켜주겠는가. 변사또 생일잔치에 거지 복장을 하고 들어온 이도령의 어사출두 장면 직전을 한번 보라. 그때의 어사또는
잠행하던 복장으로 광한루에 썩 올라서니 사령들이 달려들어 쉬― 아뢰어라 아뢰어라 사령아 아뢰어라. 여쭈어라 여쭈어라 급창통인 여쭈어라. 지나는
과객으로 좋은 잔치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 얻어 먹고 가자고 여쭈어라. 운봉이 보시더니 의복은 남루하나 행색이 다른지라. 여봐라 그 양반 이리
모셔라. 어사또 자리를 주어 앉더니만 "어 하마터면 내가 먼저 당할뻔. 우리 좌중에 인사나 하옵시다. 저기 앉으신 분이 아마 주인이신가
보구려." 액환을 당할려면 어디 대답을 잘 할리가 있겠느냐. "젊은것이 얻어 먹을랴거든 가만히 한쪽에 앉아서 주는대로 먹고 갈 일이지 인사는
무슨인사." "아니 다른 인사가 아니오라 오늘 주인의 경연이신가 본데 날짜를 하도 잘 받았기에 그 인사 말씀이요. 여보 운봉 나 술상하나
받아주오." 술상을 내어노니 어사또 또 트집을 잡는디 "주박성효(酒薄盛肴)요 관후입권(罐後入勸)이란 말이 있는디 내 상을 보고 저 상을 보니
속에서 불이 나오그랴." 운봉이 대답하되 "우리는 먼저 오고 손님은 뒤에 오셔 차리느라 뭐 부족한가 보구려 먹고 싶은것 있거들랑 내 상에서 같이
잡숩시다." "운봉은 동시 객(客)이 오니 하실 염려 아니오. 저 주인상하고 바꾸어 먹었으면 꼭 좋겠구만." 본관의 눈꼴이 오직하겠느냐.
거상풍류 길게 치고 어여쁜 기생들은 권주가 장진주로 엇걸어 노닐적 어사또 옆에는 기생 하나도 없거늘 "여보 운봉 나 기생 하나 불러 권주가 하나
시켜주시요" 기생 중에 제일 늙고 못생긴 기생이 나와 술을 부어 권주가를 하는디 "진실로 이잔 곧 잡으시면 천만년이나 빌어 자시리라" 어사또
일어서더니 "어 이사람이 나더러 이 술을 먹고 천만년이나 빌어 먹으라 하였으니 이술을 나혼자 먹고 보며는 십대를 빌어먹어도 다 못 빌어 먹게
생겼으니 우리 좌중에 다같이 나누어 먹고 당대씩만 빌어먹읍시다." 하고 술을 쫙 뿌려 놓으니 이건 관장의 놀음이 아니라 과객의 놀음이었것다.
본관의 눈꼴이 오죽 허겠느냐. 아마도 저 젊은것이 무식허리라 하고 "자 좌중에 내 청할말이 있오. 음령(吟詠) 한 수씩을 지어 일후의 유적이
되게 하되 만일 못 짓는자가 있으면 곤장을 때려 출송하기로 합시다." 운자(韻字)를 부르는데 기름고(膏), 높을고(高)자를 불러놓으니 저마다
글을 지어올때, 어사또 글 한수 얼른 지어 운봉주며 "여보 운봉. 과객의 글이 오죽 하리요마는 잘못된 곳이 있으면 보시고 고치시요." 운봉이
보시더니 풍월쩍 잡은손이 흔들흔들 곡성이 보시더니 얼굴이 쇠놀놀하여지며 두 분이 글을 읽는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 이라.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金樽美酒 千人血 옥반가효 만성고라 玉盤佳肴 萬姓膏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燭淚落時 民淚落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歌聲高處 怨聲高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를 뽑아 만들었고 옥쟁반에 담긴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짜서 만들었으며 촛대 흐르는 촛물은 백성들의
눈물이요 노래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더라. (이상 동편제에 가까운 보성소리 정응민 제 사설이며 이하 어사출또 장면은 생략 함)
춘향가는 문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한국지리, 중국지리 등에 통달한 사람이(반드시 혼자가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썼으리라고 믿고 있는데 전국지리 뿐만 아니라 특히 남원과 운봉까지를 논하며 최후 클라이막스인 변사또의 생일잔칫날 어사출또에 운봉 영장을
클로즈업시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운봉은 이성계가 황산에서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고 이씨 조선을 건국하여 태조가 직접 은혜를
받은 곳이다. 이성계를 대동하고 온 무학대사가 고남산에서 내려다 보고 이름지어준 마을이 장교리(長橋里)라고 했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산의
흐름이 마치 긴 다리가 놓여진 것 같다고 지어준 이름이다. 그후 이성계의 후손이나 충신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 칭하여 마음속 깊이 새겨둔 곳이
바로 운봉이요, 먼 훗날 이들의 연고로 해서 판소리 속에 운봉을 항시 좋게 표현 한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낳게 한다. 왜냐하면 운봉은 판소리
흥보가 속에서도 나오고 변강쇠 타령 속에서도 나온다. 흥보네 제비가 강남에서 보은의 박씨를 물고 온 곳이 바로 운봉이다.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을품(사이)에 박씨 형제가 사는디 형은 놀부요. 아우는 흥부라..." 흥보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제시대
운봉이 지금의 4개면(운봉, 동면, 아영, 산내)으로 나뉘어져 지금은 흥보마을이 서로 자기 마을이라고 동면과 아영면이 주장하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 운봉이었다.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다던 마을도 산내면이 접해있는 마천 동구마을이며 같은 지리산 줄기이다. 변강쇠 타령은 변강쇠가 여자 옹녀와
함께 성(性-sex)의 심볼소설을 판소리로 만든 것이다. 정광수 명창은 판소리 변강쇠 타령의 사설을 읽어보니 소리 자체는 좋았으나 내용이 좀
상스럽고 부르기가 쑥스러워 그 판소리 가사집을 김연수(작고)명창에게 주었더니 그 뒤 그가 잃어버린거 같다고 필자에게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변강쇠 타령은 변강쇠가 팔랑재를 넘어 운봉으로 오는 대목이 나오는 판소리 열 두바탕 중의 하나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소리 공부를 위해 산이나 폭포를 찾는다고 하였는데 운봉은 이렇게 소리공부 하기에 최적지요 지대가 높아 공기도 좋을 뿐더러 속세와 뚝 떨어져
있었으니 소리에만 전념할 수 있어 더욱 좋았던 곳 같다. 운봉이 소리 고장임은 우선 신라시대 거문고의 명인 옥보고가 옥계동에서 거문고를 키면서
말년을 보내었고 속명득과 귀금선생을 가르쳤다는 것을 보아도 운봉이 음악의 고장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운봉은 또한 비옥한 농토를 중심으로 박희옥
같은 부자가 살고 있었기에 최근까지 여러 명창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러기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도 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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