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위원회는 박정희 정권 3선 개헌 발의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의문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위원회는 국정원, 검찰, 경찰, 기무사, 헌병대에서 파견한 조사관과 유가협 등에서 추천한 민간조사관이 한조를 이뤄
장준하 선생의 약사봉 등산길 추락사건을 진상규명했다.
저는 장 선생의 실족사를
주장하는 김 모 씨를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고, 위원장으로서 중요한 사건현장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약사봉 길을 그와 함께 했음을 밝혀둔다.
2001년 3월 23일 위원회의 조사관들과 함께 약사봉 계곡을 미리 답사하고, 5월
31일 장 선생의 실족사를 목격했다고 증언한 김씨를 불러 1975년 8월 17일 장 선생의 약사봉 등산로를 따라 그 행적을 추적했다.
저는 약사봉 길에서 김씨와 나눈 대화, 그날에 겪은 사실을 그대로 밝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1)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실족사일 수 없다
장준하 선생은 사고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저항해 투옥 등으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은
실천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많은 의혹을 자나내기에 충분했다.
사고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 선생의 죽음이 등산길에서의 실족사라는 사실은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으나 김씨는 한 결 같이 실족사임을 되뇌었다.
2004년 월간조선 김성동 기자와의 인터뷰(2004년 8월호, p.159)에서도
다음과 같이 실족사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장준하(張俊河)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저는 위원장으로서 위원회가 조사할 의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모두 검토했고, 장준하
사건은 1993년 ‘민주당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조사위원회’가 작성한 조사활동보고서와 김씨의 증언녹취록 등 자료를 읽고 사건현장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저는 2001년 3월 23일 조남관 검사 및 조사관 7명과 함께
당시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 씨의 안내를 받아 사고현장을 찾았다. 우리는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먼저 장 선생이 추락했다는
바위를 확인했다.
그 바위는 계곡에서 7~8분 걸어 올라가면 찾을 수 있고, 장
선생이 숨져 누워계셨던 곳에는 1975년 9월17일 사고 한 달이 되는 날에 ‘고 장준하선생 주모동지 일동’의 이름으로 아래 글귀를 담아 세운
비가 있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 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 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우리는 비
앞에서 다 같이 묵념하고, 일부는 그 현장에서 산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 올라가기로 하고, 일부는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가 사고지점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등산로로 갈 팀은 김씨가 장 선생을 찾아 함께 올랐다는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이르렀다.
그 등산로는 험하지 않은 조용한 길이었고,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서 김씨가 장 선생이 준비한 샌드위치를 함께
들었다고 말한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산위에서 사고지점을 향해 내려가는 길, 김씨의
녹취록에서 “선생님은 펄쩍펄쩍 뛰어넘으면서 저보고 오라는 거여요”라고 밝힌 길은 없었다고 느꼈고, 밑으로 뻗친 산등성이는 모두가 험준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고지점을 향해 내려갈 수 있는 길을 택해 조심스럽게
내려가기로 하고, 저도 그 대열에 끼었다.
장 선생이 사람이 맨몸으로 가기 힘든
길을 잡아 내려가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면서도 김씨와 함께 현장을 검증하기 위해 75m 높이의 바위와 장 선생이 실족하셨다는
16m 높이의 바위를 향해 내려가 보고자 길을 잡았으나 너무 험난해 저는 중도에서 포기했다.
밑으로 내려가던 조사관들도 사고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결국 밑에서 그 바위를 거쳐 어렵게 올라온 조사관들과 함께
일행 모두가 산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모두가 장비 없이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해 그 산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씨가 장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한 증언은 믿을 수 없다고 약사봉은 말없이 속삭이고 있고, 장 선생이
등산하셨다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목격자라는 김씨와 함께 한 약사봉 길
위원회는 차일피일 미루는 김씨를 설득 5월 31일 약사봉의 현장검증을 하게 됐다. 이날 약사봉 길에는 위원회 직원
10여 명과 전문산악인 3명을 초청, 등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김씨는 1975년
8월17일 호림산악회의 약사봉 등반길에서 몇 년 만에 뵙는 장 선생을 모시고 함께 걸어가다가 일행과 함께 온 어린이가 계곡물에 빠져 그 수습을
하는 사이에 장 선생은 앞서 가셨다는 것이다.
저는 김씨에게 어린이가 물에 빠진
지점이 어딘가 하고 확인을 구했다. 그 어린이가 빠졌다는 곳은 바로 장 선생의 시신이 발견된 산 쪽으로 들어가는 초입 근방이었다.
당시 저는 육감적으로 아이가 빠져서 소란한 틈을 타서 누군가 장 선생을 숲속으로 유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장 선생이 김씨와 함께 걸어가셨다면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목격하셨을
것이고, 아이가 빠졌는데도 그것을 몰라라 하고 혼자 가실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곳과 등산회원들이 점심을 준비하던 곳은 상당한 거리가 있고, 그리 깊지도 않은 물에서 아이를 건져내어 수습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장 선생이 김씨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저는 김씨에게
장 선생이 비호도 아니신데 그렇게 빨리 가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등산로를 밟아 올라갔다.
등산로 초입을 조금 지나 김씨는 장 선생이 군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지점을 가리켰고, 정상을 거쳐 내리막길에서
저는 김씨에게 장 선생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자리를 대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증언한 바위를 찾지 못하고 동리가 보이는 아래쪽까지 내려갔다 올라갔다 수차례 반복하며 허둥댔다. 이것은 김씨가 증언한 등산로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장 선생이 떨어지셨다는 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김씨와 저는 자리를 잡아 앉았다.
“식사를 나눈 바위를 찾을 수 없죠?”
“찾아야 하는데요.”
“예, 그렇지요. 그러나 김 선생, 오늘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장
선생이 실족하셨다는 바위를 향해서 내려갑시다.”
“아니 여기를 어떻게 내려갑니까? 위원장님, 아래에 가서 찾으면
안되겠습니까?”
“김 선생이 ‘등성이 넘고 계곡이 험하지만 장 선생님이 펄쩍펄쩍 뛰어넘으면서 따라 오라고 하신
곳’이 아닙니까. 오늘은 제가 장 선생 역할을 할 테니 그 길을 안내하시오.”
대기하고 있던 산악인에게 김씨를 자일로 묶으라는 지시를 했다. 김씨는 저를 쳐다보며 노인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듯 항의의 눈빛을 보내자 “김
선생이 나보다 한 살 아래요. 오늘 나도 묶일 것입니다”라며 우리 둘은 산악인의 자일에 묶여 사고지점에 내려가기로 했다.
참으로 험한 길이었고, 장 선생이 함께 펄쩍펄쩍 뛰어 넘었다는 등성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1993년 민주당 조사위원회에서 김씨가 장 선생이 추락했다고 지목한 75m 바위를 산악인에게 끌려 올라가 이곳에 사람이 그대로 올라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대로 없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김씨에게 그
바위에 그대로 접근할 수 없음을 다짐받고, 장 선생이 실족사한 장소로 확인된 바위를 향해 내려갔다. 그곳도 산악인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가파른 길이었다.
가까스로 바위에 올라 저는 김씨에게 저 밑이 장 선생이
떨어진 곳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것도 내려가 보아야 알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바위이고, 그
바위에서 김씨와 저는 미끄러지기도 한 위험한 바위이니 “여기서 자기는 먼저 내려가고, 장 선생이 뒤따라오시다가 실족하셨다”는 말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산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16m 높이의 바위에서 어렵사리 내려왔다.
김씨는 그 장소가 장 선생이 실족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에서 실족사한 장소로 지목했고, 장 선생이 붙들었다는 소나무가 중턱에 있으며,
비가 세워진 곳인데도 그 장소가 사고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김씨에게 그러면 사고지점을 찾아보라고 했다.
김씨는 발목을 다쳐 산에 올 수 없다고 하던 사람인데, 여기저기 헤매면서 허둥대는 모습은 참으로 안쓰러웠다. 그
후에도 그는 사고지점을 찾겠다고 나섰지만 자신의 말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고현장에서 위로 바라보면 산등성이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막상 위에서 내려와 보니 자신이 설명한
상황은 하나도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김씨로서는 그 바위에서 ‘자신이 먼저 내려오고 뒤이어 오시던 장 선생이 실족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또한 김씨가 증언한 등산로는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 것이다.
저는 이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제 진실을 털어놓아 주시기 바란다”는 말을
건넸으나 김씨는 “실족사가 진실이고,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저는 “1975년 8월17일에는 아마 천지신명께서 장 선생을 모셔가기 위해 산등성이를 낮게 하여 껑충껑충 뛸 수 있도록 조화를 부리신
모양이군요”하고 비웃었다.
3) 김씨 주장의 허구 김씨는 스스로
장 선생의 등산길에 동행, 약사봉에서 실족하여 돌아가신 장면을 목격했다는 유일한 증인으로 자처하며 줄곧 “장준하 선생님이 실족사한 것이
질실”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과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김씨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 이미 1993년 민주당 사인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 전대열씨의 문제제기 등에서 사고현장의 상황이나 장
선생의 시신모습에서 추락사를 인정할 수 없음을 밝혔다.
저는 2001년 5월31일
김씨와 함께 약사봉 계곡을 거쳐 산 위에서 장 선생의 시신을 발견한 바위까지 내려오면서 ‘김씨는 그 전에 이 산에 오른 일이 없다’는 심증을
가졌다.
장 선생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는 장소를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이나,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자일을 타고 내려와 사고현장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모습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김씨가 위원회의 사고현장 검증에서 저와 나눈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전에 증언했던 사실에 대해 부합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다른 장소를 찾겠다고 나선 것은 그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장준하 선생이 등반길에서 내려오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셨다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험난한 산길에서 등성이를 펄쩍펄쩍 뛰어 넘으면서 따라오라고
하셨다든가, 자신이 먼저 내려오고 뒤따라오시던 선생님이 떨어졌다는 설명은 성립할 수 없다.
1975년 8월 장 선생의 장례를 치른 후에 찾아온 김씨가 장 선생의 죽음에 대해 목격자라고 증언한 것은 산에
오르지도 않고 누군가 일러준 각본에 따라 거짓증언을 한 것으로 저는 추정한다.
그리고 김씨는 장 선생이 75m 또는 16m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셨다면 어떻게 그 사체가 깨끗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사람이 멀쩡하게 사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학적으로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장 선생의 사체를 사고현장에서 검시한 심구복 박사는 ‘사망원인은 오른쪽 귀 뒤쪽에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후두부 함몰에 기인한 것이다“고 진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장 선생 댁에서 은밀하게 사체를 검안한 조철구 박사와 다른 두분 의사는 “두개골 함몰 골절 이외에 등 뒤에서 오른쪽 상부에서 하부로 향한
빗살모양의 찰과상을 확인하고 우측 둔부(엉덩이)상 외면에 주사바늘 자국이 확인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민주당 조사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군가 장 선생을 예리한 물체로 머리 뒤에서 가격하고 주사를 놓아
죽인 다음 끌어다가 바위 밑에 누이고 바위에서 떨어진 것으로 위장한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김씨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죽음의 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맺는 말 장 선생은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실천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재야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박 정권에게는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아픔에서 민족의 긍지를 살리고자 유신독재에 맞서 저항하신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감당하기 힘든 분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박정권의 행태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저는 1975년 8월17일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바로 박 정권에 의해서 저질러진
살인행위를 약사봉 등반길에서 실족하여 사망한 이른바 사고사로 가장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 검찰이 장 선생의 사체를 부검도 하지 않고 현장에 대한 면밀한 검증도 없이 그 바위만 보고 추락사로 처리하여 빨리 사건을 종결한 것은
직무유기이다.
더구나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기자를 구속한 것은 떳떳치 못한
그들의 행태를 드러낸 것이다.
2002년 10월15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보고서’ 56쪽은 ‘장준하 사건’에 관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앙정보부는 1975년 2월21일 장준하가 자택에서 개헌운동을 촉구하는 등의 반유신 활동을 계속하자
일거수일투족을 미행하고 도청하는 등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사체를 제일 먼저 목격한
김00은 여러 차례 실지 조사에서 장준하가 군인과 커피를 나눠 마신 장소, 장준하와 샌드위치를 나눠먹었다는 장소, 산행경로, 추락지점에 이르는
경로, 추락 당시 상황이나 사체의 발견 장소에 관한 진술을 번복했다.
사체는 귀
뒤쪽 두개골 함몰 골절상 외 다른 골절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시신의 모습이 깨끗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로 보아 75m 높이에서 추락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저는 위원장으로서 이 사건 처리방향에 대해 고심했다. 당시 제1
상임위원이었던 김형태 변호사에게 김씨를 직접 심문하여 거짓을 벗겨보도록 하고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김씨가 증언한 등산로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현장의 정황과 목격자라는 김씨의 거듭된
진술번복, 사고당시 사체를 검안한 의사들의 기록과 국정원이 제시한 자료 중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고당일 앞뒤로 2~3일의 기록이 인멸된 것 등을
정황증거로 내세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장준하는
약사봉 등반길에서 실족사가 아니라 당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같은 결론을 배경으로 의문사특별법 제25조 1항과 2항에 의거 김씨 등 관련자 몇 사람을 검찰총장에게 고발해
수사를 요청하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했다. 그러나 저는 중도에서 퇴임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송구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이로써 ‘장준하 선생 죽음의 진실’은 다시 국정원의 진실화해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반드시 규명해야할 역사적 과제가 됐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든, 못 밝혀지든 ‘진실은 오직 하나’라는 명제는 영원할
것이다. 장 선생 죽음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우리는 후손들로부터 못난 조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