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서노 이야기"는 명지대 차옥덕 교수의 강의중의 내용을 인터넷에서 서핑도중 카피한 내용입니다.
소서노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자의 아들인 우태의 부인이었으며 이들사이엔 온조와 비류란 두 아들을
두었다.
남편 우태가 죽고 나서 그는 졸본부여의 통치권을 이어받게 된다.
이때 스물한살의 청년이며 북부여에 부인인 예씨를 두고 망명하다시피 쫓겨온
고주몽과 시조부인 해부루에게서 이어받은 왕통으로 졸본 부여의 통치권을 이어받은 스물아홉살의 과부인 소서노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적이되기보다는 혼인이라는 서약을 통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나가며 새로운 세력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열정과 총명함, 그리고 타고난
정치적인 재능은 있으나 토착세력의 텃세에 밀려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기득권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고주몽과 기득권은 가졌지만
여성이라는 사회적 한계와 두 어린 아이들과 자기 몸 하나도 방어하기 어려운 약한 여성이라는 약점을 가진 소서노의 결합은 그대로 졸본 부여에
신흥국가인 고구려를 건국하는 큰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소서노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을 아낌없이 주몽에게 투자하여 그에게 고구려의 초대왕이라는 큰 지위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고주몽은 소서노의 공을 높이 치하했으며 그녀의 내조의 공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듯 했으나 막상 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르고 북부여에 남겨두고 왔던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음으로써
소서노의 공로는 부인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리고
만다.
소서노 역시 고구려 건국에 지대한 공이 있었으나 남성 우월주의에 입각한
관념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은 고주몽이 유리에게 태자 자리를 넘기면서 고주몽이 혼자 한 것처럼 전해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만일 고주몽이 태자의 자리를 비류에게 넘겼더라면 또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비류의 출생문제 덕분에 소서노의 이름도 이렇게 역사의 한귀퉁이에 묻히진 않았을 것이다.
소서노는
낙심하지 않고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난다.
한강 위례성에 새 성을 쌓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장남인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의 말을 듣지 않고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차남인 온조가 십제의 왕이 되고 이 나라는 백제로 융성하게 된다.
비류가
택한 곳이 물이 짜고 습하여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하여 비류는 훗날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여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 역사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소서노는 61세 되던 해에 비류를 찾아갔던 온조의 신하들이 푸대접을 받은데에 분개하여 스스로 무장하고 난전에 뛰어들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수 없다.
소서노의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이상하게도 그 다음해라고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서노가 사망한 것은 온조13년(서기전
6년)으로 기록되어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서노란 여성. 결국은 골육상쟁의 비극으로 어이없는 최후를 맞기는 하지만 뒷자리에
물러난 후궁보다는 두 나라의 당당한 건국의 어머니로써 파란많은 인생을 선택한 그녀에게 무한한 동경과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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