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신형 백두정찰기가 성능점검을 위해 비행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휴전선. 약 250㎞에 달하는 ‘철의 장벽’ 너머로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가 자리잡고 있다. 바로 북한이다.
과거에도 대외적인 교류가 드물던 북한은 코로나19가 확산하자 국경을 봉쇄한 채 내부 결속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길어지는 봉쇄 상황을 견디다 못한 평양 주재 외교관들이 속속 본국으로 철수할 정도다.
고강도 봉쇄는 첩보 요원의 대북 정보수집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북한을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포섭할 대상도 없고,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미가 북한 내에서 흘러나오는 전자파를 분석하거나 통신을 감청하는 신호정보(SIGINT) 수집용 장비를 총동원하는 것도 이같은 한계를 신호정보 수집을 통해 극복하려는 의도다.
한국군도 백두정찰기를 통해 대북 신호정보 수집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보다 정보수집능력이 우수한 기종을 도입하는 백두체계 능력보강 2차 체계개발 사업이 본격화된 상태다.
◆“백두산까지 들여다본다”…북한 전역 정보수집 가능
대북 정보 대부분을 미군에 의존하던 한국군은 1990년대부터 독자적인 정보수집 자산 확보에 눈을 돌린다.
국내 경제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고가의 정찰자산에도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전환 논의가 시작되면서 독자적인 감시정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금강·백두 정찰기(RC-800)는 이같은 요구에 따라 도입됐다. 금강은 영상정보를 금강산 지역까지, 백두는 백두산 일대까지 신호정보 수집이 가능하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8대가 도입돼 최고 1만3000m 상공에서 정보를 수집한다.
한국군 금강 정찰기가 훈련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금강정찰기는 80㎞ 거리에서 30㎝급 해상도를 유지할 수 있다. 100㎞ 떨어진 곳의 북한군 시설을 촬영해 지상으로 송신한다.
영상정보 수집능력은 미군 U-2 정찰기와 유사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다. 미국산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와 국산 중고도 무인정찰기로 대체될 예정이다.
백두정찰기는 오랜 시간 비행하며 북한 지역에서 발신되는 신호정보를 수집하며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한다.
금강·백두 정찰기는 인적 수단에 의한 정보수집이 매우 어려운 북한의 실상 파악에 큰 역할을 했다.
2010년 10월 천안함 피격 직후 북한군은 휴전선 일대를 비롯한 최전방 지역에 가짜 포와 전차, 전투기 등을 배치했다. 우리 군의 탐지능력을 교란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우리 군은 금강·백두 정찰기를 포함한 정보수집 자산을 활용, 가짜 무기가 조잡한 수준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금강·백두 정찰기는 한국군 정보수집 능력 향상에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도입된 지 20여년이 지나면서 노후화에 따른 정비 수요가 증가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군의 백두 정찰기가 훈련을 위해 비행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에 군은 2011~2018년 4000여억원을 투입, 신형 백두정찰기 2대를 만드는 백두체계 능력보강 1차 사업을 진행했다.
대한항공 주도로 진행된 사업은 프랑스 닷소의 팰콘 2000S 비즈니스 제트기에 LIG넥스원이 만든 정보수집 장비,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 데이터링크를 통합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전자정보와 통신정보 수집이 가능했던 기존 백두정찰기에 전자장비 간 신호교환을 포착하는 계기정보 수집 기능과 실제 미사일 발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화염탐지 기능 등이 추가됐다.
계기정보와 화염탐지는 북한 탄도미사일 위협 대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북한군이 미사일을 쏘기 전에는 교전통제소와 레이더 기지, 기상관측반 등이 제각각 신호를 보낸다. 최종단계에서 내려지는 발사 명령도 전자장비의 신호에 의해 미사일 포대에 전달된다.
이같은 신호를 낚아챈다면 북한군의 탄도미사일 발사 징후를 사전에 파악, 한미 연합 미사일방어체계를 조기 가동할 수 있다.
평양-원산 이남에서 쏜 미사일이 수도권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수 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형 백두정찰기가 수집하는 정보의 가치는 매우 높다.
◆불가능하다던 사업 수주한 KAI
신형 백두정찰기 성능에 주목한 군은 지난해 6월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열어 백두체계능력보강 2차 사업 추진기본전략을 의결했다.
5년간 8775억원을 투입해 1990년대 도입한 백두정찰기를 대체할 신형 기체 4대를 만드는 백두체계능력보강 2차 사업은 경쟁 입찰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백두체계 능력보강 2차 사업 플랫폼으로 쓰일 프랑스 닷소의 비즈니스 제트기인 팰콘 2000LXS. KAI 제공
KAI는 프랑스 닷소의 비즈니스 제트기인 팰콘 2000LXS을 기반으로 정보수집 장비, 송수신 시스템 등을 통합하고, 정보수집체계 운영을 위한 관련 개발을 담당한다. 임무 장비는 LIG넥스원이 맡는다.
KAI가 이번 사업을 수주한 것을 놓고 방산업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1차 사업을 진행한 대한항공은 2차 사업 입찰을 앞두고 수주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정보수집 및 지상체계 통합과 항공기 개조, 감항인증 획득, 시험비행 등의 경험도 1차 사업을 통해 축적한 상태였다.
반면 지난 3월 특수목적기 시장 진출을 선언한 KAI는 T-50과 KF-21 등 전술기 제작경험은 있지만, 비즈니스 제트기를 활용한 특수목적기 관련 경험은 적었다.
여기에 1차 사업을 통해 대한항공과 관계를 맺은 닷소는 당초 KAI에 비즈니스 제트기를 제공하는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조종래 고정익사업그룹장(왼쪽)과 류광수 부사장(왼쪽 두번째)이 지난달 20일 닷소 측 관계자들과 닷소 항공기 지원 및 기술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KAI 제공
KAI는 대안으로 캐나다 봄바디어 비즈니스 제트기 등으로 눈을 돌렸지만, 군 당국이 후속 군수지원 효율화를 위해 2차 사업 플랫폼으로 1차 사업과 유사한 기종을 지정하면서 KAI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KAI는 플랫폼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임무 및 통신장비 성능은 양측 간 차이가 거의 없다. 닷소 비즈니스 제트기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향방이 달라지는 상황이었다.
KAI는 닷소와 다양한 경로로 접촉을 진행, 닷소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전사적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지난달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에서 닷소와 항공기 지원 및 기술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2차 사업 수주로 KAI는 고정익 분야에서 신(新)사업을 펼칠 기반을 마련했다. 정보수집 및 데이터링크, 통신, 암호 장비 등을 비즈니스 제트기에 체계통합한 경험은 국방중기계획에 포함된 합동이동표적 감시통제기, 전자전기 사업에 활용이 가능하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공개한 국산 수송기 상상도. KAI 제공
KAI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중인 해상초계기, 수송기 개발의 물꼬를 틀 수도 있다. KAI는 지난 5월 항공우주력 컨퍼런스에서 쌍발 제트엔진 수송기 국내 개발 계획을 제안했다. 수송기를 기반으로 해상초계기와 전자전기 등을 만들 수 있다는 게 KAI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항공전자장비를 기체에 통합하는 경험이 필수다. 현대 군용기는 전자제품이라 일컬을 정도로 전자장비 비중이 높다. 그만큼 체계통합이 복잡하다. 사전에 관련 경험을 축적한다면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고, 기술적 신뢰성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비즈니스 제트기를 이용한 조기경보기나 정찰기, 해상초계기 수요가 증가하는 세계 추세에 부응하는 수출용 기체를 만들 수도 있다.
민수 분야에서도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닷소에서 들여올 비즈니스 제트기는 신뢰성이 검증된 기체다.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에서 E-737 공중조기경보통제기가 성능개량을 받고 있다. KAI 제공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에서 P-3C 해상초계기들이 창정비를 받고 있다. KAI 제공
이 기체를 개조, 개량하는 작업은 세계 시장에서 사용되는 닷소 팰콘 계열 기체의 개조와 창정비에도 활용할 수 있다. 항공기 정비(MRO) 분야에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자체 개발한 수송기를 중형 여객기로 개량할 경우에도 유용하다. KAI가 이번 사업 수주를 위해 ‘총력전’을 펼친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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