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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서실과 다산 초당

우리둥지 2016. 9. 12. 14:33

                                                                        사촌서실(沙村書室)과 다산초당

  금년이 병신(丙申)년, 병신년 2월 22일(음력)에 세상을 떠난 다산이니 60년이 세 번째 돌아온 180주기를 맞았습니다. 그보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손암(巽庵) 정약전 선생은 돌아가신 2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천재 실학자 두 분이 세상을 떠난 특별한 해여서 금년도 실학유적지 답사 행사에서 우리 연구소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안고서 일에 임했습니다. 공개모집으로 스스로 참여한 40여 분들과 함께 남양주의 다산 묘소에 참배하고 출발하여 수원 화성을 살펴보고 행궁에 들려 지나간 역사를 더듬어보기도 했습니다. 지난 8월 25일(목)부터 27일(토)까지 2박 3일 일정이었습니다.

  수원에서 안산으로 내려오며 성호 이익 선생의 기념관과 묘소를 살폈고, 일로 남하하여 전북 부안의 반계서당에 올라가 반계 유형원 선생의 유적지를 살피고, 26권 13책의 방대한 저서 『반계수록』이 저작된 그곳, 그 땅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폭염에도 우리 일행은 전혀 굽히지 않고 반계·성호·다산이라는 조선 실학의 3대 거장들에 대한 유적과 업적을 살피느라 땀을 닦을 겨를도 아까워했을 뿐입니다.

  목포에서 1박한 우리는 쾌속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적지에 올랐습니다. 푸르다 검어버린 흑산도, 산비탈에 외롭고 쓸쓸한 ‘사촌서실’, 바로 손암이 유배살면서 연구하고 학동들을 가르쳤으며, 나라의 보물인 어족에 대한 분류로 이름 높은 『현산어보』가 저작된 역사의 땅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척박한 그곳, 배고픔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바다에서 자라는 물고기 226종의 어족을 조선에서는 최초로 연구하고 분류한 그런 독창적인 위업을 이룩한 그곳에 서서 우리는 다산초당에서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다산과 손암의 학자적 고뇌에 머리 숙여 묵념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손암과 다산, 동급의 진보주의자, 동급의 학문 수준, 같은 신세의 유배살이, 그들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동포(同胞)이자 평생의 형제지기였습니다. 손암은 16년째에 해배되지 못하고 그곳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고, 다산은 18년째에 해배되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200년 전의 그런 미개한 시대에 그런 벽지이고 가난한 곳에서, 천신만고의 고난을 감뇌하면서 천고의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그 두 형제, 그들의 고난이 얽힌 그 땅에 서서, 오늘의 학자들은 얼마나 편한 문명의 이기 아래서도 얼마나 게으르게 공부하지 않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위대함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는 학문을 연구하여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상의를 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라고 손암의 부음을 들은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말입니다. 학자 형님을 잃은 학자 아우의 탄식에 우리 모두도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우 다산의 학문적 업적에 탄복을 금치 못하던 손암, “미용(美庸:다산의 字)이 뜻을 얻지 못한 것은 곧 그 자신에 있어서 다행한 일이요 우리 유학계에 있어서 다행일 뿐만이 아니다”(손암이 지은 『周易心箋』의 서문)라고 벼슬을 박탈당하고 유배살면서 이룩한 학문적 업적에 그러한 칭찬을 했으니 형은 분명히 아우의 지기였습니다. 그들 형제가 아픔과 고통을 우애로 극복하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 ‘사촌서실’ 앞에 서있던 우리는 망망대해 방향으로 ‘다산초당’을 바라보며 서로의 지기이던 그들 형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