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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자의 생애

우리둥지 2016. 9. 6. 18:02

공자의 생애

 

 

공자의 생애

불기 : 부처님 열반을 기준으로 원년( 불기 1년 )으로 삼는다.

올해가 불기 2558년이므로, 탄생기원은 2558(불기) - 2014(서기) = BC 544년 + 79년 = BC 623년이다.

이 출생년도는 공자의 출생연도인 BC 552년도 무려 71년이나 앞선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은인(殷人)이라고 기록하면서 성을 '자'씨라고 하지만 민공의 6세손에 이르러 따로 족성을 가지게 되어 '공'씨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공씨 후손이 즉 공자의 고조할아버지인 방숙이 노나라로 망명하여 백하를 낳고, 백하는 홀을 낳고, 홀은 공자를 낳은 것이다.

홀은 본처인 시씨에게서 제대로 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는다. 그러니까 공자는 결혼관계에 의해 태어난 적자가 아닌 것이다. 어쨌든 공자가 태어난지 3년만에 아버지 홀이 죽고, 그 뒤 어머니 징재가 죽었다. 공자는 어머니가 아버지 묘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 아버지의 존재를 잘 몰랐으나 마을의 노파에게서 아버지 묘에 대해 듣고 가매장했던 어머니의 묘를 아버지 묘소에 합장했다.

이렇게 공자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양친을 잃고 생계를 위해 창고관리인 노릇을 하고, 가축관리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일을 현명하게 처리했고 그 덕분에 노나라 사공(농산부 국장쯤 되는 벼슬)이라는 공적인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 때 공자는 정치에 뜻을 품고 고국 노나라를 떠나 제, 송, 위,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예(禮)를 탐구하려고 했다. 예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역사, 정치, 사회, 윤리, 도덕, 예술 등 각 방면에 관심을 쏟아야 했고, 이 광범위한 지식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울 수 없었다. 공자는 문인(門人)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로 가서 옛 의례를 연구했다. 공자는 여기서 주나라의 주공의 덕치에 큰 감명을 받고 그를 평생 마음에 두었다. 또한 노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공자가 주나라를 떠나려 하자 노자는 그에게

"부유한 자는 금전을 주고, 친절한 자는 충고를 보낸다고 나는 듣고 있다. 재기가 넘치고 추리력이 풍부한 자는 흔히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을 비평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있고, 책 읽기를 즐기며 논쟁을 잘하는 자는 몸을 위태롭게 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결점을 꼬집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다만 한 사람의 아들이나 한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 공자의 나이 30도 안 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이미 이 때 공자는 알만한 이는 다 알 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이 때는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전쟁을 일삼고 있을 때다.(춘추시대) 이 때 여러 나라의 제후들이 그에게 상담을 의뢰해 와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제 나라 악기의 장인 태사를 만나 그와 음악을 논하고 '소(韶)'라는 악기를 배우느라 석 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 그 때 제나라의 경공이

"선정(善政)이 무엇이요?"

라고 물으니 공자는

"국비를 절약하는 데 있다."

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공자는 큰 호응을 얻고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자 제나라의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여 추방을 모의하게 된다. 공자는 이를 알고 제나라를 떠나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42세가 된 공자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역사와 음악에 관련된 책을 편찬했다. 50세가 된 공자가 학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이에 노나라의 제후인 정공이 공자를 등용하게 된다. 처음엔 중도라는 고을 장관직을 수여하고, 그 후 대사구(사법대신)로 등용한다. 그 후에는 재상의 일까지 하게 되어 노나라는 점차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웃나라에서 처녀 80여 명과 치장을 한 말 120여 필을 바치는데 정공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웃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재상인 계환자의 짓이었다. 계환자는 정공을 무도의 길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를 탄식하며

"저 계집의 입이여, 앞날이 걱정일세.

저 계집의 꼬임이여, 사람 운명 망치리.

가리로다 가리로다, 나는 떠나가리로다.

시름 걱정 다 버리고 한평생 즐겨나 볼까.'

라는 노래를 부르며 노나라를 떠났다.

그 뒤 공자는 위, 송, 진, 채, 초, 조, 정 등 여러 나라를 14년 동안이나 유랑하며 갖은 고생과 억울한 일을 당했다. 공자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고, 자기의 말대로 천하를 통치해 줄 사람을 기다렸다. 즉 주유천하를 하면서 덕치(德治)를 실현할 군주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공자의 이상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부국강병이란 미명 아래 서로 물어뜯고 뜯기는 상황을 보매 참으로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결국 공자는 천하철환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 등의 문헌 정리에 몰두했다. 공자는 말했다.

"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새를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내가 이룩하려는 모든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높은 이상에 이르는 일이다."

공자는 BC479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19세에 을관씨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이'를 낳았는데 이는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이가 낳은 아들은 급인데 자는 '자사'이다. 자사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중용'을 지었으며 맹자에게 공자의 유학을 전승했다.


주님의 평강이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브라질 아마존 마나우스에서 안드레 홍


 

출처 : 유집(宥集)
글쓴이 : 가락송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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