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야기♧

지리산의 봄

우리둥지 2011. 4. 22. 08:14

지리산의 봄
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비 온 다음날이라 콸콸대고 흐르는 계곡물은 맑고 차다. 이따금씩 연분홍 진달래도 바위 틈서리에서 고개를 내민다. 산비탈 곳곳에 토종벌 벌통들이 늘어서 있건만 웬일인지 벌들의 잉잉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칠선계곡 벽송사 옆구리에 붙은 광점 마을에서 출발한지 1시간도 안 되어 우리는 어름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집주인 임대봉씨 일가족과 만났다.

겨우내 비워 둔 산중의 외딴집으로 다시 올라온 임씨는 아들이 지게에 지고 온 발전기를 설치하고, 부인은 집안 곳곳을 청소하며 봄맞이 준비에 부산하다. 그러나 임씨는 낯선 사람들의 내방이 별로 달갑지 않은지 뭔가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다. 지리산 허공달골에서 20여 년간 토종벌을 키워온 그는 지난해 낭충봉아부패병으로 2백여 통의 벌을 몽땅 잃었다. 올봄에 어렵사리 8통의 토종벌을 구해왔으나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벌들이 죽어나가는 통에 아예 체념한 상태다.

벌통에 벌들이 없다

낭충봉아부패병은 꿀벌의 유충에서 발생하는 질병으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유충이 번데기가 되지 못하고 말라 죽게 된다. 이 바이러스는 서양 벌과 달리 토종벌에 특히 치명적이다. 정부는 작년 말에 낭충봉아부패병을 법정가축전염병 2종으로 지정했으나 아직까지 치료법과 백신은커녕 발병 원인도 밝혀내지 못했다.

임씨는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에 오른 손목이 잘린 후 허공달골에 들어와 이웃마을의 벙어리 처녀와 결혼하여 토담집을 짓고 토종벌을 키우며 살아왔다. 그동안 토종꿀을 팔아 자식 공부도 시키고 남부럽지 않게 살만하게 되었는데, 난데없는 바이러스 돌림병 때문에 토종벌들이 몰사 죽음을 당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참나무를 베어 버섯 종균을 심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아내와 올해 농업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토종꿀만큼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고 그저 심심파적으로 하는 일이다.

작년과 올봄에 전국의 토종벌 농가의 90%가 꿀벌 집단폐사의 피해를 당했지만 구제역 파동에 묻혀 그 심각성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국내 양봉시장의 30%를 차지하는 토종벌이 집단 폐사하면서 임씨처럼 피해를 입은 양봉농민들이 집단항의 하는 일도 벌어졌다. 전남 구례군 한봉협회 회원 50여명은 작년 10월 구례읍 문척교 아래 섬진강 둔치에서 감염된 벌통을 불태우며 토종벌 농가에 대한 가축재해 인정과 함께 백신개발을 요구했다.

허기야 우리나라의 토종벌뿐만 아니라 전 세계 벌꿀들의 개체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1990년대 말부터 미국과 유럽의 꿀벌들이 줄어들더니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지역에서도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가 많고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는 사람 손으로 직접 꽃가루받이를 한다지만 다른 곳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국제적인 환경기구인 유엔환경기획(UNEP)은 최근 전 세계적인 꿀벌 감소 현상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꿀벌의 멸종 현상이 가속화할 경우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과일과 곡물의 열매 맺기가 힘들어져 결국은 식량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살충제와 농약, 공기오염, 서식지 파괴가 이런 환경재앙의 원인으로 거론되는데, 최근에는 급속히 늘어난 휴대전화의 전파 때문에 벌들의 감각기관이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지리산 산등성이 곳곳에도 이동통신 중계 탑이 솟아 있고, 우리 같은 등산객들도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니 이를 어쩔 것인가.

‘오염 덩어리’, ‘욕심 덩어리’인 인간이 산에 드니

강영환 시인의 말대로 산에 가는 사람들은 흔히 마음을 비우러 간다고 말하지만, 실은 “조금씩 써버려 닳아 못 쓰게 된/ 야성을 채우러 가”는 지도 모른다. 뭉쳐진 오염 덩어리인 인간은 “마음 속 찌꺼기를 내어 산을 오염시키”고 “더 채울 것이 없어질 때까지/ 욕심 덩어리를 눌러 다지고 다져서” 눈과 발과 손으로 풀과 나무와 돌과 맑은 물을 마구 퍼 담는 환경파괴의 원흉이 아닌가. (이상 강영환, ‘산에 드는 이유. 광점동’에서 인용)

정말 지리산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면 지리산을 찾지 않고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시인의 자의식은 아름답고도 애틋하다. 그렇다고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지리산을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저 조심조심 아껴가며 즐기고 누릴 수밖에.

우리는 5월 중순까지 산불방지를 위해 입산이 통제된 임씨 집 옆의 등산로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 하산 길에 올랐다. 오는 길은 오도재를 넘어 함양으로 가는 노선을 택했다. 고개 중턱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한 전망도 좋고, 함양 상림을 한 시간 남짓 걷는 맛도 일품이다.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인월 양조장의 막걸리와 함양 시장 안에 있는 병곡식당 피순대는 놓치기 아까운 지리산의 별미다.

혹시 혼자서 호젓하게 지리산을 찾는다면, 시집 몇 권을 배낭에 담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산청 출신인 강영환 시인의 지리산 삼부작 『불무장등』, 『벽소령』, 『그리운 치밭목』은 지리산에 매혹된 산꾼의 산행일기다. 쉬엄쉬엄 걷다가 쉴 참에 시집을 읽으며 등산지도를 보는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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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