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한 수의 실착
금장태(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다산(茶山 丁若鏞)은 34세때(1795) 겨울 서학(西學)문제에 얽혀 반대파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정3품인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종6품인 충청도 금정역(金井驛: 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퇴계집』(退溪集)을 얻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면 퇴계의 편지 한편씩을 읽고 나서 공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나서 낮에 한가한 틈을 내어 새벽에 읽었던 퇴계의 편지에 대한 소감을 33일 동안 기록해 갔다. 이 저술이 바로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다. 퇴계를 사숙(私淑)한다는 저술의 제목처럼 이때 다산은 퇴계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학문과 인격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66세때(명종 21년, 1566) 물러나기를 힘쓰는 그에게 관직에 나오기를 간곡히 권유하는 참판 박순(思菴 朴淳)의 편지를 받고서 자신이 우둔하고 재주가 졸렬하며 병은 깊고 노쇠하였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갈 수 없음을 자세하게 해명하는 답장을 하였다. 이 답장에서 퇴계는 박순에게, “어찌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의 헛수를 두면 전판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기묘년(1519) 영수(領袖: 趙光祖)가 도(道)를 배웠으나 아직 완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자, 성급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스스로 담당하였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 다산은 퇴계의 편지에서 바로 이 구절을 끌어내어 음미하면서, “이 한 문단은 그야말로 선생이 평생 동안 이에 말미암아 나아가고 물러남(出處)을 그렇게 하였던 대목이다”라고 밝혔다.
부족한 사람이 소신만으로 섣불리 정치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큰 포부를 지닌 지식인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얻었을 때, 과감히 나아가 환난을 헤아리지 않고 신명을 다해 자신의 포부를 펼치는 것이 옳은지, 그래도 자신의 역량을 다시 돌아보고 성찰하여 물러나서 더욱 ‘도’를 닦기에 정진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포부가 아무리 정대하더라도 대책이 미숙하면 일을 그르칠 수가 있다.
한 판의 바둑에서 형세를 잘 운영해가다가도 한 수를 실착하여 헛수를 두면 그것이 패착이 되어 전판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니, 퇴계의 말처럼 “한 수의 헛수를 두면 전판이 다 무너진다”(一手虛著, 全局皆敗)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어디서든지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실착이 바둑판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모든 사업이 한순간 잘못판단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수도 있고, 정치의 판국에서도 정책결정 한 번 잘못하거나 발언 한마디 잘못하여 뿌리째 흔들리고 뒤집어지는 수도 허다하게 있는 일이다. 그러니 형세를 환히 내다보는 안목과 온갖 변수에 대응하는 지략의 내공을 쌓지 못했는데도 섣부르게 도전하고 나서면 언제 한 수의 실착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생전이 걸린 정치에 소신만 가지고 섣불리 나섰다가 한 번 실패하면 바둑판에서 한 번 지는 것과는 견줄 수 없는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게 되니 어찌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실착이 나올까봐 두려워 바둑을 두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요, 실패할까 두려워 정치현실의 모순을 방관하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 앞에서 가던 수레가 뒤집어지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수레를 몰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겠지만, 역사 속에서 앞 사람의 실패와 문제를 면밀하게 살피고 용의주도하게 대책을 세워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역사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명종 말년은 그동안 정권을 농단하던 외척세력이 무너지고 선비들이 정치를 담당하는 시기로 이른바 ‘사림(士林)정치시대’라 일컬어지는 시국이었는데도, 퇴계는 조광조가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태도를 지켰지만, 당시의 선비들은 새로운 기회를 맞아 희망에 들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자 이상정치(至治)를 실현하겠다고 나서서 선비들을 끌어들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중종의 철퇴를 맞아 그 자신과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광조의 선례를 출처(出處)의 경계로 삼다
다산은 “선생이 바야흐로 정암(靜庵 趙光祖)을 경계로 삼은 것이다. 비록 임금께서 옆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고, 공경(公卿)이 홀(笏)을 들고 바라고, 도성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맞이한들 선생이 어찌 오래 머무르고 지체하여, 임금의 뜻이 혹시라도 싫어하고 소인들이 그 틈을 타서 여지없이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려 하였겠는가”라 하여, 퇴계의 물러나려는 소극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
벼슬길에 나가려는 무리들이 모두 조광조와 같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의리를 명분으로 내걸고서도 속마음에는 권세와 이권을 쫓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산은 “예로부터 진출하기를 탐내어 싫어함이 없는 무리는 임금이 바야흐로 미워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아첨하여 용납 받으려 하고, 조정에서 바야흐로 참소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논박하여 나아가려 하고, 백성이 바야흐로 원망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임금을 속여서 지위를 굳히려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권세가 떠나가고 운수가 다하면 허물과 재앙이 아울러 일어나고, 영수(領袖)가 한번 패망하면 부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하여, 벼슬에 나오려는 지식인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이렇게 나와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인지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다.
다산 자신이 정조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정치현실의 전면에 나갔을 때, 선비라는 지식인들의 행태와 속마음을 속속들이 목격하였으며,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시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에 걸리고 온갖 장애에 부딪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는지 절실하게 경험하였기 때문에 퇴계가 물러나려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간교한 자들의 중상모략을 받아 언제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마련하였다 하더라도, 언제 어떤 돌변의 상황이 벌어져 계획이 파탄에 빠질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산은 “명목없는 죄안(罪案)은 아홉 번 죽어도 밝히기 어렵고, 뜻하지 않은 변고는 천리 밖에서 모여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7척(尺)의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도하게 잇달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자신이 반대파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야 했던 절실한 경험에서 우러나는 현실의 위태로움을 토로하고 있는 말이다.
시대에 따라 나아가 도를 실현하거나 물러나 인재교육을
다산은 현실정치에서 깊은 좌절감을 겪으면서 퇴계처럼 물러나 살고 싶은 뜻을 가졌던 것 같다. “한 구역 숲 속에 은거할 땅을 얻어서 배회 소요하며, 조정에서는 남들 따라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며, 일체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나, 성공과 실패나 옳고 그름이나 영예와 치욕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각각에 맡겨버리고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써 내 타고난 천성을 보전한다면 아마도 퇴계의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 자신의 심정을 퇴계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퇴계가 물러나고자 한 뜻이 어찌 지혜롭게 처신하여 타고난 천성을 보전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데 있었겠는가? 선비가 세상에 나서 큰 뜻을 품었을 때는, 다행히 시대를 만나 포부를 펼 수 있으면 나아가 한 시대에 ‘도’를 실현하여 이상사회를 이루는 것이요, 불행히 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진리를 밝혀 백대이후를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 퇴계가 그저 물러나 일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위해 ‘도’를 밝히고 인재를 교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임은 다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굴원(屈原)의『어부사』 (漁父辭)에서 강직한 지조로 나라를 근심하는 굴원(屈原)을 조롱하면서 어부가 “세상 사람이 모두 혼탁하거든 어찌 같이 진흙탕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든 어찌 같이 그 술지개미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산이 조정에서 지조 없이 남들 따라 나아갔다가 물러났다 하고, 시비와 득실에 대한 논쟁에는 외면하겠다고 말했으랴. 그것은 다산 자신이 부딪친 현실의 처지가 너무 답답하여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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