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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화성, 위기에 처하다.

우리둥지 2008. 10. 29. 11:26

세계문화유산 화성, 위기에 처하다


김 준 혁(수원시 학예연구사)


1925년 대홍수가 전국을 강타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수원도 예외일 수 없어 수원천은 홍수를 피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성곽 문화의 꽃으로 평가받는 화성의 중심에 흐르는 버드내(수원천)에 건립한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이 이 대홍수로 파괴됐다. 아름다운 무지개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화홍문은 버드내 양쪽을 연결해주는 교량의 역할과 누각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쉼터의 역할을 했던 소중한 시설물이었다. 특히 이곳의 누각은 정조의 명에 의해 양반과 평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었던 평화와 평등의 건물이기도 했다. 더구나 1906년 대한제국의 국폐에 상징도안으로까지 등장했으니 화홍문은 가히 조선 건축물의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를 지닌 화홍문이 수마(水魔)에 의해 누각이 떠내려가고 석축 일부가 유실되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정조가 화성을 완공한 지 126년 만에 일어난 슬픈 역사였다.

 

홍수 속에 건져낸 글씨, 지역민 정성으로 복원한 화홍문


당시 화홍문이 붕괴되는 순간에 사람들은 편액을 먼저 걷어내었다. 지난 숭례문 화재 사건 당시 건물이 붕괴되기 전에 편액을 건져 내어 500여년 전에 썼던 양녕대군의 글씨를 살려내었듯이 귀하고도 귀한 화홍문 편액을 살려낸 것이다.

 

화홍문 편액은 정조시대 최고의 명필로 평가받았던 유한지라고 하는 분이 쓴 글씨였다. 전서에 아주 능했던 유한지 선생님은 광교산으로부터 흘려 내려오는 장쾌한 물줄기가 화홍문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닥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글씨로 형상화하였다. 처음 보는 이들은 무슨 글씨가 저렇게 이상하게 생겼을까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글쓴이의 의도를 알고나면 저마다 감탄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비록 편액을 구하기는 했지만 화홍문의 누각은 비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수원 사람들은 비통함에 머물지 않고 화홍문을 다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수원명소보존회’란 단체를 결성했다. 지금도 문화유산을 복원하고자 하는 인식이 부족한 게 현실인데 일제강점기 문화유산을 복원하기로 결정한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화홍문을 복원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다는 건 우리 문화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925년 지금의 매향학원의 전신인 ‘화성학원’ 설립자 차재윤을 중심으로 교장 홍사훈과 수원지역 기업인 그리고 수많은 수원 백성들이 돈을 모아 화홍문 복원에 주력했다. 즉 당시 교육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꾀하던 이들이 정조의 개혁의지와 민본주의 정신이 담긴 화홍문을 복원하며 새로운 독립정신을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보존회를 결성한 그해 석축공사를 완성, 동과 서를 잇는 교량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그리고 계속 복원기금을 모아 마침내 1932년 5월 화홍문 누각을 완공했다. 이로써 화홍문은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됐다.

 

우리 역사상 지역 백성들이 돈을 모아 문화유산을 복원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단순한 문화유산 복원이 아닌 민족정기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쾌거였고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예견하는 새로운 걸음걸이였다. 이와 같은 화성의 복원 의지로 인해 1970년대 1차 화성복원의 결실이 이루어졌고 이후 1997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화성의 미복원 시설물들이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중건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노력으로 조선후기 진경문화의 상징이자 동서양 군사건축물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화성은 세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해마다 관광객이 두 배 이상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화성에 심각한 위기가 다가왔다. 경기도문화재보호조례의 개정으로 화성의 성곽에서 200m 벗어난 지점부터 높이 10층 미만의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성곽에서 500m안에 짓는 모든 건물들을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쳐 허가가 나도록 되었는데 이제 그 허가 대상이 200m 이내로 조정되었다. 화성만이 아니라 충청남도 역시 문화재보호조례를 개정하여 공주와 부여 등 고도(古都)안에 고층건물을 허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보전보다는 개발 논리가 더욱 앞서게 된 것이다.

 

수원화성, 건물 숲에 잠기고 말 것인가


물론 전 세계 모든 문화유산 도시가 개발과 보전이라는 이름아래 고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개발이냐 보전이냐를 놓고 서로간에 의견 충돌이 아나타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유산이 있는 도시간에 협의체를 구성하여 그 안에서 전문가와 시민들 그리고 관료들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문화유산 보전과 도시개발에 대한 고민을 토론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협의체에서 개발을 추구하는 주체와 보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주체들을 조율하여 서로간에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조정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유럽과도 같은 협의체 구성도 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문화유산의 가치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자본의 이익이 중요한 세상으로 더욱 커나가고 있다. 이러한 가치 의 변화로 인해 정조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성을 보전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화성을 중심으로 성곽에서 200m밖의 건물들이 모두 10층 미만의 건물들로 가득찬다면 주변 경관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며 화성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품격은 한순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보고자 찾아오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의 숫자는 현저히 사라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네스코에서는 개발이라는 이유로 보전이 어려운 문화유산을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멀쩡한 문화유산이 어느 날 갑자기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으로 재등록 된다면 이는 그 문화유산의 가치 하락만이 아닌 국가 전체의 신인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화성이 그러한 암울한 현실까지 가지 않겠지만 만약 주변에 고층 빌딩으로 가득차서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으로 분류된다면 이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화성을 보전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오늘날 우리들의 작은 이익 때문에 화성에 문제가 생긴다면 죽어서도 정조와 다산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시민 그리고 문화유산 전문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김준혁

· 수원시 학예연구사(정조시대 정치사 전공)

· 경기광역 실천인문학 교수

· 저서: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여유당, 2008)

        <정조 - 이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웅진 싱크하우스, 2007)

        <정조의 꿈이 담긴 조선의 최초의 신도시, 수원 화성>(해피북스, 2006)

        <수원화성>(스쿨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