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현실이다. 체험한 과거는 꿈을 통해 현실이 된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왜 내가 지금 여기 있지. 난 분명히 칠순이 넘었는데 왜 16세 소년이 되어 피난길 전쟁터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가.
허망한 꿈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은 과거의 현실이었고 나는 지금 과거의 현실에서 겁에 질려 있는 것이다.
주인이 피난을 떠난 농촌의 빈 초가 집. 피난길 하룻밤 자기 위해 머문 집에는 또 다른 피난민들이 있었다.
젊은 여인이 출산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전쟁에 나가고 늙은 시어머니가 쩔쩔 매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출산을 한 것이다.
다음 날, 다시 피난길을 떠나는 산모에게 아기는 없었다. 아기는 사망했다. 죽은 이유는 모른다. 어디다 묻을 것인가. 1월의 꽁꽁 언 땅을 팔수도 없다.
죽은 아기는 그냥 언 땅에 버려졌다. 창백한 산모는 울지도 못했다. 울 기력도 없었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1951년 이른바 1.4후퇴라는 피난길,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의 한 농가에서 생긴 비극이다. 16세 소년은 지금도 산모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한다.
길가에는 시체들이 보였다. 노인과 어린애들.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군인을 실은 후퇴트럭들이 줄을 잇는다. 피를 흘리는 부상병들이 트럭바닥에 누워 있다. 그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고 살아났을까.
안성에서 군인이 나와 형을 데려갔다. 참호를 파란다. 많은 피난민들이 땅을 파고 있다. 언 땅을 팠다. 대포소리가 옆에서 들린다.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돈다. 겁이 난다. 열심히 땅을 팠다.
충북 진천에서다. 흉흉한 소문이 돈다. 여자들을 군인들이 겁탈한다는 것이다. 누나가 있었다. 숯검정을 얼굴에 처발랐다. 머리는 산발을 했다. 대한민국의 귀한 딸들은 그렇게 몸을 지켰다. 그게 전쟁이었다.
1950년 6월25일은 한국전쟁이 터진 날이다. 왜 나는 끔찍한 이 날을 기억하고 소름끼치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가.
무섭기 때문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다시 전쟁이 나면 자살하겠다고 말씀 하셨다. 다시는 그 고생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해한다. 자식들 죽 한 술 더 먹이려고 어머니는 늘 굶으셨다.
나는 다행이다. 살만큼 살았으니까. 그러나 내 자식들, 내 손주 새끼들은 어쩐단 말인가. 전쟁을 생각하면 살이 떨린다.
6월25일, 북괴군이 3.8선에서 침범했다고 했다. 군인을 실은 트럭이 미아리고개를 넘어 갔다. 수도 없이 넘어갔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 볼 때에.” 위장망을 한 채 ‘진군가’를 씩씩하게 부르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간 국군은 해가 지기도 전에 피투성이가 되어 미아리 고개로 넘어왔다. 트럭에는 부상병과 전사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
그 때 이승만은 이미 고관대작들과 대전에 피난을 가 있었다.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다. 그들의 자식들은 전쟁 중 미국으로 도망쳤다. 좋은 대학 다니고 전쟁 끝나자 귀국해 지금도 좋은 자리에서 떵떵 거린다.
서울시민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 피난가지 말라는 약속은 국가 통치권자의 약속이다. 국군최고사령관의 약속이다.
군 수뇌부도 그랬다. 전쟁이 나면 평양에서 점심 먹고 저녁에는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다.”
이승만이 사수한다던 서울은 전쟁이 터진지 꼭 3일7시간30분만에 점령됐다. 정부의 말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던 서울시민은 고스란히 갇혔다. 9.28 수복 후 ‘비도강파’로 몰려 빨갱이가 됐다. 적지에 국민을 유기한 이승만 정부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16세 소년은 전쟁을 우습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 전쟁놀이는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탕 탕 드르륵! 입으로 총소리를 내면 으윽 하고 죽은 척 쓰러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전쟁놀이. 그러나 6.25전쟁은 놀이가 아니었다.
배가 고팠다. 죽도록 배가 고팠다. 쌀밥을 먹다가 보리밥을 먹다가 보리죽을 먹다가 하루 두 끼를 먹다가 한 끼로 줄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먹는 것이었다.
누나의 혼수로 장만한 비단치마 감을 들고 농촌에 내려가 보리쌀과 바꿨다. 손재봉틀 머리만 떼어다가 보리쌀과 바꿨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부르지도 않은 친척집을 찾아가 눈치 밥을 얻어먹었다. 반찬을 넣을 사이도 없이 그냥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초근목피를 그 때 겪었다. 이 설음 저 설음 해도 배고픈 설음이 제일 큰 설음이다.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은 못하랴. 그게 6.25 전쟁이었다. 농촌에서 구한 보리쌀을 새끼줄 멜빵으로 등에 지고 서울로 올라온다. 지금의 판교 분당쯤인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이었다.
소리도 없이 산등을 타고 날라 온 ‘미국제 무스탕전투기’가 달려든다. 기총소사를 한다. 논두렁에 코를 박고 엎어진다..
잠시 후 일어 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지옥이었다. 피투성이 피난민의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달구지를 끌고 가던 소도 쓰러져 죽었다.
이제 시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체를 겁내지 않는 16세의 소년. 시체 옆에서 보리 주먹밥을 게걸스럽게 먹는 소년, 그게 바로 나였고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도처에 유엔군이 주둔했다. 전쟁과 사랑. 그것도 사랑인가. 아니 전쟁과 섹스. 부모 친척 다 잃고 먹고 살 밑천은 몸 밖에 없던 우리의 예쁜 딸들은 이름도 아름다운 양공주가 됐다.
미군 철조망 근처에는 할 줄도 모르는 영어로 ‘핼로야’를 외치는 우리의 딸들이 창백한 얼굴로 껌을 씹고 있었다.
양공주와 전쟁고아,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었다. 피난살이 끝내고 돌아 온 서울은 폐허였다. 전차길이 끊기고 길에는 끊어진 전선줄이 거미줄처럼 널려있었다. 시민의 얼굴은 굶주린 해골이었다.
복교를 하니 학우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무개는 의용군으로 끌려 나가 죽었다. 누구는 북으로 갔다. 빈자리가 많았다. 대한민국의 빈자리는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도대체 이 저주받은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9,28 수복 때 사적감정이 있는 사람을 지적하며 ‘저 자식 빨갱이’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했다.
일가친척들의 소식도 들어왔다. 외삼촌이 남북 됐다. 형님도 행방불명, 사촌매부는 폭격에 죽었다. 조카들은 염병으로 죽었다.
코미디도 있었다. 휴전반대 데모다. 고등학생인 우리는 휴전반대 데모를 했다. 서대문 ‘도요다아파트’는 외국종국기자들이 많이 묵었다. 그 앞에서 데모를 한다. 정부에서 시킨 관제데모였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렇게 휴전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이 인상을 써 가면서 혈서를 쓴다. 역시 강제다.<휴전반대, 북진통일>. 지나가던 군인이 내 뱉는다. “이 새끼들아! 네 놈들이 나가 싸워.”
이게 한국 전쟁이었다. 동네에 미군을 위한 댄스홀이 있었다. 장때같은 흑인병사 품에 매달려 춤을 추는 이 땅의 불쌍한 ‘순이’들.
그 때는 눈물을 몰랐다. 눈물을 잃어버린 인간, 그것이 바로 전쟁의 산물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전쟁은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목숨을 삼켰을까. 맞는지는 몰라도 기록이 있다.
[ 민간인의 인명피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