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는 옛말이 왜 이렇게 절실하게만 생각될까요. 세상이 참으로 어지럽고 소란하여 안정되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조선왕조 5백년을 되돌아보면 나라가 어렵고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그래도 어진 재상이나 대신(大臣)이 있어 정책도 제대로 건의하고 인재도 제대로 추천하여 국난을 극복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24년의 재위로 서거했던 정조대왕, 어렵고 힘들게 왕위에 올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한 뒤, 노론 벽파의 강고한 세도를 조금씩 약화시킨 뒤, 본격적인 인재등용을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유능한 남인계 벼슬아치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정조의 치세를 보필합니다. 정조 16년 31세이던 다산 정약용은 벼슬아치라면 모두가 희망하던 홍문관의 학사(學士)에 오릅니다. 홍문관 수찬(修撰)에 제수되었으니 이제는 임금을 보필할 지위에 오른 셈입니다. 그 전 해에 사간원의 정언(正言)에 임명되고 바로 이어 사헌부의 지평(持平)이 되었으니, 이제 삼사(三司)를 드나들며 온갖 국사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미 재상의 지위에는 번암 채제공이 있었고 이가환과 이익운 등의 남인도 영감(令監)의 지위에 올라 이들의 의견과 추천에 정조는 귀를 기울이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정조는 채제공에게 남인 가운데 급히 대관(臺官 : 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에 올라야 할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면서 이가환·이익운·정약용과 논의해서 빨리 추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남인으로는 겨우 한 차례에 1명 정도 대통(臺通 : 대관에 오름)이 되는데, 정약용이 28인을 추천하자 한 차례에 8인이 대통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들 28인 모두가 대통되었다는 다산의 기록이 있습니다. 나라를 개혁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옳은 인재를 등용하여 바른 정책을 펴야 합니다.
총리나 장관이 예전으로는 재상이자 대신인데, 그런 인재 추천을 하고 있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개명한 시대에 정조 같은 지도자는 없으며 채제공이나 다산 같은 추천인은 없다는 것입니까. 세상은 지금 한창 인적쇄신만 요구하는데, 왜 그런 재상도 없고 추천하는 일도 없는가요. 믿어주게 추천하고 믿고 등용하는 그런 인재 등용이 그립기만 합니다. 오늘에는 왜 채제공이 없을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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