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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유색인종인 최영길씨 가족의 호주이민은 아주 희귀한 사례여서 호주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특히 호주국영 abc-TV에서는 그를 직접 인터뷰해서 '금주의 인물'로 방영했는데, 최씨는 "그 때 받은 방송출연료 15달러가 호주에서 벌어들인 첫 소득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호주가 악명높았던 백호주의를 1973년에야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니, 최영길씨 가족은 아직도 백호주의 망령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에 호주 땅에 새롭게 정착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색인종을 배척하는 나라에서 굳이 제2의 인생을 도모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으로 인한 호주와의 운명적인 인연
또한 하루 뒤에는 호주공군 77비행중대 소속 무스탕전투기를 한국전에 투입했다. 바로 그 비행기가 세계 전쟁사에서 최초로 사용된 제트전투기로 한국인들은 그후 오랫동안 이 비행기를 '호주끼'라고 불렀다. 이어서 9월 28일에 호주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당도하게 되는데, 마침내 호주의 육해공군이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순간이었다. 제3대대는 UN군의 북진에 가담해 압록강을 목전에 둔 평북 박천까지 진격했다. 바로 그 기간에 16살의 최영길 소년이 운명적으로 제3대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해 11월 1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초대 3대대장이었던 찰리 그린 중령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한국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한국인 호주 공식이민 1호'가 된 최영길씨였다. 그러던 51년 4월 23일, 호주육군 제3대대는 '가평대대'로 거듭 태어나는 중요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경기도 가평지역에서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죽음으로 막아냈던 것. 그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후퇴하던 UN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재반격할 수 있도록 만든 전투여서, 나중에 '가평전투'라는 별칭으로 한국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제3대대는 가평전투를 통해 피아간 중요한 요충이었던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불리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공로로 트루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고, 그후 부대이름을 아예 '가평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평대대는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나서 호주로 돌아올 때, 가평지역에서 바위와 나무, 38선 콘크리트 모형 등을 가져와 제3대대 대대본부 앞에 설치해 놓아 대대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4월이 오면, 잊지 않고 내게 전화를 걸어주던 분이 있었다.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전화를 주신 분은 지난 4월 7일에 타계한 최영길씨였다. 전화로 나눈 대화의 내용도 매년 거의 비슷했다. "아주 귀한 자료들을 구했는데…. 한 번 읽어보겠어?" "그럼요, 읽어봐야지요. 그런데 어느 술청에서 뵐까요?" 최영길씨는 길모퉁이 퍼브를 즐겨 찾았다. 그는 늘 위스키 스트레이트 두 잔, 나는 흑맥주 두 잔이면 그만이었다. 정말 그랬다. 세월을 거꾸로 돌려보내놓고, 그 시절을 회상하는 데 알코올에 젖는 방법 말고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최씨는 매번 한국전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육군 제3대대와 관련된 자료들을 들고 나왔다. 그걸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해주던 최 회장은 어느새 50여 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게 왜 하필이면 4월이었을까? 그건 가평전투가 1951년 4월 22일부터 3일 동안 벌어졌고 호주의 현충일 격인 앤작 데이(ANZAC Day)가 4월 25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가평대대의 명예부대원이서 항상 부대에서 증정받은 붉은 베레모를 쓰고 행사에 참여했다. 그래서 최영길씨는 4월이 오면 늘 들떠있었고 바쁘게 움직였다. 참혹하기 그지 없었지만 호주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웠던 가평전투를 기리면서 한국과 호주의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기 위한 의욕이 컸기 때문이다. 해마다 4월이 오면, 하염없이 50여 년의 과거로 돌아가곤 했던 최영길씨. 그러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최영길씨는 지난 4월 7일 오전, 시드니 소재 갈보리병원에서 지병인 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유족으로 미망인 양회진 여사와 두 딸 순은, 순민씨 등을 남겼는데, 둘째 딸 순민씨는 호주에서 태어났다.
11일 오전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열린 최영길씨 영결식은 4백여 명의 한인동포와 호주인사들이 참석하여 한인회장으로 엄수됐다. 장례의식은 고인이 출석했던 구세군 시드니한인교회의 강정길 사관의 집례로 진행됐다. 다음은 조양훈 시드니한인회 사무총장이 소개한 고인의 약력이다. "1935년, 평안도 박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서울로 와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피난을 갔으나 할아버지가 중공군이나 북한군에 의해 징집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그 당시는 UN군이 북진을 하는 상황이라 패주하는 북한군을 피해서 산속으로 이동하느라 굶주린 상태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호주군 첨병에게 발견됐다. 그게 인연이 되어 최영길씨는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16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호주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청운중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연세대 고등상과에 입학, 1963년 졸업하고 한국철강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중 호주대사관을 찾아가 호주군 3대대 전우들을 찾는 것이 계기가 되어 호주로 이민을 떠나오게 됐다. 1968년 6월 20일, 부인 양희진씨와 함께 장녀 순은씨를 데리고 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그의 호주이민은 당시 호주사회에서도 빅뉴스로 받아들여졌다. 호주국영 ABC-TV가 '금주의 인물' 프로를 통해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고 SBS와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비롯한 신문 방송들도 앞 다투어 한국인의 첫 호주 이민을 보도했다. 최영길씨는 1968년부터 1991년까지 23년간 호주 콴타스 항공 기획실에 근무하면서 1990년 콴타스 항공의 한국 취항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항상 한국과 호주의 관계를 '혈맹'이라고 강조하면서 양국관계의 증진에 앞장서 왔다. 또한 1968년 초대 한인회 총무를 거쳐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제2,3,4대 및 6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인회의 기반을 다지는 등, 지난해 암 진단을 받기까지 거의 40년간 한인동포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한인사회의 대부'였다." 영결식장에서 유난히 슬퍼했던 호주 할머니
1950년 11월 1일, 찰리 그린 중령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중공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주는 최영길씨의 고향 박천에서 불과 몇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4개월만의 희생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이 당시 그린 중령의 나이 30세였고, 그의 아내 올윈 그린은 27세의 젊은 새댁이었다. 세살배기 외동딸 앤시아가 막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그린 여사의 유령 이야기(ghost story)가 시작되어, 재혼도 하지 않은 채로 죽은 남편과의 영적인 교류를 57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 "찰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가 보냈던 편지를 불태우기도 했고, 다른 일에 몰두해보기도 했어. 그러나 모든 게 허사였지. 그럴 때마다 찰리가 꿈속으로 찾아왔고 슬픈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 그린 여사는 찰리와의 끝없는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10여 년의 노력 끝에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사부곡'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에 최영길 소년의 얘기가 나온다. "최영길씨의 호주이민은 가평대대로의 귀대"
그럼에도 올윈 그린 여사는 최영길씨가 호주로 이민을 오자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나중에 최씨가 그린 중령의 딸을 위해서 장학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국경과 죽음을 뛰어넘는 귀한 인연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런 연유였을까. 올윈 그린 여사는 최영길씨 영결식에서 조사를 통해서 "최씨는 3대대에 발견된 지 며칠 만에 내 남편의 죽음을 보았고, 57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나는 그의 죽음을 보고 있다"면서 "마침내 하나의 원(circle)이 그려진 셈"이라고 말했다. 최영길씨의 고향에서 남편이 전사하고, 남편이 지휘하던 부대에서 3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호주로 귀환한 그 부대 전우들이 초청해서 이민을 떠나온 최씨가 호주땅에 묻히고 남편은 지금도 한국땅에 묻혀있는 것을 하나의 원으로 표현한 것. 올위 그린 여사는 "최영길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군의 최연소 군인이었고, 1년마다 교체되는 호주군인들과는 달리 휴전까지 근무했으니 가장 오랫동안 참전한 군인"이라면서 "그의 호주이민은 어떤 의미에서 가평대대로의 귀대"라고 말했다. 그린 여사는 거의 울먹이는 음성으로 "최영길씨를 통해서 수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얻었는데, 막상 그를 잃고 나니 시드니가 텅 빈 느낌이고 막막해진다"는 말로 조사를 마무리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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