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서노라는 인물은 참 흥미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의 어머니로서 많은 관심이 가더군요. 해서 이것저것 소서노 관련 기록들을 찾아봤는데 그녀의 일생을 종합해 보니 '비운의 여제'라는 표현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랄까요.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박복하다고나 할까요. 한 남자를 사랑했고 모든 걸 다 주었으며 배신당하고 그 자식들 마저 다툼이 있어 그 중간에 끼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 소서노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흔히 철의 여인하면 마가렛대처를 떠올리고 잔다르크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유관순, 논개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진정한 철의 여왕은 서기 2천년 전 우리역사에 존재했던 바로 이 여인.
먼저 드라마 주몽에서 나오는 내용 중 몇 가지 정정할 내용이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가 갖는 픽션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방송이 갖는 전파력을 생각할 때 역사물은 좀 더 진실에 가까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각있는 어른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고 자라나는 세대를 생각할 때 좀 더 사실에 입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1. 연상의 여인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이 소서노보다 살짝 연상틱하게 나오는데 사실 소서노와 주몽사이에는 8~10년 심하게는 15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소서노가 연상이죠. 주몽이 대소를 비롯한 부여왕자들로부터 도망쳐 졸본부여로 왔을 때 나이가 20 또는 21살 때라고 합니다. 참고로 졸본부여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게 맞습니다. 원래가 골본부여입니다. 고구려를 깎아 내리기 위해 중국 사관들이 그렇게 표현했고 신라출신이자 사대주의사상에 쩔은 김부식이 고구려 역사를 깎아 내리기 위해 '卒'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아무튼 주몽과 소서노의 관계는 드라마처럼 선남선녀의 만남은 아니었고 연상연하의 관계였다는 것은 정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더불어 이 둘의 만남을 흔히 과부와 유부남의 만남이라고들 표현하기도 하면서 도덕성을 문제삼는 분들도 계시던데...뭐 그럴 것 까지야.
2. 우태에 대하여
드라마에서 우태는 계류상단의 호위무사로 나옵니다만...이 분이 이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태라는 인물은 부여 해부루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른바 왕가의 자손이죠. 어쩌다 이 분이 일개 호위무사장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태라는 인물은 일찍 죽게되어 소서노를 과부로 만들게 되죠. 그런데 한 가지 논란인 되는 것이 우태가 죽기전에 비류와 온조를 낳았는지 비류만 낳았는지 아니면 아무도 낳지 않았는지가 정확치 않습니다.
3. 누구의 아들인가
드라마상으로 얼마 전 소서노가 임신 한 것으로 인해 인터넷이 좀 떠들썩 합니다. 비류와 온조가 누구의 아들인가라는 것인데 경우의 수가 이렀습니다. 비류와 온조가 전부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 온조만 아들이라는 설, 둘 다 아니라는 설이 있는데 비류,온조 둘 다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다수인 것 같습니다. 많은 기록들에도 주몽이 소서노를 만났을 때 이미 두 아들을 가진 과부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발 물러나 온조만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견해에 대해서 이런 반박이 있습니다. 훗날 예씨부인의 소생 유리가 찾아와서 왕위를 물려줍니다만 아무리 장자라 하더라도 친아들 온조를 제쳐두고 어느날 혜성같이 나타난 유리에게 물려 줄 수 있었겠냐는 견해입니다. 온조가 친아들인데다가 고구려 건국에 이바지한 소서노를 봐서라도 온조에게 왕위를 물려줬어야 할 텐데 주몽은 일언지하에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있어 토착세력들의 반대가 심했을 거라 생각이 들고 소서노의 로비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왕위계승을 강행한 것으로 봤을 때 이 때쯤 주몽과 소서노에게는 어떤 이유든 갈등의 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4. 소서노의 통찰력, 주몽에 대한 지나친 미화
드라마 주몽에서는 주몽이 다물군을 조직하여 한나라와 대항하고 연전연승을 거두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였을 때 옆에 있었던 것은 오이,마리,협부 딸랑 3명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를 따르는 몇몇의 무리는 있었겠지만 관련 자료들을 봤을 때 드라마와 같은 묘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며, 해모수가 어쩌고 떠들고 돌아다녔으니 졸본의 어느 누가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모두가 외면했을 때 주몽을 주시했던 것은 연타발과 소서노였습니다. 총명한 머리와 활솜씨, 20대 초반의 건장한 외모, 리더쉽 등 10살 연상의 누나가 마음을 빼낄만한 요소가 많았던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소서노와 주몽은 서로에게 연정을 느껴 결혼을 하게 되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양육했다고 나옵니다. 그 후 소서노는 철제무기 및 국가건립에 필요한 각종 재력지원 등 그 모든 걸 주몽에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과연 주몽이 드라마에서처럼 소서노를 사랑해서 결혼했겠는가, 또 소서노도 주몽을 사랑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정략적으로 결혼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소수부족이었던 계류에게 있어 강력한 지도자가 절실했었고, 주몽에게는 땅과 군사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맞아 떨어져 결혼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어째튼 딸랑 부하 세명 데리고 천손이라 자칭하는 주몽을 자신의 남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소서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통찰력과 혜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겠죠. 애 둘 딸린 과부가 20대 초반 남자와 재혼한다는 것이 지금도 좀...
김산호 화백의 철의 여왕 소서노 영정(우태 위국 소서노여제)
김산호 화백의 고주몽 성열제 영정(가우리시조 고추무 성열제)
5. 유리의 등장, 소서노의 고뇌
기원전 57년 주몽은 23살의 나이로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그 후 유리의 등장과 소서노 측이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것이 주몽나이 40세 소서노가 48~49세로 보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몽이 한 참 혈기왕성한 반면 소서노는 어느덧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고, 자신의 사후 비류와 온조의 위치를 걱정한 소서노는 주몽에게 태자책봉에 대한 요청을 수차례 하게 됩니다. 이 당시에 이미 소서노는 예씨부인과 유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주몽 역시 이 부분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소서노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유리가 오자마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예씨부인을 황후로 맞이한다고 합니다. 졸지에 소서노는 소후(小后), 제 2부인으로 밀려나게 되죠. 한 남자를 믿고 몸도 마음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소서노로서는 배신감과 실망으로 고뇌의 순간을 이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소서노의 박복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왜 소서노가 권력투쟁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국가기반의 대부분을 지원했고, 더욱이 자신의 지지세력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무엇이 두려워 두 왕자들을 데리고 남하했을까요.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당나라 측전무후같은 권세도 누릴 수 있었을텐데 왜 조용히 받아들였을까요. 이런저런 점을 생각해 본 결과...그냥 드라마에서처럼 정말 사랑했던 사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ㅡ,.ㅡ
6. 백제로의 망명, 비류와 온조의 대립
역시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소서노 나이 48~49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두 아들과 오간, 마려등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하를 합니다. 그 때 비류가 30세, 온조가 25세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들이 뒤를 따랐다고 하니 소서노의 세력을 직잠 할 수 있습니다. 서기 18년, 망명한지 13개월 만에 한강에 이르러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열명의 신하가 보좌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백제(백가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나라를 세움)로 국호를 변경하여 위례성에 정착하게 되죠.
이때 다시 한 번 소서노에게는 시련이 찾아옵니다. 위례성 도읍과 관련하여 비류가 뜻을 달리하여 미추홀(지금의 인천지역)로 분리를 하게 되고 온조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때 소서노도 비류와 뜻을 같이했다는 기록도 있고, 어떤 기록에는 온조와 같이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비류와 같이 했다는 기록이 더 우세한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훗날 비류가 세운 나라는 망하게 되고 온조의 백제가 융성하게 되죠.
농본사회였던 당시 비류가 선택한 미추홀은 소금기가 많아 경작이 어려웠고 재정의 어려움등으로 이어져 어떤 기록에는 비류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반면 온조는 지금의 올림픽공원의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경작기술을 보급하는 등 국력강화의 기초를 다졌다고 하는군요.
7. 소서노의 죽음
비류와 온조의 대립과 갈등이 깊어지고 어머니로서 둘을 화해시키고자 동분서주하던 소서노는 그 원인을 온조의 신하에게서 찾습니다. 오간과 마려 등이 비류와 온조사이를 이간시킨다고 판단한 소서노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13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왕도에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학자에 따라 여러해석이 있습니다만 소서노가 자신을 따르는 5장군들과 함께 이들 신하를 제거하기 위해 왕도에 들어갔다가 이를 눈치채고 준비한 신하들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경기도 구리시(남양주)와 하남시 일대에는 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우물가 전설이라고 합니다. 온조가 용이 되서 밤에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는데 어느날 온조가 용이되서 우물가로 들어가 없는사이에 소서노가 장군들을 이끌고 들어왔다가 시해를 당했다는 거죠.
그것을 본 온조가 다시는 용이 되지 않기로 했다는 뭐 그런 내용인데 이런 사실로 봐도 소서노는 정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할 수 있죠.백제의 온조...고구려의 시조 주몽...소서노라는 여걸...
일찍이 남편 우태를 여의고 아들 둘을 키우다가 주몽을 만나 모든 걸 다 주었지만 결국 배신아닌 배신을 당한 후 백제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소서노. 하지만 두 아들들의 불화와 어머니로서 이를 해결하고자 뛰어들었던 불 속에서 참담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 소서노의 삶입니다. 가히 여제(女帝)라 부르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철의 여인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녀의 삶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하기만 하군요.
국가를 두개씩이나 건국하고서도 빛을 보지 못했던 점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국정교과서에 나오기는 하는 걸까요.
삶 전체가 희생과 배신, 아픔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 어떤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드라마 보실 때 이런 점도 참고해서 보시면..한혜진씨가 더욱 불쌍해 보이실거에요. 아 눈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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