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소방조직
불은 인류 역사문명과 함께 지속되었다고도 볼수 있다. 최근에는 창경궁 문정전, 수원화성의 서장대 등 여러 문화재들이 화재로 피해를
입어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는 우리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화재시 어떤 방법으로 대처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수 없다. 역사 유물을 통하여 이미 신석기시대서부터 불을 사용하였음을 짐작 할수있다.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궁궐같은 대 건축물을 짓고 민가가 인접하여 지어지면서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등장한 삼국시대부터도시의 화재는 시작되었음을 알수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인구 집중형 도시가 되다보니 통일신라시대보다 화재가 발생빈도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별도의 금화(禁火)를 담당하는 국가조직은 없었으나 금화를 담당하는 관리를 배치하고 순찰활동을 강화하고 창고를 지하에 설치하고,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방화, 실화자를 엄히 처벌하는 조치가 있었다.
드므 : 궁궐 내 화재(화마)를 막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물을 담아
놓은 용기
이러한 화재 발생이 빈번하다보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7년 금화법령이 공포되고 이러한 법령을 뒷받침하기위하여 세종8년(1426. 2. 26) 도성안에 금화를 전담할 기관으로 금화도감을 설치하여 병조(兵曹)소속으로 발족시켰으니 오늘날의 소방기관의 모태가 되리라 본다.
당시 금화도감은 궁궐속 또는 민가에 있는 화약고의 교외 외곽이전 민가의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하여 기와지붕 설치 인접 세대간 방화담벽 설치, 행랑10칸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게하고 각 관청은 우물을 2개씩 파게하여 방화수를 확보토록 하게하는 등 왕명을 받아 활동 하였다.
【 창덕궁 낙선재 앞 우물 】
이 금화도감은 1426년 6월 19일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합병하여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 칭하고 공조(工曹)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 실수로 자기 집을 태운 사람은 장(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40대, 관가나 다른 사람의 집을 태운 사람은 장 50대, 불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는 장 100대의 형을 받았다. 일부러 집을 태운 경우 처벌이 더 무거웠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淸明)절에 전국의 관청과 대신들에게 불을 나눠주는 의식을 가졌다. "새 불로 새봄을 맞자"는 바람에서다. "새
불로 지금까지의 낡은 관행을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기존에 있던 불이 아닌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서로 문질러 새 불을 지펴
분배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은 파괴이자 창조인 것이다.
금화도감【禁火都監】
금화도감은 조선 전기에 한양을 건설한 후 화재가 빈발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1426년(세종 8)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요소에 우물을 파서 방화기구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던 관청이다.
제조(提調) 7명, 사(使) 5명, 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6명 도합 24명으로 구성했는데 제조 7명은 병조판서 · 의금부도제조 · 삼군의 도진무 · 군기감도제조 · 판한성부사가 겸임하고 사와 부사도 의금부제조 · 군기감판사 · 선공감판사 및 병조, 공조, 무비사의 정랑 · 한성부판관 등이 겸임하는 강력한 구성이었다. 이 금화도감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부서로는 소방방재청(消防防災廳)이 될 것이나 그 권한면에서나 조직면에서 금화도감은 훨씬 강한 조직체였으며 그 권한은 범인의 체포 · 구금, 소방을 위한 군사 및 민간인의 동원, 이재민구호, 화재시의 관련업무 전반을 종합적으로 관장한 점에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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