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둥지 이야기♧

[스크랩]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우리둥지 2005. 7. 15. 23:46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_ 경북 경주시 교동 69번지









만석꾼의 재력을 유지해온 한국의 대표적 명가이다.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지켜오는 여섯 가지 가훈이 있다.


- '과거를 보되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마라'


-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마라'


-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는 것은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데 만족하라는 삶의 지혜였다.


조선시대는 당쟁이 잦아 자칫 역적으로 지목되면 멸문지화를 당해


이같은 위험을 피하라는 것이다.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으로


최부잣집은 소작료를 낮춰 나머지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당시 소작료는 수확량의 70∼80%였는데 최부잣집은 50% 이하로 받아


소작인들이 앞다퉈 이 집 논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물 때는


1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부잣집은 1년 소작 수입인 쌀 3천석 가운데


1천석을 과객 접대에 사용했고 1천석을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 돕기에 썼다고 한다.



'흉년에 논 사지 마라' 부자들에게 흉년은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절호의 기회였지만 최부잣집은 가진 사람이 할 처신으로 보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에 놓인 농민들의 심정을 헤아려 양반이 해선 안될 도리로 여겼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 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 열쇠는 여주인의 몫인만큼 집안 살림을 담당한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강조한 표현이다.


춘궁기 때는 집안 식구들이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해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쓸 정도로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후하지 않았다.



'100리 안에 굶는 이 없게 하라' 최부잣집의 덕망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는 동으로 경주 동해안 일대까지,


서로는 영천까지, 남쪽으로 울산까지, 북으로 포항까지 영역이다.


주변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나 혼자 만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소작수입의 1천석을 빈민구제에 사용했다.



원래 이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는데 지난 61년 방앗간 외양간이 헐려


47칸으로 줄었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다.



수많은 과객이 거쳐간 사랑채는 지난 70년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다.


마당 한켠에는 가을 추수가 끝난뒤 각지에서 날라온 쌀을 저정하던 창고가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한국에서 개인집 쌀창고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은 일제 시대


독립군 군자금을 대주다 일제의 압박을 받았으며


해방후엔 수백정보의 부동산과 장서 8천권 등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지금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300년간(1600~1900년대)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낸 최부잣집은 자랑스런 유산이다.



벼슬과 재물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면서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가훈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인들이 배워야할 지혜가 아닐까.


그는 어느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처 : 골짜기의 방
글쓴이 : 밝은골짜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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