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씨를 모두 죽여라>
우리 나라의 반만년 역사상 임금이 자기의 백성을 많이 학살한 사건들은 여러차례가 있었다. 1990년대부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정권이 300만을 굶어 죽게 하였고, 정권의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잡아 넣고
약 50여년 동안 숙청한 인원은 아마도 50만명쯤 될 것이다.
약 15개소의 정치범 수용소는 한번 들어 가면 다시 살아 나오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희망이 없고,굶주림과 극심한 육체노동으로 병들고, 영양실조로 시들어 죽게하는 정책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행하는 관례적인 숙청방법이다.
그 다음으로는 1392년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고려에 충성하는 왕씨들을 모두 잡아 죽인 것이 그 다음의 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멸족된 확실한 숫자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십만명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산이 된다.
실제로 멸족대상의 숫자는 그 보다 훨씬 많었겠지만 왕씨들의 “王”자에 몇 혹을 더 넣어 全씨, 田씨, 龍씨, 玉씨등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산속으로 들어 가서 은둔생활을 함으로 죽음을 피하였든 것이다. 세번째로 큰 살인비극은 22대 정조이후 26대 고종때 까지 수 차에 걸처 천주교인들을 박해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약 15,000명 이상이 순교를 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네번째로는 사대사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로써 10대 연산군을 비롯하여 중종 명종 때에 사화를 통하여 3족 또는 9족을 멸하는 참극의 숫자가 그 다음의 순위가 될 것이다.
근간의 북한정부가 하는 살인극은 바야흐로 우리 세대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그 비극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지만, 지금으로 부터 약 600여년 전에 이성계가 정도전으로 하여금 전국적으로 왕씨들에게 펼친 “왕씨몰살정책”을 요즈음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때의 그 왕씨몰살작전의 모습을 한 번 더듬어 보고저 한다.
(1)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위대한 임금으로 알려저 있지만 고려왕조의 왕씨들의 씨를 말린, 잔학무도한 살인행위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천추의 한으로 남겨저 있는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여 권좌에 오른후 그는 고려의 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부자(父子)들을 강원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다가 드디어 죽임을 하사하였다.
실로 이성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이 들었지만 정도전 이하 많은 신하들이 고려왕조의 씨를 남겨 둠은 후한의 근거가 되고 자칫하면 음모의 조건이 되니까 아예 초장에 쓸어 버리자고 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사형의 어명을 내린 것이다. 어명을 받은 사령들은 강원도 유배지를 찾아가 아들들이 보는 자리에서 공양왕의 목에 오랏줄을 묶어 잡어 당겼고, 두 아들도 그렇게 모두 죽였다. 이 때부터 고려왕조의 왕씨 멸족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성계의 왕씨 멸족 살인극은 아주 잔학무도하였든 것이 특징이다. 왜냐하면 공양왕 일가를 그렇게 무참히 오랏줄로 목을 매어 잡아 당겨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젔고 이에 반하여 이성계의 살인극은 더욱 무참한 방법으로 돌변하였든 것이다.
(2)두 번째로 저지른 살인극은 고려에 충성을 하는 신하들과 학자와 무인들을 불로 태워 죽인 소위 “두문동 화형 사건”이다. 이성계가 새 왕조의 위엄과 체계를 잡기 위하여 첫 과거시험을 선포하였다. 헌데 과거 날자가 되니 임금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과장에 나갔으나 수험생은 겨우 지방에서 올라 온 몇명의 유생이 있을 뿐, 고려의 수도 개경의 학자와 무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를 아니 하고 오히려 송악산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이성계는 이들이 모여 있는 두문동을 볏집으로 둘러 쌓아 막아 놓게 하고 불을 지르기 전에 회개하고 나올 것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가 투철한 고려의 충신들은 고개 하나도 끄덕을 하지 아니 하였다. 드디어 불을 질렀다.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고 둘러 앉아 있던 72명의 학자 유생들과 48명의 무인들은 꼼작을 아니 하고 앉은 자리에서 모두 불에 타 죽었다.
(3) 세상이 이렇게 돌아 가니 이성계는 물론, 그의 심복 정도전과 형조판서 윤나경, 대장군 오을몽등이 본격적인 왕씨 몰살작업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소위 거제도와 강화도에 귀양가 있는 왕씨들을 수장시킨 사건이다. 실로 무고한 사람들이었지만 왕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관대작을 차지하고 있다는 탓으로 거제와 강화로 귀양을 보냈는데 숫자가 너무 많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두 물에 던저 죽이기로 한 것이다.
(4) 이렇게 되니 정도전등은 이왕에 죽일 바에야, 중요한 왕씨 일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왕씨 성을 가진 자 모두를 싹쓸이 해야 한다 하고 방을 써서 장안에 여러 곳에 부쳤다.
“이번에 위에서 왕씨 성바지들에게 새로 섬 하나를 마련하여 길이 영주의 고향을 삼아, 편안케 하고저 하니 왕씨들은 강화해안에 모두 모이라. 기일안에 모이지 않는 자는 크게 벌을 받으리라.”
불안에 벌벌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제야 살았다.”하고 모두들 짐을 꾸리고 강화의 해안에 모여 들었다. 죽이지는 않고 섬 하나를 희사하여 농사를 지어 먹게 한다니 오히려 성은이 망극하다고 안도의 숨을 쉰 것이다.
수 십척의 큰 배들이 등대를 하고 모여드는 왕씨들을 차례대로 수용하였다. 관리들의 대우도 좋왔다. 며칠 후에 바닷고기의 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들을 보내는 친지와 일가들의 환송하는 모습이 저 멀리서 아른 거렸다. 배가 바다의 한 복판에 이르렀을 때에 돌연 배 안에서 이상이 생겼다고 아우성이 났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배 밑창의 널판이 여러장 떼어저서 바닷물이 용솟음을 치고 올라 온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배안은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배는 서서히 가라 앉기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왕씨들을 실은 모든 배는 강화도 앞 바다에 수장되였다.
그날 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칠장의 공룡포를 입고 선명하게 이성계의 앞에 나타나서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삼한을 통합함에 공이 이백성들 위에 크게 내려저 있거늘 네가 내후예를 모조리 없애려 하고 있으니 내 반드시 보복하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이성계 태조는 크게 두려워 하여, 아들 방번의 장인인 왕우로 하여금 고려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함으로 오직 왕씨 장인만의 목숨을 부지케 하였다.
오늘날 全씨, 田씨, 玉씨, 龍씨, 虛씨, 등은 실로 왕씨들이 개명한 성이 많아, 한 때는 이러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王씨의 후손이라 하여 서로 결혼도 아니 하였다고 한다.
GTA한카노인대학장 강 신 봉
출처: https://skang3441.tistory.com/747 [캐나다加人강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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