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엘리트 검사였던 그가 언제부턴가 싸움꾼이 됐다. 지난해 7월 ‘드루킹 특검팀’의 수사를 받던 노회찬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하자 곽 의원은 “이중성을 드러내도 무방한 곳에서 영면하기 바란다”는 글을 남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1월엔 문 대통령 외손주의 해외이주 사실을 공개해 청와대로부터 “초등학생까지 정쟁에 끌어들이는 후안무치한 행태”라는 반발을 샀다. 곽 의원은 16일 중앙일보 기자와 만나 “국회에 들어올 땐 나라를 위해 좋은 정책을 많이 내겠다고 다짐했다”며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정치 지형이 변했고 문 대통령이 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정치를 하기 전엔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나름 성공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았던 이들이 왜 여의도에만 오면 물불 안가리는 ‘전사’로 돌변하는 것일까.
정치권에선 의원 개개인의 성향 보단 이들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매번 총선 때마다 여야를 막론하고 물갈이 열풍이 거세지만 그래봤자 국회가 변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면 환경적 요인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제19대 총선과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초선 의원 비율은 각각 49.3%, 44.0%이나 됐다. 이철희 민주당 의원은 “이상한 사람들만 국회에 들어오기 때문에 국회가 이상해지는 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들도 국회에 오면 이상하게 변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를 ‘호모 여의도쿠스’(Homo Yeouidocus)의 진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우선 국회의원들은 국회에 들어 오자마자 미디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언론의 조명이 정치 이슈를 선점하는 전투력 강한 의원에게만 쏠리는 것이다.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정책 활동에 포부를 갖고 들어온 나 같은 초선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런 맥락에서 20대 국회에서 표창원 민주당, 전희경 한국당 의원 등은 초선 그룹에서 대표적 ‘셀럽(유명인)’으로 발돋움한 인사들이다.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상대를 향한 날선 발언으로 여야를 대표하는 신인 정치인으로 자리 매김했다.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한국당 의원은 “처음 정계 입문 때는 도시계획과 부동산 분야의 전문성을 앞세워 정치를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며 “막상 와서 보니 전문가보다 ‘선동가’의 말이 더 잘 먹히는 곳이 국회”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정치적 언어로 지지자들을 자극하지 못하면 아무리 전문가라도 ‘도태돼 다음 총선에 못 나오거나, 정책 얘기만 하다가 잊혀지거나’의 양자택일 밖에 없다”고 말했다.
‘호모 여의도쿠스’(Homo Yeouidocus)의 두 번째 진화는 당 지도부의 위력을 실감하는 단계다. 이용호 무소속 의원은 “다선 의원들의 견해에 맞서 초선이 소신을 지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국민의당 소속 시절이던 2016년 당론에 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원 구성 협상이 늦어지면서 세비반납이 국민의당 당론으로 채택됐는데, 이 의원은 “의원들간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데다 세비반납은 인기 영합적 발상에 불과하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내대변인이던 이 의원은 어쩔수 없이 해당 당론을 발표해야만 했다.
용기를 내 소신 발언을 하더라도 당 주류의 눈총을 받고 발언 수위를 내리는 경우도 흔하다. 최근 청와대가 추진하는 검경수사권조정 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에 대해 소수 의견을 제시했던 민주당 초선 조응천ㆍ금태섭 의원은 친문 지지층의 거센 비난에 쇄도하자 “일단 치열하게 논의하고, 다수가 의견을 모으면 그것을 존중하겠다”고 물러섰다. 이에 대해 야당에선 “친문 세력의 압력 때문에 민주당 소신파가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 초선 의원들은 당 지도부의 요구에 맞춰 스스로 ‘충성심’을 과시하는 ‘호모 여의도쿠스’의 마지막 진화 과정으로 진입한다. 공천을 받기 위해 당 주류와 호흡을 맞추고, 당 열성지지층의 목소리를 온 몸으로 체화하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총선을 10개월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을 ‘천렵질’ ‘해안관광’으로 비유한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의 발언이 나오자 여야가 격하게 엉켜있는 것도 이런 경우다. 최운열 민주당 의원은 “여야가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생각에서 정책 개발은 제쳐놓고 당, 공천, 지지자에 맞춘 발언만 쏟아내고 있다”며 “이 때문에 ‘전투력이 곧 정치력’이란 오해도 생긴다”고 꼬집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이분법 구도를 형성하는 건 적대적 공생관계 측면에서 여야 거대 정당에 손해볼 일이 아니다”며 “이 싸움의 동참 여부가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해석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싸움꾼 이미지가 늘 공천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여론이 정쟁에 염증을 느끼는 단계라면 여야 지도부가 공천때 ‘싸움꾼’을 토사구팽시켜 희생양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역대 총선에서 여야의 주전 공격수들이 공천에서 탈락한 경우가 꽤 있다. 설령 공천을 받더라도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야당의 한 다선 의원은 “정치를 오래 한 중진 치고 싸움꾼 이미지로 장수한 사람이 어디에 있냐. 독한 발언으로 잠깐 미디어의 눈길을 끌더라도 그런 일이 계속되면 결국 유권자들이 심판하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유성운ㆍ현일훈ㆍ이근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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