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오(悔悟)가 새삼스러울 때가 많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때 더 열심히 사랑할 것을, 미처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이 그것이다. 겪어 나온 옛날 일들을 더듬다가 어느 장면에서는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다. 지난 연말만 해도 1970년대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관한 구술을 하다가 나도 울고, 듣고 있던 대담자도 울어버린 일이 있었다.
숨어서 쓴 진상 보고서
1975년 2월 24일 9시 30분, 명동성당 사제관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유신정권을 향하여 인혁당 사건에 대한 공동 진상조사단 구성을 제의하면서 그때까지 확인된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제1차로 공개했다. 2백 자 원고지 70~80매 분량의 이 진상보고서는 내가 사제단의 주선과 보호 아래 숨어서 쓴 것이었다. 가족들의 진술과 양심선언을 토대로 하고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상고 이유서, 그리고 변호인들과 관련 참고인들의 증언을 들어 작성하였다.
그걸 쓸 때도 그랬지만, 그것을 다시 읽어보면서도 치떨리는 분노와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수사과정의 처절한 고문장면과 재판부가 이수병에게 “피고인들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고 물은데 대해 이수병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변하는 것을 변호인들과 가족들이 분명히 들었는데도 공판조서에는 “네,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조직을 구성, 대정부 투쟁을 하기로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구성, 활동상황을 조정키로 하였습니다”로 변조된 대목에서 더욱 그랬다.
하재완의 세 살 먹은 어린애를 동네 아이들이 끌어다가 목에 새끼줄을 묶어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해야 한다면서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도 동네 여자들은 쳐다보고만 있었고, 역시 하재완의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이 소풍을 가서 점심을 먹는데, 다른 급우들이 돌을 던져서 나무 뒤에 숨어서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는 울면서 그 글을 썼다.
1974년 11월 4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이들의 항고를 기각하자 초조해진 가족들은 그 억울함을 신·구교 기도회 등에 호소하고 다녔다. 그때 그들의 소원이라는 것은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으니 제발 공개재판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족들이 구명을 애타게 호소하고 다니자 중앙정보부는 이들 부인네를 연행, 남편이 간첩활동을 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진술서를 쓰게 하고, 심지어는 최음제와 같은 약물을 먹여 성적흥분상태에 빠뜨려 놓고 저희들끼리 희희락락 희롱까지 하는 천인공노할 작태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 부인이 집에 돌아와 그 수모를 참지 못해 자식들과 함께 자살을 꾀하다 친정어머니한테 들켜 죽지 못하고 네 식구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슬픈 이야기는 차마 거기에 쓰지 못했다.
기억하라, 1975년 4월 9일
그들은 구속된 이래 죽는 날까지 누구 한 사람, 단 한 번도 가족접견을 하지 못했다. 다만 이수병의 처는 기약도 없이 매일 서대문구치소로 출근하던 어느 날, 마음 착한 어느 교도관의 배려로 기적처럼 그 앞을 지나치던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딱 1분, 그러나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이라고 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확정판결이 있었고, 이로부터 18시간 뒤인 4월 9일 새벽, 이들 중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재심과정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대법원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인 4월 8일 새벽 3시에 이미 군법회의 검찰부에 사형선고 통지가 접수되었고, 사형을 집행한 구치소에는 집행 후인 4월 9일 15시에 사형선고 통지가 왔다. 사형선고 통지가 오기도 전에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저간의 사정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이 2005년의 국정원 진실위 조사에서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한 발언이 모든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이 유신 박정희 시대의 한가운데 모습이었다.
얼마 전 시노트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노트 신부가 4월 9일, 사형장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주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끌려가는 사진이 외신에 크게 실렸었다. 그는 또 주검 이후의 시신확인 과정을 선교회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 국제법학자협회가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인혁당 사건이 BBC다큐멘터리(Anno Domini BBC Ⅰ)로 제작되어 나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 그는 1975년 4월 30일, 끝내 한국정부로부터 추방당했다. 1989년, 14년만에 정식비자를 받고 입국, 김포공항에서 인혁당 사형수 8명의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했다. 2004년 10월에는 〈1975년 4월 9일〉이란 책으로 이 사건을 증언했다. 2015년 4월 9일은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의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기억하라, 1975년 4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