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미인의 전형
우리 전통사회에서 미인의 조건으로 30가지가 충족되어야 절세가인으로 칭하였다. ? 살결, 치아, 손은 희어야 하고 -3백(白), ? 눈동자, 눈썹, 속눈썹은 검어야 하고 -3흑(黑), ? 입술,볼,손톱은 붉어야 하고 -3홍(紅), ? 목,머리,팔다리는 길어야 하고 -3장(長), ? 치아.귀,발길이는 짧아야 하고 -3단(短), ? 가슴,이마,미간은 넓어야 하고 -3광(光), ? 입,허리,발목은 가늘어야 하고 -3협(狹), ? 엉덩이.허벅지,유방은 두터워야 하며 -3태(태), ? 손가락,목,콧날은 가늘어야 하고 -3세(細), ? 코,머리,유두는 작아야 한다 -3소(小) 이러한 30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30점 만점의 절세 미인으로 칭하였다.
미인의 조건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츰 달라진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미인도에서 얼굴모습을 살펴보면 크게 미인의 기준은 지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그 당시 얼굴의 윤곽선은 긴 타원형이며 가름한 얼굴에 초승달같이 가느다란 눈썹과 쌍꺼풀이 없는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에 단정하게 다문 좁은 입과 작게 칠한 붉은 입술이 대표적이다. 동양화의 인물묘사 기법이 서양화처럼 입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위와 같은 모습을 평면상에 표현하려면 더욱 어렵고 사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비하여 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먼저 조선시대의 미인상이라고 하면 혜원 신윤복( 惠園 申潤福 1758∼미확인)의 미인도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신윤복은 서민생활을 잘 표현한 그림을 많이 남긴 조선 21대 22대 영.정조시대의 화가이다. 이 미인도는 눈, 코, 입의 이목구비가 대체적으로 작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다소곳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얼굴표현으로 나타난 모습은 신분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지만 보다 지적인 이미지를 나타낸다. 혜원은 따라서 외양의 미와 더불어 내적으로 풍기는 이미지를 중시한 것 같다. 코는 반듯하고 뚜렷한 이마와 사물을 응시하는 눈매를 중시하였다.
해맑은 얼굴에 비하여 당시 풍습이던 검은 다리(변체)머리는 유난히 대조적으로 아름답게 서로 상응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얼굴을 뚜렷하고 아름답게 부각시키도록 검은 머리를 가지고 전체 배경으로 잘 이용하고 있다고나 할까? 또한 그 당시는 여인에 따라 각자 개성적으로 머리모양을 달리 틀어 올렸으니 머리를 다듬는 모양새부터 이는 독창적인 예술행위임에 틀립없는 것이었다. 덧붙여 귀밑에 하늘거리는 머리털은 지금도 유행되는 애교머리가 아니겠는가. 비교적 가늘고 긴 흰목과 저고리를 몸에 붙게 하여 특히 팔소매를 좁혀서 나타난 좁은 어깨 역시 조선시대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이었다.
혜원의 미인도는 그의 작품 가운데 크기가 대작인 편이며 한마디로 비단 바탕에 고운 필치로 인물화 실력을 한껏 뽐낸 작품이다. 마치 야회복처럼 부풀린 멋진 담청(淡靑) 치마에 단(緞)이 짧고 폭(幅)이 유난히 좁은 저고리, 고개를 숙인 가련한 얼굴, 가느다란 실 눈썹의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 좁은 입 등은 조선중기와 후기시대의 여인의 심미적 조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틀어서 얹은 다리(변체) 머리와 탐스럽게 부풀어있는 치마의 멋진 균형, 볼륨있는 의상의 절제된 색깔에 액센트를 준 노리개와 그 노리개를 잡고 있는 하얀 손이 주는 미묘한 매력적인 미, 그리고 어딘지 가냘픈 느낌을 주는 순수한 얼굴과 가는 어깨선으로 지금시대에도 인기있는 훌륭한 미인도가 되고 있다..
? 왼쪽은 신윤복 申潤福 (1758-미상)작 미인도 (19세기초),비단에 담채,113.9 x 45.6cm, 간송미술관
? 오른쪽은 作者未詳의 미인도(美人圖), 1825년, 종이에 담채, 114.2cm x 56.5cm, 일본 국립동경박물관 소장
또한 치마 아래로 한쪽만이 살포시 드러난 외쪽 버선은 절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의 표정은 아름다운 마음까지 잘 드러내어 마치 초상화를 방불케 한다. 쪽물을 들인 회청색(灰靑色) 치마에 받쳐 입은 삼회장 저고리, 그에 조화된 자주색 댕기와 옆구리의 붉은 띠 치장은 그 미모를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옷맵시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고 있다. 여인의 복장과 더불어서 붉은 삼작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자연스러운 자태는 당시 여인의 풍속을 나타내는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대부의 권위적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화로서의 예술성 또한 충만하다.
오른쪽 동경박물관에 보관된 종이에 담채로 된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얼굴 모습과 기품은 거의 흡사하다. 단 짧은 저고리와 치마 사이로 속살이 살짝 내비치고 있는데 이는 아래와 같이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하는 종이에 수복담채의 여인모습과 동아대 박물관 소장의 비단에 담채한 여인과 같이 가슴의 일부가 그대로 고혹적으로 드러나 있는 점이 동일한 것이 유난하다.
▷ 여인의 머리모양
신기한 것은 한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몽고의 유풍으로 다리(변체 : ??)라는 머리 모양이다. 커다란 머리치장에 돈이 많이 들고 웅황판(雄黃版), 법랑잠(法琅簪), 진주수(眞珠?)로 꾸며 실 타래 같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 이는 여인이 멋있게 보이기 위해 치장한 것으로 특히 치장에 비용이 많이 소비되고 번거스러운 점으로 조선 조정에서 1788년에 이를 금지시키고 대신 족두리와 쪽머리를 하도록 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머리 치장에 낭비하는 돈이 너무 많아 나라에서 이런 유행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법으로도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하는 종이에 수복담채의 여인모습은 다리(변체)가 너무 커서 몹시 무거운지 고개를 수그리고 있고, 양 손으로 아래쪽을 받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검고 숱이 많은 머리를 아름답다고 여겼다. 다소곳이 숙인 얼굴을 살펴보면 머리에 가려진 맑고 시원한 이마, 초승달처럼 굽은 눈썹, 갸름하고 길쭉한 두 눈, 반듯하게 내려 끝이 아담한 코, 작고 오목한 입술을 하고 있다.
옷치레에도 매우 신경을 썼다. 길고 가는 어깨와 팔이 잘 드러나 보이도록 바짝 붙은 작은 저고리를 입었다. 한편 치마는 아주 풍성하고 길어서 발이 보이지 않는다. 치마 윗단의 허리를 칭칭 감은 주름들과 늘어진 고름이 볼 만하다.
? 왼쪽은 作者 未詳의 미인도(美人圖), 19세기후반, 비단에 담채, 129.5cm x 52.2cm, 동아대 박물관 소장
? 오른쪽은 종이에 수묵담채 117.0cm x 49.0cm, 해남 윤씨 종가 소장
또한 팔을 들어 크게 올린 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짧은 삼회장 저고리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속살, 하얀 손과 새카만 머리카락의 대조, 입술과 띠의 강렬한 붉은색,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여유만만한 눈초리 등등이 상당히 고혹적인 것이다.
▷ 저고리 모양
18세기에는 반가(班家) 부인들의 저고리는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았다. 치마는 길고 커다란 다리를 올린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는 극대화와 극소화의 양극으로 치닫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이익(1629 ~ 1690)
의 [성호사설 星湖僿說]에는 당시 여자 옷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말세가 되니 부인의 의복이 차츰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은 것이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을 비록 좋게 여기지 않으나 모두 같아지는 풍속에는 나 또한 어쩔수가 없구나”.
또한 조선후기 규장각의 검서관을 지낸 청장관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 靑莊館 全書]에서 “옛날에는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소렴에도 쓸 수가 있었다.....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험삼아 입어보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간신히 입었지만 잠시 있으니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져 벗기가 어려웠다...대체로 복식에 있어서 시양(時楊)이라는 것은 모두 창기들이 아양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상 남자들이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서로 전하게 한다. 규중부인이 기생의 복식을 하도다. 모든 부인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왜소화된 저고리의 유행은 1910년대에 겨우 끝이 났다. 그러나 이덕무도 사치스러운 것은 안되지만 어쩔 수 없이 시속에 따르는 것에 대하여는 관용을 베풀었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시대에 따라서 미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사람의 얼굴모습은 서양인이 동양인을 볼 때나 또는 동양인이 서양인을 볼 때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지금도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은 얼굴과 머리 모습, 전통적인 저고리와 치마 의상과 소지한 장신구등에서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150년 전후의 조선후기 시대가 지금에 비하여 결코 뒤떨어 지거나 낙후된 것이 아니라 고도의 문화예술적인 심미감을 가진 자긍심마져 잘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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