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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蘭亭敍(난정서) - 왕희지(王羲之)

우리둥지 2009. 2. 1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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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蘭亭敍 (난정서)    

     

                                        王羲之(왕희지)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 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영화9년 계축년 3월초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행사를 열었다.

    많은 선비들이 모두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이곳은 높은 산과 고개가 있고

    깊은 숲과 울창한 대나무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흐르는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물굽이를 만들고

    순서대로 자리를 잡으니

    비록 성대한 풍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읊으며

    또한 그윽한 정회를 펼칠 만 하였다.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이 날은

    맑은 날씨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머리를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사물의 흥성함을 살피니,

    경치를 둘러보며

    정회를 펼침은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하기에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벗을 마주하여

    서로 회포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정회를

    대자연에 맞기며 유람을 한다.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비록 나아감과 머물음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 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어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그러나) 흥에 겨우면 다시 권태롭고,

    감정이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흥이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向之所欣,

    傘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修短隨化,

    終期於盡.


    예전의 기쁨도

    잠깐사이에 곧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비록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할뿐임에랴.

     

    古人云,

    "死生亦大矣.

    " 豈不痛哉!


    옛사람이 이르기를

    "삶과 죽음은 역시 중대한 일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매번 옛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면

    마치 부절이 들어맞듯 일치하여,

    일찍이 그들의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觴爲妄作.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장수와 요절이 똑같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오늘의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듯 하리라.

    슬프도다.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오늘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두 그 술회를 시로 적었으니

    비록 후세에는 세상이 달라져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한가지인즉

    뒤엣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또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왕희지 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별칭 : 왕우군,

    자 : 일소(逸少)
    국적 : 중국 동진(東晉)
    활동분야 : 서예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주요작품 : 《악의론》,《황정경》,《난정서》,《십칠첩(十七帖)》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출처 : 내 인생의 바다
글쓴이 : 내 인생의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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