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내금강
57년만에 열리는 내금강... 설레임을 가득안고 드디어 남측출입국 사무소에 도착을 하였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북측으로 향한다 남측군사경계선을 넘으니 바로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비무장지대를 지나니 얼마안가 바로 북측군사경계선...
북측군사경계선을 지나 한10여분가니 북측출입국 사무소가 보인다
처음으로 북측땅을 밟은곳...차에서 내리니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하는 귀에 익은 노래가 우리를 반겨준다
코끝이 찡해졌다...남측보다는 조금 까다로운 입국수속을 마치고 차에 올라 한20여분 달리니 우리가 머물 숙소인 온정리다..도착하니 4시가 조금 넘었다
4시30분부터 공연을 하는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보았다...너무도 반갑고 안타까운 마음에 어느새 또 눈물 찔끔이다..
그들의 노력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 후 내일의 일정을 위해 외금강호텔에(예전엔 김정숙초대소였는데 관광객을 위하여 리모델링을 하여서 지금은 관광객들 숙소로 쓴다)짐을 풀었다...
외금강호텔전경~~
아침 7시40분 드디어 내금강의 산행에 오른다...
온정각을 출발한 버스는 금강산의 깊은 속살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북측 관계자가 ‘좋은 분들이 오면 금강산 산신령께서 날씨를 좋게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걸까. 일기예보대로라면 장마로 인해 오늘은 폭우가 쏟아져야 했다.
그러나 전날 온정각에 비가 부슬부슬내리더니 내금강 가는 날 하늘은 에머랄드 마냥 맑고 푸르렀다.
금강산은 크게 내-외-해금강 세구역으로 나뉜다.금강산을 남북으로 잇는 오봉산(1264m),상등봉(1229m),옥녀봉(1423m),비로봉(1638m),월출봉(1580m),차일봉(1529m)줄기를 경계로 서쪽 내륙의 금상군일원을 내금강,동해바다로 뻗어 내려간 고성-통천쪽을 외금강과 해금강으로 부른다. 경사가 가파른 바다쪽과는 달리 내금강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편안해서 남여노소 등반하기 좋은 편이라고 한다.
분단전 내금강 가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금강산행 열차를 타거나 화천-양구를 통해 내금강으로 향하는 육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성쪽 국경을 넘어 외금강 온정각에서 만물상을 거쳐 온정령을 넘어 들어간다.
쭉쭉 하늘로 뻗은 전나무와 그 뒤로 펼쳐진 기암괴석과 계곡들. 영국 여행가인 이사벨라 비숍이 1890년 이곳을 다녀간 후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도 황홀하여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지경이다”는 감탄사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눈앞의 풍경은 보여주고 있었다.
내금강의 안내를 맡은 북측 ‘해설위원(가이드)안진아양’은 차에 오르자 낙랑한 목소리로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로 우리의 긴장을 풀어준다..
특유의 억양으로 기암괴석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옛날 여기에 곰이 살고 있었습네다. 배가 고픈 곰이 산꼭대기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니 도토리가 많이 쌓여있었습네다. 그래서 그 미련한 곰이 막 뛰어 내려가다 발이 돌 사이에 걸렸는데 빼지 못하고 결국 먹을걸 눈앞에 두고 저 상태로 굳어 버렸다고 합네다.” 는 전설을 참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20대 초반의 여성 해설위원은 이어 금강산판 ‘선녀와 나뭇꾼’ 얘기와 함께 자신이 그 선녀의 67대 마지막손이라며 선녀라 불러달라는 소개를해 웃음을 자아냈다.
온정리에서 내금강 표훈사까지는 36Km.시멘트-비포장길이 섞여있고 온정령 고개길이 굽이쳐 차로 1시간40분 정도가 소요된다.하지만 곳곳의 자연 경관이며 분단 57년 세월 에 고착된 낯선 풍경은 지루함을 달래준다
외금강을 지나 내금강으로 향하는 창밖의 풍경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소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신기한듯 창밖을 내다보는 천진한 아이들...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과 소로 밭을 가는 농부들, 거기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들…. 마치 추억 속으로 빠져 들듯 비포장 굽이길이 정겹기만 하다.
단풍마을을 지나고 금강읍 마을은‘탁아소 물자 공급소’ ‘인민약국’. 간판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삼층으로 지은 집도 있다 북쪽 마을이 여러 곳 나왔지만 버스가 읍내를 관통하는 곳은 금강읍뿐이다. 창문마다 달린 커튼은 똑같은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지붕의 잿빛마을은 60~70년대 시대극을 위한 드라마 세트장을 찾은 느낌이다. 다만 오른손에 붉은 기를 들고 마을 입구를 막고 선 새까맣게 탄 군인들이 애써 잊으려 했던 분단의 아픔을 각인시킬 뿐이었다.
흙먼지 풀풀 날리며 1시간 40분가량 달리던 버스가 드디어 내금강으로 들어섰다. 버스가 멈추고 내금강 역사와 처음 마주한 곳은 표훈사.
드디어 내금강 9Km트레킹 코스에 오르다...
표훈사 안내 표지판
내금강 등반의 본격 출발지는 표훈사다.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는 곳으로, 한국전쟁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찰이다. 구름이 걸친 청학봉 오선봉 돈도봉 천일대 등 기암고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한눈에도 명찰의 풍치를 자랑한다.
표훈사절~~~
절문으로 삼은 능파루를 지나 절마당에 이르면 반야보전이 좌우 명부전, 영산전을 날개로 달고 있다. 또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어실각도 사찰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가 심신 치료차 표훈사를 찾아 머문 숙소이다.
20여 채의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는 표훈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천년의 위용을 크게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금강산의 수많은 고찰들이 전쟁의 포화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점을 떠올리면 그나마 사격을 갖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북측에 의해 복원된 반야보전과 영산전을 비롯 명부전, 칠성각, 어실각, 능파루, 판도방 등 7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표훈사의 칠성각
표훈사 옆을 지나 자연 돌길을 따라 1분 정도 걸으면 돌문이 있는데 이것이 내금강 금강문이다.
문 앞 왼쪽 바위에 금강문(金剛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이마를 맞대고 서 있고 그사이에 삼각형 공간이 있다.
금강문~~
칼로 쪼갠 듯한 거대한 바위 둘이 이마를 마주댄 채 통로를 만들고 있는 금강문을 지나면 탄성이 절로 나며 내금강의 진수인 만폭동이 눈앞에 펼쳐진다.
만폭동앞에서~~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서나 보았던 금강의 비경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바로 만폭동이었다 만폭동 계곡수가 세찬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초리'라 노래한 바로 그 계곡수다.
57년만에 열린 내금강 내금강의 으뜸 만폭동폭포
만폭동 계곡이 활짝 열리는 곳에는 금강대가 우뚝 솟아있다
출렁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니 맑디 맑다 못해 눈이 부신 시원한 물줄기가 반긴다
만폭동은 구담, 비파담, 벽파담, 분설담, 선담, 진주담, 화룡담, 흑룡담 등 8개의 큰 담을 이루며 내금강의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는 한 여행객은 “이런 절경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조금 더 오르자 100미터는 족히 될 듯한 거대한 마당바위가 계곡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수많은 풍류객들이 다녀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숱한 글씨들이 바닥 위를 덮고 있었다. 조선 명필 양사언이 쓴 ‘만폭동’ 석자와 신선들이 바둑을 뒀다는 바둑판 앞에 사람들이 모인다. 여기서부터 크고 작은 연못 8개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진짜 출렁거리는 출렁다리에서 내려다 본 연못은 초록빛이었다. 저 정도면 선녀가 목욕하고, 나무꾼이 옷 숨겨도 뭐….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여기저기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만폭동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담을 지나 분설담에 이르니 북한 판매원들이 커피와 막걸리등을 판매하고있다(막걸리 한잔에 1달라 비싸도 한참 비싸다 어르신들께서 한잔씩들 하신다~~ㅎ)
북측 판매요원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려 이뤄진 크고 작은 폭포와 담소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만폭동은 사시사철 절경을 이루는 명소인 지라 전설도 많다.
내금강 만폭팔담의 제1담인 흑룡담을 시작으로 제2담 비파담· 제3담 벽파담· 삼복더위에도 눈보라가 날릴 때처럼 찬바람이 분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제4담 분설담으로 이어진다.
분설담의 오른쪽 법기봉 중턱 절벽 위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랬다 "보덕각시"와 청년 "수도승 회정선사"의 전설이 얽힌 보덕굴이 7.3m나 되는 구리 기둥에 의지한체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제5담 진주담· 제6담인 거북소,제7담 선담, 제8담 화룡담을 지날 때는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만폭동 8담 중 마지막인 화룡담을 지나 화개동에 이르면 만폭동 중턱에서 묘길상까지 빠른 걸음으로 20분 걸린다더니, ‘인민유격대’ 기준이었나보다. 화룡담부터 시작된 오솔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금강 관광의 마지막 종착점에 묘길상(妙吉祥)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15미터, 폭 9.4미터로 한국 최대의 마애석불이라는 묘길상. 그 거대한 부처님은 흐르는 땀방울 속에서 경외감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어느샌가 같이 관광을 하는 불자들의 입에서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이 연신 흘러나왔다.
묘길상
“저 마애불은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새긴 것으로 우리 북측의 국보 제47호로 지정돼 있습네다. 보시라요. 저 웃는 얼굴, 긴 눈썹, 두 어깨를 타고 흐르는 옷의 선, 얼마나 아름답습네까.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다른 이름인데 조선시대에 윤사국이라는 사람이 불상 우측에 묘길상이라고 새긴 후 이렇게 불리게 됐다고 합네다.”
묘길상안내표지판~~
북측 해설위원이 남측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묘길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이의 짤막한 설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잇따랐다. 언제 또 오랴 싶어서 일까. 역사적인 내금강 관광의 기념을 위해 묘길상과 자신의 얼굴을 함께 사각의 프레임에 담고자 함이었을까.
여기만 넘으면 비로봉을 갈 수 있는데~~~
외금강으로 갈수 있는 안무재 길을 뒤로하고 백운대와 비로봉을 쳐다 보며 아쉬운 하산을 한다...(묘길상에서 비로봉까지는 6㎞. 그러나 갈 수 없는 미개방 코스다.)
하지만 하산길 또한 금강산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안겨 주었다.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려 이뤄진 크고 작은 폭포와 담소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만폭팔담의 마지막 화룡담을 지나 10분쯤 내려오니 마하연의 중창비와 공덕비가 보인다.
공덕비 옆으로 100m쯤 올라가면 넓은 터에 돌계단과 주춧돌, 깨어진 기와장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마하연 터(보존급유적 제197호)이다.
마하연터
마하연은 661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마하연’이란 대승이라는 뜻이다.
화엄십대사찰중의 하나로 법당의 구조는 ㄱ자 모양이고 승방이 53개나 되는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정갈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현재 전각들은 소실되고 잡초만 무성한 마하연 터를 바라 보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하루빨리 선원이 복원되길 바라며 그 곳을 나서서 만폭담의 제4담인 분설담에 이르렀다
분설담
벽화담 오른쪽으로 난 출렁다리를 건너 위를 쳐다보면 기막힌 광경이 보인다.분설담의 오른편 법기봉 자락에 건축물 하나가 걸려 있다. 고려말 세웠다는 보덕암이다. 7.3m의 구리기둥에 의지해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암자는 감탄에 앞서 보기에도 아찔하다. 절벽난간에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한 채 매달려 있는 보덕암이 바로 그것이다.
보덕암
보덕암은 만폭동 계곡의 전망 포인트에 다름없다. 절 뒷마당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향로봉, 소향로봉, 오봉산 등 만폭동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보덕암 정상에서
고려시대 때 세워져 1675년 다시 세워졌다는 보덕암은 7.3미터의 구리기둥에 의지한 채 서 있으며, 법당 위에 세 칸의 기와를 올림으로써 마치 3층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보덕암측면
수백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부에 들어가면 마치 집 속의 굴 같아 보덕굴이라고도 부른다.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내려 않을것 같아 다리가 후들 거린다...
보덕암 내부앞에서
금강산의 상징으로 수많은 이들의 구도와 기도처가 되었을 보덕암. 분단의 시련 속에서 보덕암은 외면 받고 퇴락한 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금강산을 지키고 있다
이 보덕암 또한 많은 전설이 있다(나중에 직접 들으시길~~~)
보덕암을 내려 오며 북측 남자 안전요원(산악 구조대원)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 올 수 있었다..
이들은 특히나 우리 남측의 대선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그 중 한마디를 이야기 하면 헌법이 빨리 개정 되어서 노무현대통령이 다시 연임을 할 수 없냐 해서 헌법개정이 되어도 다시 연임을 할 수 없다 하였더니 많이 안타까워 하였다.(이 총각 내가 확실하게 꼬시고옴~~~ㅎㅎ)
그리고 평창 동계 올리픽 유치에 관해서 많은 관심이 이었슴...이 날 우리가 평창유치 결정을 못보고 산에 올라서 등산중 만난 많은 북측안내원및 안전요원이 오히려 우리에게 물어 보는 현상이 벌어짐..
또하나 이 북측 관계자들이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노사모에서 왔다하니 노사모가 뭐냐고 묻길래..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랬더니...한나라의 정치인이자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이 가능하냐고 의아해 하며 물었슴...참으로 대단한 단체임네다 하길래 뿌듯했음...(회원님들도 자부심을 갖길바람~~~ㅎㅎ)
이 안전요원 덕분에 함영교까지 내려 오는길이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표훈사 함영교 건너편에서 북측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에 백하암 터(보존급유적 제306호)를 만난다.
백화암터 부도와 서산대사비
이 암자는 고려 후기 도선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인데 조선 인조 10년(1632년) 서산대사의 부도비(북한 보물급 문화재 42호)를 비롯한 3개의 비석과 7개의 부도들이 서 있어 부도거리라 부른다.
백화암 수충영각이라는 건물 안에 나옹·지공· 무학·서산·사명 대사 등의 진영을 모셔 놓고 보존해 왔으나 현재는 소실됐다고 한다.
울창한 숲속을 따라 내려오면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중간에 일명 "문바위"라고 하는 삼불암이 있다
삼불암
세모 뿔모양의 바위에 한쪽은 아미타,석가,미륵의 입상이 다른면에는 법계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60기의 화불과 보살 두분이 새겨져 있다.이 부처바위에는 "고려때 장안사의 "나옹선사" 가 바위에 새겼다는 세 불상이 있는데 금강산의 수문장처럼 보였다. 뒷면의 작은 불상 60기는 표훈사의 금동거사의 작품. 나옹을 시기해 불상조각 ‘결투’를 신청했지만 결과는 그의 참패였다. 왼쪽 4번째 불상의 귀를 빼먹은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다른 불상들의 귀도 다 닳아 보이지 않았다. “금동이 크게 뉘우치고 몸을 던져 죽고, 세 아들이 슬피 울다 따라 죽은(금동의 세 아들바위) 곳이 있는 울소의 슬픈 전설이 있다
금동거사의 슬픈 전설이 담겨있는 울소
슬픈 전설을 가슴에 묻고 장안사로 발길을 재촉했다.
삼불암을 경계로 위쪽은 표훈동 아래쪽은 장안동이라 부르는데 장안사(국보급유적 제97호)는 금강산 장경봉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장안사절터
551년 고구려 스님이었던 혜량승통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했다.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임제종 제일가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선종 제1사찰로 자부하던 곳이다. 773년 진표율사가 중수했고, 982년 회정선사가 중건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7각2문외에 70여동의 건물을 거느렸던 대찰 장안사는 1953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부도 탑과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옛 영화를 기다리며 쓸쓸히 터를 지키고 있다.
쓸쓸히 서 있는 부도와 가람 기단만이 그곳이 절터였음을 암시해줄 뿐이다.쓸쓸한 장안사터를 뒤로 하고 이렇게 나의 천혜의 문화유산 트레킹 코스는 막을 내렸다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아름드리 전나무 숲 그늘을 따라 묘길상 까지 난 산길엔 장안사 표훈사 마하연 보덕암 삼신암 등 많은사찰과 유적을 나의 가슴에 꼭 품고 나오는 길은 두근거림과 섭섭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표훈사까지의 숲길은 과연 '길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할 정도다. 천년을 버텨 온 아름드리 전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잘 생긴 금강소나무를 품은 기암절벽과 계곡수며, 새소리가 어우러져 2.5km 진입로는 자연이 빚어낸 멋진 하모니를 연출한다.
등반중에 알게된 안전요원 김창혁씨와 헤어 지는 길은 정말로 섭섭했다...김창혁씨가 서운한지 내일 코스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 보길래 힘들어서 해금강으로 갈거라 했더니 무조건 자기도 내일은 해금강으로 잡을 거라한다...ㅎㅎ 나만큼이나 서운한가 보다 창혁씨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남남북녀라 했는데 김창혁씨 정말 잘생겼다 같이 동행한 아주머니들이 서로 사위 삼는다고 했을 정도로~~~ㅎ(아쉽게도 이분 사진이 없다 밧데리가 다 되는 바람에 내일 해금강에서 멋있게 찍기로 했는데~~~)
이번 해설원으로 같이 동승한 안진아양이 숙소가 다가 오니 차에 오를 때와는 반대로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서 속상했다...
다시 만납시다 - 리경숙
백두에서 한라로 우리는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나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만나요
목 매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부모형제 애타게 서로 찾고 부르며
통일아 오너라 불러 또한 몇해였던가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만나요
목 매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리 헤어져 가도
해와 별이 찬란한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만나요
목 매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을까...어여 빨리 통일이 되어서 서로 웃으면서 만날 수 있길 바라면서 힘찬 박수로 화답을 해주었다.
이상으로 예다나의 내금강 여행기 였습니다...
이박삼일 여행이였으니 해금강은 내일 펼쳐 드릴께요.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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