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그러나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후보가 여태 떠오르지 않은 상황인 듯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에게 “요즘 뭐 하냐?”고 물으면, “대권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내지른다. 요컨대 대선 자체에 대한 다양한 불만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비꼬는 투인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한국의 정치인들은 한마디로 거짓말 챔피언들이다. 약속 뒤집기의 명수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사기꾼 공화국’이라 불러도 크게 대꾸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는 거짓말로 점철된 빼어난 역사를 자랑한다.
우선 우리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소위 ‘국부’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시, 서울 시민들을 향해 ‘수도 사수!’를 절규했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서울을 표표히 빠져나간 사실을 안 시민들은 깊은 배신감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정희는 또 어땠는가?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그는 “언제라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얼마 후 “다시는 이 땅에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정권을 낚아챘다. 요컨대 그는 ‘불행한 군인 정치인’이 되었던 것이다. 1969년의 3선 개헌도 물론 과거의 약속을 뒤집은 것이었다. “절대로” 개헌하지 않겠다더니, “절대로” 해버리고 말았다.
그에 뒤질새라 우리의 전두환 장군도 1979. 12.12. 쿠데타 이후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몇 차례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윽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으니 정치가 제대로 굴러갔겠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던 자신의 선거 공약을 물론 파기해버렸다.
또 우리의 ‘문민’ 김영삼씨는 어쨌는가.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과정에서 “쌀 수입은 대통령이 되면 그 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집권 첫 해인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국제적 압력 때문에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며 뒤로 내빼버렸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야당 지도자 시절인 1986년,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 사면 복권되어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큰 목소리로 공언했지만, 당시 여권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하자, 87년 대선에 기꺼이 출마했다. 뿐만 아니라 정계를 떠난다고 선언하며 비장하게 영국으로 망명객처럼 떠났지만, 그는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또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노벨상까지 받은 빛나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역대 대통령의 정체 우선 이승만은 국제적으로 필리핀의 마르코스, 쿠바의 바띠스따, 이란의 팔레비, 니카라과의 소모사, 칠레의 피노체뜨 등과 함께 반민주적 독재자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지배층이 만연시킨 친미 일변도의 정치문화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비판을 반미로, 또 반미를 용공으로 등식화시키는 저급한 반공 제일주의로 내려앉았다.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뿌리채 뽑아버렸다. 그것이 그들의 ‘자유’였다. 또한 정치에서 도덕과 윤리를 철저히 능멸하였다. 이승만 개인의 정치적 야욕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통치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사사오입 개헌이나 부정선거가 문제될 리 없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한국의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 발전에 치명적인 환경오염을 자행하였다. 민족의 도덕적 황폐화를 조장하고 기회주의와 요령주의를 확산시켰다. 그는 나쁜 의미의 마키아벨리주의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정확한 이승만 독도법(讀圖法)이다.
다른 한편 박정희는, 예컨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하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정체를 대변하는 <참주정>의 참주(tyrant)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참주”를 이렇게 묘사한다. 참주란 “아주 잘 따르는 군중을 거느리고서,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삼가지 않고, 사람을 부당하게 고발하여 법정으로 이끌고 가서는, 그를 살해하네. 사람의 목숨을 사라지게 하여, 경건하지 못한 혀와 입으로 동족의 피를 맛보고, 추방하며 살해하고 …… 이런 사람으로서는 적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아니면 참주가 되어 사람에서 늑대로 바뀔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질 것이 필연적”이라고 질타한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박정희는 곧 “동족의 피를 맛보고 동족을 추방하며 살해”하다가, 오히려 그 자신 스스로 “적들에 의해 살해된 늑대”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정치학>에서 “참주”가 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참주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고, 국민의 저항력을 분쇄하기 위해 “국민을 무력하고” “비굴하게” 만들어나간다 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신풍조의 원흉은 바로 박정희인 것이다.
우리는 불신을 배웠다. 그러한 불신은 권력을 향해서만 조준되지 않았다.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을 믿지 않았고, 민간인은 군인을 믿지 않았으며, 노동자는 기업가를 믿지 않았고, 국민은 지배자와 그 주위를 배회하는 자들을 믿지 않았으며, 권력자들 역시 서로 서로를 믿지 않았다. 총체적 분열이었다. 불신은 단순히 ‘풍조’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삶의 뿌리가 되어 있었다. 믿음이 없는 사회에 어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한탕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활개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음은 그 자명한 결과였다.
그러나 YS는 청와대에 가서까지도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혁명적 구호를 내걸고 과감하게 조깅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애석하게도 “머리를 빌릴 수 있는” 머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정치는 곧잘 운전과 비교된다. 이끄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히틀러에게 처형당한 독일의 저항목사 본 회퍼는 나치즘을 ‘미치광이 운전사가 모는 차’에 비유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YS는 ‘무면허 운전사’였다. 그리고 이른바 문민체제는 ‘뺑소니 차량’과 다를 바 없었다.
YS는 개혁을 절규하면서 때로는 도덕정치의 선구자로 고성(高聲)을 지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밀실비리의 공모자로 숨소리를 죽이기도 했다. 국민적 소망을 하루아침에 저버리고 여당으로의 변신도 마다하지 않은 ‘결단’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면서, 동시에 국민적 기대를 한 몸에 모으기도 했던 ‘문민’ 대통령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양면성에 어울리게 YS는 통일시대에 ‘이중성의 시대’를 풍미케 했다. 그리하여 특히 YS 집권 이후 ‘갈팡질팡’, ‘냉탕온탕’, ‘그럭저럭’, ‘이럭저럭’, ‘오락가락’, ‘두루뭉실’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온 사회에 ‘막가파’식 ‘막가이즘’이 횡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치욕의 IMF였다.
DJ는 민주주의를 위한 불타는 용기와 ‘인동초’(忍冬草)같은 투지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불굴의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었던가. 그것이 또한 바람직한 정치가의 상(象)이기도 했다. 칠흑 같은 질곡 속이지만 국민들로 하여금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앞장서서 이끌고 격려하는 경륜가의 당당한 모습, 그것이 온 국민이 우러를 수 있는 정치인의 참된 자태가 아니겠는가.
김대중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무엇보다도 경제 회생과 정치 개혁의 완수였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국민의 열띤 기대에 만족할 만큼은 부응하지 못하였다.
김 대통령이 개혁을 역설했음에도 반 개혁적인 세력과 손잡았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한 가지 경탄할만한 일은 이념과 성향이 달라 출범 때부터 불신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DJ와 JP의 두 당이 무려 수년 동안이나 손을 맞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애초부터 불륜관계이긴 했지만, 그것은 가히 세기말적인 코미디라 할 만 한 것이었다. YS가 3당 야합’을 저질렀다면, DJ는 DJ·JP ‘2당 불륜’을 결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또 어떠한가?
<계속>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