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林悌, 1549~1587) /한우가(寒雨歌)-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寒雨:조선 선조 때 평양 명기)「화답가」-
조선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임제와
평양 명기 한우 사이에 주고 받은 화답가는
그 아름다운 사랑의 화음으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된다.
천하의 명기를 천하의 방랑시인 임제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 접근할 수도 없다.
임제는 넌지시 한우의 인품과 풍류를 떠볼 겸 내심을 드러낸다.
임제는 가장 자기다운 감성으로 가장 시인다운 메시지를 띄운다.
저뭡봉?거두고 우회로를 탐색하며,
직접적인 구애 대신 암유적인 시상을 건넨다.
그대 한우가 있는 곳 북쪽 하늘이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비옷도 없이 그대를 찾아 나섰네.
그대 있는 곳에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혹심하다 한들 가지 않을 리 없지만
산에는 눈이 오고..
그대 명인을 만나는 길이 어찌 호락호락 쉬울 리가 있겠는가!
들에는 찬비가 내리는 구려.
내리는 찬비를 온몸으로 맞았으니 찬 몸으로 얼어 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의적(重義的) 표현이야 시가 지닌 고유한 수법이다.
임제의 시처럼 시어가 조금도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다의적인 함의를 온전하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한우 그대가 있는 평양에 나 임제는 아무 대책(우장) 없이 간다.
갖춘 것이 있다면 명인을 알아보는 시인의 안목과
그 안목을 박대하지 않으리라는 그대의 문명(文名)을 믿는 나의 소신뿐.
그대를 만나는 길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눈/찬비)도 안다.
그러나 끝내는 그대와 어우러져(얼어 잘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자게 되겠지만,
그 찬비는 뜨거운 열정을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천하의 명기 한우가 아닌가!
얼어 자지만 그 ‘얼다’는 냉동(冷凍)의 의미와 함께
'교접하다'는 함의를 지닌 고어가 아닌가!
그러니 ‘찬비를 맞아 얼어 잔다’는 것은 그대로
'뜨거운 사랑을 만나 녹아 잔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뜨거운 시정처럼 틀림없이 사랑의 열정을 지녔을
그대를 만나 만리장성을 쌓고 싶다는 메시지다.
은근하지만 추하지 않고,
열정적이지만 무모하지 않은 사랑의 메시지라 아니할 수 없다.
한우가 이런 명문을 보낸 당대의 최고 시인을 알아보지 못한대서야
어찌 평양 명기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한우의 화답이 또한 절창이다.
눈비를 맞았대서 굳이 얼어 자서야 되겠습니까?
찬비에 젖었대서 무슨 일로 얼어 자시려 하십니까?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참 시인을 맞이하게 위해 준비한
원앙새를 수놓은 베게며, 비취색 아름다운 이부자리는
누구를 위한 보금자리이건대 얼어 잔단 말입니까?
사랑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 자원방래-自遠訪來한 오늘은
찬비[寒雨]를 만났으니 만리장성을 쌓으며 녹아 주무십시오.
사랑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명시도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우의 섬세한 문재(文才)를 알아본 임제의 시안(詩眼),
한우의 오지랍 넓은 풍류를 알아본 임제의 호연지기(浩然之氣),
한우의 후덕한 인품을 간파한 임제의 안목(眼目)이
명시 ‘한우가’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임제가 풍기는 거칠 것 없는 시재(詩才)를 알아본 한우의 감성,
호방 쾌활한 임제의 덕성을 알아챈 한우의 풍류,
기품을 잃지 않는 유혹에 품격을 갖추어 응답하는 한우의 명인다운 시재(詩才)가
명시 ‘화답가’를 낳았다.
천하를 주유하며 시를 노래했던 풍류객과
참 시인을 알아볼 줄 알았던 명인이 만나 이룬 명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화답가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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