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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여러 번 살펴보는 과정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목에 순천 조계산이 있었고, 승보사찰 송광사 너머 산자락에 깃든 태고총림(太古叢林) 선암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송광사는 두어 차례 들렀으나 선암사는 초행이다. 노승과 동자승이 등장하는 뒷간 광고로 널리 알려진 이 절집을 나는 작가 조정래의 출생지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나는 조정래보다는 그의 부친을 먼저 알았다. 7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닌 이라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다음 노래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략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쇠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勇姿).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그렇다. '나도 푯말되어 살고 싶다'는, 시조치고는 드문 문장형 제목을 단, 이 작품을 쓴 이는 승려 조종현이다. 그리고 그가 낳은 4남 4녀 중 둘째가 작가 조정래이다. 조정래가 선암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물론 나는 <태백산맥>의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통하여 알았다. 선암사에서? 웬 절집에서 아기가 태어난담. 선암사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조 시인과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태백산맥>의 작가를 연결한 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직관이었다. 절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요즘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조정래가 태어난 것은 해방 이태 전이다. 아직 조계종과 태고종이 갈리기 전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이 불교개혁의 차원에서 일본 불교로부터 수용하고 적극 권장한 대처제도로 많은 승려들이 결혼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대상이 되면서 대처제는 해방 후 된서리를 맞는다. 여러 해의 법정 분쟁을 거쳐 조계종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 종파가 태고종을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1970년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불교는 마치 중세봉건사회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구닥다리 종교로만 여겨졌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적 얘기다. '동화사에 갔더니 중들이 탁구를 치고 있었는데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고 모두 전염된 듯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요즘은 경내에 승용차를 끌고 오는 자가운전 스님도 많고, 카세트가 염불을 대신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승려의 혼인을 바라보는 눈길을 그리 곱지 않은 듯싶다. 종교적 금욕과 독신 생활을 수행과 신에 대한 귀의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내를 둔 수행자'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더디기는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 비추어 보면 조계종의 승려나 가톨릭 신부들의 금욕 독신 수행의 계율도 다분히 빛이 바래고 있는 느낌이다. 창건 528년 된 절집에서 느끼는 60∼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
그러나 해를 넘겨 진행되고 있는 신구 주지간 싸움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착잡하다. 지난 1월 11일 오후 늦게 선암사를 찾았을 때, 산사는 평온하기만 했다. 저잣거리의 대중들이 수행자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감안하면 승려들이 사찰의 운영을 두고 벌이는 때아닌 활극은 이 절집이 일천오백 년 동안 쌓아온 선방으로서의 아름다운 이름을 일거에 무화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바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였고, 시간을 놓치면 어두워져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서둘러 경내를 돌았다. 대웅전 앞뜰을 지나 무우전, 장경각을 돌아 무량수전과 해천당을 거치는 길이었다. 절집을 찾은 대중들이 적지 않았지만, 경내를 돌면서 나는 문득 이 낡은 절집을 덮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라는 걸 깨달았다.
선암사가 서른 개가 넘는 전각이 위아래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는데도 비좁고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은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에 전각들을 배치해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시선이 분절되기 때문이고, 위아래에 비해 좌우가 다소 넓은 까닭이다. 그러나 봄은 아직 멀다
무우전(無憂殿)의 안존히 닫힌 대문과 완만히 구부러지는 돌담, 돌담 옆에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선 매화나무와 벚나무가 연출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오래 그윽하게 마음에 잔잔히 젖어든다. 경내에서 가장 외져서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는 듯, 잠긴 문을 밀어보다 말았다. 매화는 언제 피는가. 시인 송수권은 선암사 무우전 한편에서 매화를 노래했다. 예닐곱 그루 성긴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 송수권 '조선 매화' 선암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낡고 오래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절집이 400만 불자를 가진, 조계종에 이은 제2 종단의 총림인데도 경내에 수차에 걸쳐 요란하게 진행되었을 중창 불사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까닭이다. 여러 전각들의 단청도 낡았고, 경내에 드문드문 주차된 차량을 빼면 길과 건물에 손을 댄 자국도 찾아보기 어렵다.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나종영 <우수(雨水)> 전문
주차장으로 내려와 승용차의 문을 열며 우리는 바야흐로 30, 4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밀레니엄 연대로 천천히 진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