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응과 서호수 부자(父子)의 과학관
문 중 양(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8세기 후반 조선을 대표하는 사대부 과학자로 달성 서씨 가문의 서명응과 서호수 부자(父子)를 들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들 서씨 가문은 소론으로서 영·정조대 탕평정국 하에서 노론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던 혁혁한 경화사족 (京華士族) 집안이었다. 특히 정조대에는 아우 서명선이 영의정으로서 정조를 측근에서 보좌할 때 형 서명응은 대제학으로서 두 형제가 정계와 학계를 각각 대표하기도 했다. 서명응은 정조 즉위 초 규장각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규장각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편찬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정조대 이루어진 학문적 사업과 성과물을 서명응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이 두 형제에 대한 총애도 각별해서 정조는 서명응에게 친히 ‘보만(保晩)’이란 호를 하사하고, 1787년 그가 죽자 문집을 규장각에서 간행하도록 명할 정도였다.
조선 천문역산을 크게 발전시킨 천문학자 부자(父子)
부족할 것이 없는 집안의 학문적 분위기에서 자란 서호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사대부 천문학자로 성장했다. 이미 영조대 말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천문학 분야의 「상위고」 집필을 맡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다. 정조 초에는 사은부사로 중국에 가서 『사고전서』를 구매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방대한 『도서집성』을 구해오기도 했다. 그는 정조대 내내 관상감 제조로서 정조대에 이루어진 크고 작은 대부분의 천문학 관련 사업들을 주관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천문역산 사업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18세기 최말 경에는 조선의 천문역산이 크게 발전해 중국에의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날 정도였다.
서명응과 서호수는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답게 깊이 있고 방대한 천문학서들을 저술했다. 아버지 서명응은 서양 천문학 지식을 포함해서 최신의 천문학 이론을 성리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선천사연』을 비롯해서 천체들에 대해 설명해 놓은 『비례준』, 천문 계산의 원리를 설명해 놓은 『선구제』 등을 집필했다. 아들 서호수는 당대 최고의 천문학 책인 『역상고성』과 수학서인 『수리정온』의 해설서인 『역상고성보해』와 『수리정온보해』 등의 천문역산 해설서들을 집필했다. 서호수의 이 책들은 관상감 관원들이 참고하면 매우 유용할 정도의 깊이 있는 전문서적이었다.
그런데 부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명응과 서호수 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바로 천문역산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다. 아버지 서명응의 학문적 지식관은 기본적으로 선천역(先天易)에 기반해 있다. 즉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자연을 포함하는 모든 지식이 원리적으로 선천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 하에, 모든 지식 체계를 선천역에 입각해서 통합적으로 체계화하려던 노력이 그의 학문 활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선천역으로 모든 지식 체계를 대통합하려던 원대한 포부를 펼쳤던 것이다. 실제로 그와 같은 지식의 대통합을 꾀하려던 그의 저술 『보만재총서』 첫머리에 천문학 이론을 선천역으로 재해석한 『선천사연』이 놓였던 것은 이러한 서명응의 학문적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와 정반대의 학문적 관점이 나올 수 있었다니
그러나 다음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서호수는 아버지 서명응의 학문적 관점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체로 악(樂)과 역(曆), 역(易)과 역(曆)의 원리는 일관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법은 아주 다른 것이니 결코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현혹되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대연력(大衍曆)이라는 당나라 때의 역법이 주역의 원리에서 비롯된 상수학적인 수(數) 개념에 입각한 역법으로 견강부회해서 현혹시키는 올바르지 못한 역법이라며 당당하게 혹평하는 말이다. 즉 서호수는 역법을 역(曆)의 원리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올바르지 않다고 단언하면서, 그러한 시각을 지닌 중국의 사대부 학자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천역에 기반해서 천문역법의 원리를 재해석하려던 대표적인 인물이 그의 아버지 서명응이 아니던가? 옹방강을 만나 쏟아 부었던 비판의 화살이 아버지 서명응에게도 향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서호수는 서명응의 대표 저서들을 종합적으로 묶은 『보만재총서』의 편찬·간행을 옆에서 묵묵히 도왔었다. 그는 아버지 서명응의 학문적 관점과 성과에 대해서 비판의 문구 하나 던진 적이 없었다. 감히 아버지의 학문적 업적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서명응 같은 아버지 밑에서 전혀 정반대의 학문적 관점을 지닌 서호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18세기 말 조선후기 학계가 이와 같이 예외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학풍이었다면 지나친 과대평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