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모( 父母)의 사랑
부모(父母)의 사랑
忠靖公派 朴源造(일명 鐘萬)
사랑은 아끼고 위하며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을 말한다.
사랑은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있는 상대를 말한다.
사랑!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말이다.
삶을 살아가며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사랑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동물인 인간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단골 메뉴다.
철학자는 제각기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시인은 자신만의 감성에 사랑을 입히고, 전 세계 가수들은 다양한 언어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또 사랑이 빠진 소설도 영화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빠진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고, 사랑이 주는 갈등이 없는 영화는 흥행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또 예술작품은 어떠한가. 그림, 조각, 도자기... 어느 하나도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랑은 생각보다 많다. 도정환의 시(時) 가운데 ‘사랑하는 당신’, 황순원의 소설 중 ‘첫사랑’,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단원 신윤복의 ‘풍속도’에 영화 중 에는 ‘연애소설’,‘첫사랑’ 등...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사랑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동.서양을 통틀어 사랑에 대한 기록을 찾는 일은 바닷가에서
모래알을 찾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그리고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우리의 삶과 함게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독립체가 아닌 객체를 필요로 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을, 스승이 제자를, 신이 인간을 아끼는 것처럼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가 하위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사랑을 8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상주의적 사랑(Platonic), 친구 간의 우정(Philia), 육체적사랑(Eros), 헌신적 사랑(Agape), 유희적 사랑(Ludus), 친구 같은 사랑(Storage), 소유적인 사랑(Mania), 실용적 사랑(Pragma) 등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일반적인 사랑은 크게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의 3가지로 나눈다.
첫째, 에로스(Eros)는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사랑이다.
에로스타라는 말을 들으면 거의 대부분 사람은 성적인 욕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에서의 에로스는 플라톤이 이야기한 사랑의 본질을 가리킨다. 플라톤은 사물에 이데아라는 이상적인 상태가 있다고 했다. 그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충족감을 얻기 위해서다. 플라톤의 사상은 그런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남녀사랑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에로스는 상대방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자주 듣는 플라토닉 사랑이란 말도 이상적이며 관렴적인 사랑을 말한다.
둘째, 아가페(Agape)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조건적 사랑 즉, 신(神)이 인간에게 주는 아낌없는 사랑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존재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자신만 섬긴다면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준다. 비슷한 사랑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가족애가 있는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모(父母)의 사랑은 바로 아가페 사랑을 말한다.
셋째, 필리아(Philia)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단어로 우애(友愛), 동료애, 우정(友情)을 뜻한다.
필리아는 사랑의 일종이긴 하지만 에로스처럼 일방적으로 추구하지도 않고, 아가페처럼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지도 않는다. 필리아는 자기 자신과 대등하게 남을 사랑한다, 친구를 위한다는 것은 친구를 자기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우정이 사랑이라고 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도 많지만, 친구와 애인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을 보면, 우정도 사랑의 범주 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윤리를 논하면서 동료애를 최고의 윤리로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필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상징하는 용어라 하겟다.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은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다르다.
공자(孔子)의 부모 사랑과 효(孝)는 인(仁)에서 나오고, 맹자(孟子)의 부모 사랑은 측은지심(惻隱之心)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비하자면 맹목적인 부모의 자식 사랑, 춘향적인 어허 둥둥 사랑, 심청이의 내 몸 희생의 인당수 사랑, 피아골적인 사상적 사랑이라고나 할까?
동.서양(東.西洋)이 아무리 사랑에 대한 관점(觀點)과 시각(視覺)이 다르다 해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으뜸일 것이다. 우리 속담 중 “부모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고, 자식 마음속에는 앙칼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부모 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님과 하느님 같은 자비로운 사랑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대할 때 마음속에는 칼을 지닌 것 같다는 것이다.
어느 정신분석학자는 부모의 사랑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는데, 어머니 사랑은 특별한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사랑이며, 아버지 사랑은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의무를 다하며 보답을 바라는 조건부적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모의 사랑만큼은 무한하다고 생각된다. 어릴 때부터 다 자란 성인이 되기까지 그 사랑이 끝이 없다. 칠순이 넘은 나 역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는 늘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줄 알았고, 아버지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항상 돈이 넉넉한 줄로만 알았으니까 말이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어머니의 권위가 높아져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위주로 가족들이 모이는 모계중심이 강해지고 있다. 나 역시 딱히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아내의 주위에 맴돌고 있음을 알고 억지 심통을 부려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사회구조가 변해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사회현상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본질의 변화는 없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부모들의 자식에게 존중과 위엄이 있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요즘 철이 이상해서 그런지 부모들이 철이 없어진다. 선거철만 되면 표를 모으기 위해 굽실거리는 후보들을 따라 투표의 권력을 휘두르는 노인들, 노인정, 양로원, 종교단체에서 경로우대여행을 따라다니는 모습들, 해수욕장 파라솔 아래에서 자식, 손 주, 며느리, 사위들 옷만 지키며 멍~하니 철썩거리는 바닷물만 쳐다보는 노인들을 생각하여 본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부모다.
그러나 그 부모들의 모습에서는 자식으로부터의 존중과 위엄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씁쓸함이 묻어 나온다. 햇살 좋은 어느 봄날 양지 바른쪽이나 양로당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자식자랑을 하는 모습들이 애틋하기까지 하다.
사실은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 부모들의 현 주소이기도 한다.
매년 5월은 가정의 달이지만 금년에는 세월호 침몰과 구원파 수배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겹쳐서 여느 5월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여름철이 되니 휴가여행과 외국여행을 다니는 인파가 늘면서 또래의 노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 모두 자식에 대해 맹목적인 한결 같은 아가페(Agape)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자식은 또 다른 자식을 향한 아가페(Agape)의 헌신적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자식을 향한 바보 같은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 것이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다.
현재의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지만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부터 일방을 향한 맹목적 사랑으로 이어온 오랜 사랑의 한 모습이다. 오늘의 내가 내 자식을 대하듯 연로한 부모를 사랑할 때, 내 자녀도 나를 그렇게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로 철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는 있지만, 사랑의 속성이 변하기는 어려운 만큼 오늘 부터 부모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보는 것이 결국은 나이가 들었을 때 나와 자식에 대한 관계에 대한 투자인 만큼 하루하루 사랑을 실천해 보는 것을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