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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드라마 `이산` 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둥지 2008. 1. 22. 20:27

정조는 왜 사랑받는가? 나 또한 그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짬이 난다면 그 이유에 대해 찬찬히 적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게 되는 역사 속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정리해보자.

 

하나. 이 글은 다만 개인적인 의문과 흥밋거리임을 밝힌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정사(政事)라는 것도 결국 권력에 의지하고 그 권력은 쥐고 있으면 즐거운 것이나, 권력을 지니고 있다한들 마음이 편할리 없다. 지키느냐? 잃느냐에 따라서 생과 사가 나눠지니 한번 잡은 권력은 자신과 자손을 위해서 반드시 매달리기 마련이다. 사화(士禍)가 사화(死話)가 되는 까닭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어느 누가 능지처참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영조는 적통이 아니었고, 그러한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론의 지지가 절실했다. (또 조작일지는 모르나? 천의소감 같은 책에는 영조가 왕위계승 전에 세자책봉을 종용한 것은 노론 벽파라는 말이 있다)허나 영조는 성군이었고 그의 아들 사도세자 또한 현명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노론의 나라가 일방적이라는데 있었고. 왕권을 강화하고 그 흐름을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데 있다. 개혁!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영조 25년)을 통해 그 개혁의 의지를 드러냈다. 개혁의 의지라는 것은 노론을 멀리하면서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노론은 사도세자를 광증을 가져 대통을 이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영조를 꼬듯겨 결국 임오년 참람하게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다.

 

 

 영조: 삼종의 혈맥이라 하는 손이 귀한 눈물의 임금, 경종 독살설의 중심에 서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역시 천한 신분이었다. 허나 성정이 지극히 맑아 정치를 바로 했으며,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정치에 제동을 건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 꾀임에 빠져 사도세자에게 차마 내리지 못할 처분을 시행했다. 이후 금등지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삼종의 혈맥을 유지하기 위해 세손의 안위를 지켜주고 눈을 감는다.

 

 

 

 

 

사도세자: 북방에 큰 야망을 품었던 효종을 닮은 아이,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으며 사리가 밝고, 무예에 능했다. 말 그대로 성군의 자질이 가득했으나, 노론을 멀리했다.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죄를 뒤집어쓰고 뒤주에 갇혀 죽는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해야했던 세손 이산: 이 장면을 목격한 사도세자의 아들이 바로 열 한살의 세손 이산이다. 드라마 이산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비롯한 이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드라마 이산은 드라마일 뿐이다. 그 또한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운 것도 사실이다. 드라마만큼 피부에 와 닿게 역사를 가르칠 수는 없다. 그래서 드라마가 중요하다. 이산은 자신의 우울한 기운을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잊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홍국영: 과거에 급제했지만, 훗날 그 급제 또한 온당하지 않았다고 추궁당했던 인물, 세손의 편에서서 정권창출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더 큰 권력을 탐했다.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에 후궁으로 들일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후대 사가들은 정조 역시를 그를 잘 이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읽어보면 정조가 얼마나 무서운 임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와 정조와 반대편에 섰던 무리들...

 

 

 

정순왕후: 결과적으로 벽파의 실체에는 정순왕후가 버티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싶다. 벽파의 우두머리로 정조가 끝내 정순왕후를 치지 못한 것으로 그의 모든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정조 독살설의 중심인물이며, 정조 사후 장용영을 없애고, 개혁을 원점으로 돌린다.

 

 

혜경궁 홍씨: 훗날 한중록이라는 글을 통해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사무치게 슬퍼한다. 하지만 홍씨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면서 이제는 붕당정치의 노회한 정객으로 인식되고 있다.

 

 

홍봉한: 그 집안은 대단했으나, 늦은 나이에 출사표를 던지게 되는 인물,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지만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1등 공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도세자를 가르친바가 있기도 하다. 세자이자, 제자이며 딸의 남편 즉 사위를 죽도록 내몰아야했던 상황! 조선의 궁중이 무섭다.

 

 

 

홍인한: 사도세자의 숙부로 거들먹거렸던 인물,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말년에는 그 도가 지나쳐 영조의 교지를 무시하는 극악한 행동을 자행한다. 특히 정조 즉위 후 역모의 중심인물로 사사당한다. 드라마에서는 인물의 캐릭터가 가볍고, 경박하기 그지 없는 감초 역할로 등장하지만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 중에 역적이며 그 수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영조의 딸 화완옹주와 그 양자인 정후겸: 영조는 딸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사도세자 이후 더욱 큰 사랑을 얻었던 것은 화완옹주였다. 그러한 화완옹주는 노론에 편에 서서 결국 사도세자와 정조의 반대편에서 선다. 정후겸 역시 역모를 꿈꾸다가 사사당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의 핵심은 그가 고립무원(孤立無援) 사지에 내몰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중심에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그러한 장인의 횡포를 묵과했던 혜경궁 홍씨가 있었다. 한국사 재해석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이러한 홍봉한과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임오년 당시 좌의정이었던 홍봉한은 사도세자가 죽자 곧 사도세자를 끝까지 비호했던 윤숙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한다. 홍봉한은 이미 그만큼 이 사건과 밀접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혜경궁 홍씨는 어땠는가? 혜경궁 홍씨 역시 붕당정치의 끝자락에 탐욕에 물든 홍씨 가문의 처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한중록을 통해 <홍씨 가문의 신원>을 말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가문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고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사도세자 죽음 이후 풍산 홍씨 가문은 정순왕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시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두고 나선 저급한 암투에 지나지 않았다.

 

 

 

효의왕후: 정조의 정비로 후덕한 인품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던 인물.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원빈 홍씨를 후궁으로 집어 넣었다. 병색이 많았던 그녀는 1년만에 죽고, 이 죽음이 효의왕후가 연관되었다고 믿었던 홍국영은 중궁전의 나인들을 매질하고, 효의왕후를 시해하려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국영은 실각한다.

 

 

 

채제공: 벽파가 정권을 가지고 있던 당시 남인(이황의 사상을 계승했던 학파)의 정통 허목의 제자로 정조 즉위후 왕권강화를 위해 소신을 다한다. 특히 이후 정약용 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허나 채제공 사망 이후 주요 남인들이 천주교도로 몰려 다수가 죽거나 귀향가면서 실세에서 멀어진다. 현재 드라마에서는 그 비중이 매우 축소되어있다.

 

드라마 '이산'은 이제 곧 영조의 건강악화와 사망,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에 등극할 것이다. 정조는 직위 후 첫 교지를 통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고한다. 이는 정조의 근본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장용영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홍국영 등에게 권력을 주어 정적 숙청에 나선다. 홍국영의 역할은 이라한 정조의 오른팔로 정적숙청을 끝내고 사라진다. 오히려 정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이루려고 했던 것처럼 규장각을 통해 자신의 인제들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개혁의 꿈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독살설의 의문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정조는 살아 생전 3번 어진을 그렸는데, 모두 무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알려진 그림은 89년에 그려진 상상도에 지나지 않는다.

왕위에 올라 내린 정조의 첫 교지는 다음과 같았다.

 

즉위하는 날 내린 윤음 병신년(1776) - 卽阼日綸音 丙申

 

왕은 이르노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종통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될 것을 명하셨지만, 전에 선대왕께 올린 상소를 보면 근본을 둘로 할 수 없다는 나의 뜻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엄히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인정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다. 향사(饗祀)의 절차는 응당 대부(大夫)로서 제사 지내는 예를 따라야 하겠고 태묘(太廟)와 동일하게 할 수는 없다. 혜경궁에 대해서는 의당 경외에서 공물(貢物)을 진헌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겠으나 대비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다. 유사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한 다음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괴귀(怪鬼)하고 불량한 무리가 이를 빌미로 감히 하지 못할 말을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선대왕의 유교(遺敎)가 있으니, 응당 해당되는 형률로써 논하고 선대왕의 영령께 고할 것이다. 모두 잘 알도록 하라.

王若曰。嗚呼寡人。思悼世子之子也。先大王爲宗統之重。命予嗣孝章世子。嗚呼。前日上章於先大王者。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禮雖不可不嚴。情亦不可不伸。饗祀之節。宜從祭以大夫之禮。而不可與太廟同。至於惠嬪宮。當有京外貢獻之儀。亦不可與大妃等。其令所司。議于大臣。講定節目以聞。旣下此敎。怪鬼不逞之徒。藉此而有不敢言之言。則嗚呼。先大王遺敎在焉。當以當律論。以告先大王之靈。咸須知悉。

 

 

강한 것은 약한 것 앞에서 움직이고,

약한 것 또한 강한 것 앞에서 움직인다.

무릇 힘이란 움직이는 것이다.

시대가 어찌되었던 간

 

어쩌면 그래서

역사란 회귀하는 것이다.

출처 : 멋진 CEO를 위하여
글쓴이 : zerosmi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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